본문내용
없거나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지만, 문명은 상당히 많은 개인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문명과 성행위가 대립하게 뒨 유래를 찾는 것도 그와 거의 같은 태도라고 발할 수 있다. 애정 관계가 절정에 이르면, 주위에 관심을 기울일 여지가 전혀 남지 않는다. 한 쌍의 연인은 자신들만으로 충분하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조차도 그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에로스가 자기 본질의 핵심 ― 복수의 이난을 하나로 만들려는 의도 ―을 이렇게 분명히 드러내는 경우는 엇다. 그러나 두 인간의 사랑을 통해 잘 알려진 방식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면, 에로스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 뒤에 숨어있는 진실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간은 사랑받기를 원화고 공격을 받아도 기껏해야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뿐 상대를 반격하지도 못하는 유순한 동물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인생 경험과 역사에 대한 지식 앞에서 누가 감히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이 잔인한 공격 본능은 대개 도발을 기다리거나, 좀더 온건한 수단을 사용해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목적에 이바지한다. 공격 본능을 발휘하기에 유리한 상황, 즉 평소에 공격 본능을 억누르는 정신적 억제력이 작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격 본능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인간의 본래 모습은 같은 종족을 존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야수임을 폭로한다. 훈 족의 대이동이나 침입, 칭기즈칸과 티무르가 이끄는 몽골족의 침입, 신앙심 깊은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또는 최근에 일어난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저질러진 잔학 행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견해의 진실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 속에서도 감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도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할 이런 공격 성향은 이웃과 우리의 관계를 저해하고, 문명에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강요하는 요인이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 상호 적개심 때문에 문명 사회는 끊임없이 붕괴위기를 만고 있다. 본능적 열정은 이성적 이익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문명이 이난의 공격 본능을 제한하고 정신적 반응 형성을 통해 공격 본능의 표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문명은 동일시와 목적 달성이 금지된 애정 관계를 부추기기 위한 수단을 사용하고, 성생활을 제한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상적인 명령 ― 이 명령이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본성과는 정반대의 경향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부룩하고 문명의 노력은 지금까지는 별로 많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범죄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가지면 세련되지 못한 형태의 무절제한 폭력은 막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좀더 신중하고 세련된 형태로 표출되는 인간의 공격 본능에 대해서는 법률도 전혀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에 타인에게 걸었던 기대가 환상임을 깨닫고 그 기대를 버려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타인의 악의 때문에 자기 인생이 얼마나 더 어렵고 고통스러워졌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이 인간의 행동에서 갈등과 경쟁을 제거하려 한다고 문명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갈등과 경쟁은 분명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대립이 반드시 적대 관계일 필요는 없다. 대립은 단지 악용되어 적대 관계의 <계기>가 될 뿐이다.
인간 본성의 결코 파괴할 수 없는 특징인 공격 본능은 문명의 새로운 발달 방향을 따라가리라는 것이다. 이 공격 본능을 인간이 단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은 이 본능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비교적 작은 문화 집단은 침입자에게 적개심을 발산하는 형태로 이 본능의 배출구를 제공하는데, 그 이점은 결코 얕볼 수 없다. 공격 본능을 발산할 수 있는 대상이 남아 있는 한, 상당수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단결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전에 나는 스페인인과 포르투갈 인, 남부 독일인과 북부 독일 인, 잉글랜드 인과 스코틀랜드 인처럼, 서로 이웃해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점에서도 서로 가끼운 공동체들이 오히려 끊임없이 반목하고 서로를 경멸하는 현상을 논한 적이 있다. 나는 이 현상을 <사소한 차이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이 명칭은 현상을 별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인접한 공동체끼리 반목하는 것은 공격적 성향을 비교적 해롭지 않고 편리하게 만족시키는 방법이고, 그 덕택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더 쉽게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문명이 인간의 성욕만이 아니라 공격 본능에도 그렇게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면, 인간이 그 문명 속에서 행복해지기 어려운 이유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원시인은 본능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훨씬 행복했다. 다만 원시인이 이 행복을 오랫동안 누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는 것이 그 효력을 없애 버린다. 문명인은 행복해질 가능성의 일부를 희생하고, 그 대신 약간의 안전을 얻었다. 그러나 원초적 가족에서는 우두머리만이 본능을 마음껏 만족시킬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문명이 막 싹튼 그 시대에는 문명의 이익을 누리는 소수와 그 이익을 박탈당한 다수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오늘날 존재하는 원시적 부족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본능에 따라 생활하는 그들은 결코 우리가 부러워할 만큼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의 생활은 현대 문명인에게 따라다니는 제약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훨씬 엄격한 제약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 뒤에 숨어있는 진실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간은 사랑받기를 원화고 공격을 받아도 기껏해야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뿐 상대를 반격하지도 못하는 유순한 동물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인생 경험과 역사에 대한 지식 앞에서 누가 감히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이 잔인한 공격 본능은 대개 도발을 기다리거나, 좀더 온건한 수단을 사용해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목적에 이바지한다. 공격 본능을 발휘하기에 유리한 상황, 즉 평소에 공격 본능을 억누르는 정신적 억제력이 작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격 본능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인간의 본래 모습은 같은 종족을 존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야수임을 폭로한다. 훈 족의 대이동이나 침입, 칭기즈칸과 티무르가 이끄는 몽골족의 침입, 신앙심 깊은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또는 최근에 일어난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저질러진 잔학 행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견해의 진실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 속에서도 감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도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할 이런 공격 성향은 이웃과 우리의 관계를 저해하고, 문명에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강요하는 요인이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 상호 적개심 때문에 문명 사회는 끊임없이 붕괴위기를 만고 있다. 본능적 열정은 이성적 이익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문명이 이난의 공격 본능을 제한하고 정신적 반응 형성을 통해 공격 본능의 표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문명은 동일시와 목적 달성이 금지된 애정 관계를 부추기기 위한 수단을 사용하고, 성생활을 제한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상적인 명령 ― 이 명령이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본성과는 정반대의 경향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부룩하고 문명의 노력은 지금까지는 별로 많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범죄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가지면 세련되지 못한 형태의 무절제한 폭력은 막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좀더 신중하고 세련된 형태로 표출되는 인간의 공격 본능에 대해서는 법률도 전혀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에 타인에게 걸었던 기대가 환상임을 깨닫고 그 기대를 버려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타인의 악의 때문에 자기 인생이 얼마나 더 어렵고 고통스러워졌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이 인간의 행동에서 갈등과 경쟁을 제거하려 한다고 문명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갈등과 경쟁은 분명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대립이 반드시 적대 관계일 필요는 없다. 대립은 단지 악용되어 적대 관계의 <계기>가 될 뿐이다.
인간 본성의 결코 파괴할 수 없는 특징인 공격 본능은 문명의 새로운 발달 방향을 따라가리라는 것이다. 이 공격 본능을 인간이 단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은 이 본능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비교적 작은 문화 집단은 침입자에게 적개심을 발산하는 형태로 이 본능의 배출구를 제공하는데, 그 이점은 결코 얕볼 수 없다. 공격 본능을 발산할 수 있는 대상이 남아 있는 한, 상당수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단결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전에 나는 스페인인과 포르투갈 인, 남부 독일인과 북부 독일 인, 잉글랜드 인과 스코틀랜드 인처럼, 서로 이웃해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점에서도 서로 가끼운 공동체들이 오히려 끊임없이 반목하고 서로를 경멸하는 현상을 논한 적이 있다. 나는 이 현상을 <사소한 차이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이 명칭은 현상을 별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인접한 공동체끼리 반목하는 것은 공격적 성향을 비교적 해롭지 않고 편리하게 만족시키는 방법이고, 그 덕택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더 쉽게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문명이 인간의 성욕만이 아니라 공격 본능에도 그렇게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면, 인간이 그 문명 속에서 행복해지기 어려운 이유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원시인은 본능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훨씬 행복했다. 다만 원시인이 이 행복을 오랫동안 누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는 것이 그 효력을 없애 버린다. 문명인은 행복해질 가능성의 일부를 희생하고, 그 대신 약간의 안전을 얻었다. 그러나 원초적 가족에서는 우두머리만이 본능을 마음껏 만족시킬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문명이 막 싹튼 그 시대에는 문명의 이익을 누리는 소수와 그 이익을 박탈당한 다수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오늘날 존재하는 원시적 부족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본능에 따라 생활하는 그들은 결코 우리가 부러워할 만큼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의 생활은 현대 문명인에게 따라다니는 제약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훨씬 엄격한 제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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