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마틴 부버(Martin Buber) : 「나와 너」(Ich und Du)
1. 부버의 생애
2. 부버의 「나와 너」
제 1부: 근원어 (Grundwort)
제 2부: 인간세계
제 3부: 영원자 너
3. 정리
1. 부버의 생애
2. 부버의 「나와 너」
제 1부: 근원어 (Grundwort)
제 2부: 인간세계
제 3부: 영원자 너
3. 정리
본문내용
ternal voice sounds, nothing more. 154). 계시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참다운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불러 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내어 보내는’ 특질을 갖추고 있다(159)”. 인간은 하나님의 불러들임을 통해서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행함으로써 계시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과 만남의 순간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무엇이다(151/ It is man\'s emerging from the moment of the supreme encounter, being no longer the same as he was when entering into it). 인간에게 새로운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이다(151).
만남으로써 계시의 개념은 현대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에밀 부르너의 계시 개념이 그 일례이다. 만남으로써 계시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계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계시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주관성만을 강조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만남으로써 계시 개념은 주관적인 만남이 전제되지 않으면 계시는 없다는 인간의 실존적인 경험에 중점을 두게 된다. 계시의 타당성은 인간의 경험이나 실존적인 만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타당성은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주관적으로 우리의 지성에 계시하시고 마음에 확실하게 인치심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버는 계시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만남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이것이 부버의 약점이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오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III. 정리
부버를 가리켜 만남의 철학자, 대화의 철학자, 관계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부버는 「나와 너」에서 두 겹으로 된 인간의 실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것은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다. 전자는 인격적인 관계성이요, 후자는 비인격적인 관계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와 그것으로 전락된 존재라는 데 비극이 있는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전락된 관계성에서 나와 너의 관계성으로의 회복을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데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바벨탑을 쌓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부버도 역시 영원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 영원자와 관계성에서 진정한 나와 너의 만남과 관계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인간 구원, 인간성의 회복이 있는 것이다.
참인생은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부버의 말은 참으로 중요하다. 참만남이 없고 참대화가 없고 참관계성이 없을 때 인간은 살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을 때 인간성은 황폐화되고 그 결과 퇴폐적이고 방향이 없는 감각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진정한 대화는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결국 영원자 너를 부르게 된다. 영원자 너를 부름으로써 우리의 관계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성으로 재정립을 하게 된다.
부버는 유대인이다. 그래서 그의 신앙도 유대적인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변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삼자적인 입장에서 말하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말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실존적으로만 믿음을 보려고 한 것이 기독교적인 면에서 볼 때 부버의 문제점이다.
아쉽게도 부버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요 구속주가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면에서 볼 때 부버 신학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영원자 “너”라는 하나님 개념도 기독교적이라기 보다는 하시디즘에 깊은 영향을 받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실존을 만남과 인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 부버의 지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이여! 부버의 염원하는, 그 영혼의 애타는 소리를 들으라!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로 지금 결단해야 할 것이다.
만남으로써 계시의 개념은 현대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에밀 부르너의 계시 개념이 그 일례이다. 만남으로써 계시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계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계시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주관성만을 강조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만남으로써 계시 개념은 주관적인 만남이 전제되지 않으면 계시는 없다는 인간의 실존적인 경험에 중점을 두게 된다. 계시의 타당성은 인간의 경험이나 실존적인 만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타당성은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주관적으로 우리의 지성에 계시하시고 마음에 확실하게 인치심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버는 계시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만남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이것이 부버의 약점이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오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III. 정리
부버를 가리켜 만남의 철학자, 대화의 철학자, 관계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부버는 「나와 너」에서 두 겹으로 된 인간의 실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것은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다. 전자는 인격적인 관계성이요, 후자는 비인격적인 관계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와 그것으로 전락된 존재라는 데 비극이 있는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전락된 관계성에서 나와 너의 관계성으로의 회복을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데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바벨탑을 쌓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부버도 역시 영원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 영원자와 관계성에서 진정한 나와 너의 만남과 관계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인간 구원, 인간성의 회복이 있는 것이다.
참인생은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부버의 말은 참으로 중요하다. 참만남이 없고 참대화가 없고 참관계성이 없을 때 인간은 살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을 때 인간성은 황폐화되고 그 결과 퇴폐적이고 방향이 없는 감각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진정한 대화는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결국 영원자 너를 부르게 된다. 영원자 너를 부름으로써 우리의 관계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성으로 재정립을 하게 된다.
부버는 유대인이다. 그래서 그의 신앙도 유대적인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변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삼자적인 입장에서 말하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말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실존적으로만 믿음을 보려고 한 것이 기독교적인 면에서 볼 때 부버의 문제점이다.
아쉽게도 부버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요 구속주가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면에서 볼 때 부버 신학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영원자 “너”라는 하나님 개념도 기독교적이라기 보다는 하시디즘에 깊은 영향을 받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실존을 만남과 인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 부버의 지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이여! 부버의 염원하는, 그 영혼의 애타는 소리를 들으라!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로 지금 결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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