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장군묘에 다녀온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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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문부장군묘에 다녀온 기행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茸新書≫를 얻어서 절강 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전적(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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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1.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17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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