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조직신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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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 조직신학개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감사의 글
책 머리에
1. 신학의 과제
1.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서의 신학
2. 신학의 문제성(Questionableness)
3. 신학의 질문들
4.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방법들

2. 계시의 의미
1. 계시란 무엇인가?
2. 일반계시와 특수계시
3.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으로서의 계시
4. 계시, 성경, 교회

3. 성경의 권위
1. 근대 문화에서의 권위의 문제
2. 성경의 권위에 대한 부적절한 접근들
3. 성경의 필요불가결성(Indispensability): 성경은 성령의 능력으로써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함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다.
4. 성경 해석의 원칙들

4. 삼위일체 하나님
1. 근대 신학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문제
2. 삼위일체론의 성서적 뿌리
3. 고전적 삼위일체론
4. 왜곡된 하나님 이해들
5. 삼위일체론의 의미의 재진술
6. 하나님의 속성
7.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5. 선한 창조
1. 기독교 신앙과 생태학적 위기
2. 창조론의 주제들
3. 창조의 모형들(models)
4. 창조론과 현대 과학

6.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신비
1. 섭리에 대한 믿음과 악의 실재
2. 신학적 전통에서의 섭리와 악
3. 섭리와 악의 문제에 대한 재고찰
4. 최근의 신정론
5.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고난

7.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
1.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여러 해석들
2. 창조된 인간
3. 타락한 인간
4.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인간

8.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1. 그리스도론에 있어서의 문제들
2. 그리스도론의 원칙들
3.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고전적 서술들
4.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고전적 해석들
5. 해방의 기독론
6. 폭력과 십자가
7.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

9.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
1.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과 그 회복
2. 성령 신학의 대략적 모습
3. 그리스도인의 삶: 칭의(Justification)
4. 그리스도인의 삶: 성화
5. 그리스도인의 삶: 소명

10. 새로운 공동체
1. 교회의 문제
2. 신약성경의 교회상
3. 현재의 교회 모형들(models)에 대한 비판
4. 교회의 고전적 표지들

11. 선포, 성례전, 목회사역
1. 말씀의 선포
2. 성례전이란 무엇인가?
3. 세례의 의미
4. 주의 성찬의 의미
5. 세례, 주의 성찬, 그리고 윤리
6. 안수받은 목회사역(Ordained Ministry)의 의미

12. 기독교 희망
1. 핵무기 시대에서의 희망의 위기
2. 기독교 희망을 해석하는 원리들
3. 기독교 희망의 고전적 상징들
4. 종말론과 윤리

부록 1. 자연신학: 대화
부록 2. 부활: 대화
부록 3. 정치신학: 대화

본문내용

서를 한 번 생각해 보게. 246명의 '고백의 그리스도인'에다가, 7,259명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덧붙여 보고할 수 있으니.
라너: 칼, 그것은 참 무례한 반응일세. 그 무례성을 자네도 알고 있겠지.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네. 자네의 신학은 지쳐버린 그리스도인들과 쇠퇴해가는 복음전파 계획에 다음과 같은 특효약을 제공하겠구만: "당황할 필요 없음; 자기들은 모를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이미 화해되어 있음." 나는 역사적 계시, 말씀의 선포, 그리고 성례전의 집행 등의 중요성을 얕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이해할 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상황적 조건(condition)이 있다는 것이네. 그런데 이 가능성 자체가 이미 은혜의 선물이라네. 선포된 말씀에 의하여 전제된 경험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하네.
바르트: 열심히 듣고 있으니 계속 해보게.
라너: 잠자는 것은 우리 일상적 경험의 규칙적인 일부분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지. 하지만 우리가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신비한 현상이라네.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또 인간은 깨어 있는 동안 세계를 다스리고 자신의 안전을 쌓아가는 데에 자신의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네. 하지만 그들은 자는 동안에만은 자신을 내어놓고, 자신에 대한 통제를 늦추며, 잠 가운데 그들을 감싸안는 신비에 자기 자신을 맡기게 되네. 인간은 이 신비를 이해하지도 못하며, 이 신비는 인간이 창조한 것도 아니라네. 우리가 이 점을 보다 숙고해 본다면, 잠을 잔다는 것은 우리보다 훨씬 큰 힘이 존재하는데 이 힘이 믿을 만하며 선한 존재라는 것을 신뢰하는 행위라네. 즉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신앙의 행위인 동시에 그것에 대해 자기를 내어놓는(surrender) 행위이지. 자, 보게. 우리는 이미 이름 모를 신비에 대하여 자기를 내어놓고 신뢰하는 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고 있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원초적인 앎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소식을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네. 우리는 신앙 가운데 은혜로운 하나님의 손안에 우리를 자유롭게 내어놓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전적으로 낯선 괴상한 힘이 아니라 (칼, 자네가 사용할 법한 표현을 쓴다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친근한 신비라네.
바르트: 지금 무언가 희한한 것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구만. 칼, 만일 자네가 말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면 나는 자네와 전적으로 동의하겠고, 자네가 더 진행시킬 신학적 연구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네: 복음의 빛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다시 다신 그 빛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고 다시 사는 그 빛에서 우리는 해방되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잠자는 행위라는 익숙한 행위를 비롯하여 모든 인간 행위의 현상을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된다는 것. 나는 이러한 시도를 자연신학(옛 것이건, 새 자연신학이건 간에)이라고 부르지 않겠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시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체적 은혜의 비유(parables) 또는 유비(analogies)를 자연, 역사, 인간 경험 등의 넓은 영역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네. 나는 이러한 과제에 대하여 참으로 찬성하네. 바로 이것이 소위 자연신학이라 불리우는 것을 대치하여 시도해 봄직한 것이라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의 안경을 통하여 잠자는 행위를 비롯한 여러 다른 사건과 현상들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아마도 자네의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것은 자네가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되네. 아니, 자네가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자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나뿐 아니라 자네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네. 자네는 계시로부터 경험으로 가고, 또 경험으로부터 계시로 이르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두 가지 방법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라너: 왜 안되겠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이 성육신의 실재(reality) 안에 다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자네가 이미 성육신의 두 가지 불가분의 운동에 대하여 길게 살펴보지 않았는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하나님의 운동과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자유롭운 인간의 운동이 아닌가?
마지막 대화
교회일치론자: 칼(Karl)에게 이 질문에 답변할 마지막 기회를 줄 수는 없을 것 같군. 우리의 시간은 이제 다 지나고 말았네. 여러분, 우리는 교회일치를 위한 대단히 좋은 이 기회를 우리는 놓치고 만 것 같군. 내가 희망한 것과 같은 자연신학에 대한 합의문을 만들기는 분명히 어렵게 되었어.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현재와 같은 신학적 혼동 가운데에서 더 고생을 하게 될거야.
틸리히: 용기를 가지게, 교회일치론자. 우리는 이 쟁점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우리의 문서를 남겨두고 가는 정도는 할 수 있을거야. 나는 그 문서를 내 주머니 안에 가지고 있네. 그 첫째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지: "모든 설교의 목적은 우리 삶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내어 무한한 관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교회일치론자: 그래, 나도 나의 문서를 가져왔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겠군. 제목은 "이 땅에 평화, 종교 사이에 평화"이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음의 내용을 호소하고 있어: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 가운데서, 당신의 신앙을 가지고 그들을 풍성히 해줄 것을 기대하고, 그들의 신앙에 의하여 또한 풍성하게 될 것을 기대하라.
라너: 이 주제에 대하여 나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적어도 두 권 정도의 책 분량이 필요할 거야. 하지만 나는 새로운 논문을 위한 초고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제목은 다음과 같네: "일상적 삶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바르트: 물론, 나도 나의 문서를 가지고 왔다네. 그런데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네: "자연, 경험, 그리고 종교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자연신학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리고 전체 본문 가운데 단 하나의 각주만이 있지. "나는 바르트학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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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11
  • 저작시기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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