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전에 무척이나 훌륭하다고 보았던 밭들이 실로 상대적으로 볼모의 땅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John Calvin, 464.
32:17 ‘평안’에 해당하는 ‘fqev]h\'(하쉬케트)의 원형 ‘솨카트’ 는 고된 노역을 쉬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히필)부정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쉬게 하는 것’의 의미를 지닌다. ‘안전’에 해당하는 ‘베타흐’ 는 위기를 만났을 경우 피난하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피난처’ ‘의뢰’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전쟁이 우리가 자신들의 악함으로써 촉발하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과 같이, 평화 역시 그의 축복에 의해 연유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일어나 싸움을 걸어오고 우리를 향해 일어날 때는 회개이외의 다른 대책을 구하려고 하지 말자. 주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곧 소동을 가라 가라앉히시기 때문이다.” 같은 책, 465.
32:18 본 절은 장차 여호와의 백성들이 거할 처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17절에서 공의의 열매와 그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그들이 거할 처소다. “ ‘안전한’으로 번역된 단어에 이사야는 어근 ‘베타흐’ 를 사용한다. 이것은 여인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10절) 것이다. 이 단어를 통해 대조가 특별하게 표현된다. 또 이사야는 ‘염려 없는’이란 단어를 취해 온다. 안일한 장소는 언젠가 ‘염려 없는’ 곳이 될 것이다. 그렇게 대조를 강화한다. 미래에는 그들의 안일한 장소가 염려 없는 곳이 될 것이니, 하나님의 선하심이 유일한 안전, 즉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E. J. Young, 428.
32:19 “본 절은 안일한 무리를 향한 징계 이후에 당신의 백성에게 임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예언하는 15-18절과 문맥적으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독특한 형벌에 대한 예언이다. 원문 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동일한 단어, 또는 유사한 발음의 단어들이 둘씩 짝지어져 있는 문학적 기법이 사용된 문장이다. 즉 ‘숲’과 ‘성읍’에 해당하는 ‘하이야아르’(r[\'Y:h)\'와 ‘하이르’(ry[ih)는 유사한 발음으로 되어 있다.” 제자원기획편집, 504.
“화평의 장면이 갑자기 중단되는데, 이는 이러한 화평이 심판이 실현되었을 때라야 올 수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13절에서 중단하였던 심판을 이끌어 내어 다시 언급한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하여 심판의 굴욕을 통과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E. J. Young, 429.
‘삼림’과 ‘성읍’에 대해서는 “‘삼림’은 분명히 더 큰 정치적 또는 경제적 단위, 왕국 또는 제국을 나타내는 은유다. ‘성읍’은 예루살렘을 나타낼 수도 있고 단순하게 도시 국가들에 근거한 문화를 나타낼 수도 있다. ” 존. D. W. 와츠, 『베이커 주석』, 677.
32:20 본 절은 19절의 심판의 예언에서 축복의 예언으로 다시 돌아와 성령의 역사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축복을 예언한다. 농사와 목축을 통하여 풍성한 수확을 거둘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됨을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징계 이후 남유다가 이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완전한 회복을 이룰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너희는 복이 있으리라’로 번역된 ‘아쉐레켐’ !k,yrev]a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이 단어의 원형 ‘아쉐르’는 모든 축복을 아우르는 총체적 의미를 갖는다.” 제자원기획편집, 505.
Ⅴ. 신학적 고찰
1)유일신 사상- “이사야는 역사의 과정을 운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말하면서 (10:5-19)앗수르인들이 비록 난공불락의 나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단지 여호와의 손에 쥐어진 채찍이요, 그들 스스로가 교만하여 자고할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헤세드종합자료씨리즈편찬위원회,『헤세드종합자료씨리즈: 제15권(이사야상)』(인천: (주)임마누엘, 1991), 40.
본문 32:9-20에서도 이사야는 유다백성의 사치와 나태, 안일함과 교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풍성함과 자고함으로 만족하는, 잠자고 있는 백성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살 길임을 강조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경고하며 예언하고 있다.
2)심판과 회복-이사야서 전체의 모티브를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과 그에 따른 심판, 그리고 열방에 대한 심판,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으로 볼 수 있다. J. N. Oswalt,『NIV 적용주석; 이사야』 장세훈. 김홍련 역(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85-86.
본문 32:9-20에서도 유다백성에 대한 책망과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 회복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사야서의 중심주제가 되는 곧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메시야 사상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 및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통일성 있게 선포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김두석, “이사야서의 메시야 이해에 관한 개론적 고찰”, 「칼빈논단 제29호」 (용인: 칼빈대학교출판부, 2009), 49.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도 이사야서에는 많은 부분에서 찾아 볼 수가 있는데,(사 42:1-9; 40:12-26; 61:1; 32:15-20) “이사야 32:15-20에서는 42장 등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 재창조가 벌써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라고(15절) 말하고 있다. 그리고 32:16-17절은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총체적 부흥이 가능함을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장재, 「대 선지서」(용인: 칼빈신학대학원, 2011), 54.
3)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서의 하나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적 관계에 대한 표시로서 하나님의 명칭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표현했다. “야웨가 세 배가 거룩하신 분이심을 계시하고 있는 성전의 환상을 본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윌리엄 S. 라솔, 『구약개관』 박
32:17 ‘평안’에 해당하는 ‘fqev]h\'(하쉬케트)의 원형 ‘솨카트’ 는 고된 노역을 쉬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히필)부정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쉬게 하는 것’의 의미를 지닌다. ‘안전’에 해당하는 ‘베타흐’ 는 위기를 만났을 경우 피난하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피난처’ ‘의뢰’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전쟁이 우리가 자신들의 악함으로써 촉발하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과 같이, 평화 역시 그의 축복에 의해 연유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일어나 싸움을 걸어오고 우리를 향해 일어날 때는 회개이외의 다른 대책을 구하려고 하지 말자. 주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곧 소동을 가라 가라앉히시기 때문이다.” 같은 책, 465.
32:18 본 절은 장차 여호와의 백성들이 거할 처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17절에서 공의의 열매와 그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그들이 거할 처소다. “ ‘안전한’으로 번역된 단어에 이사야는 어근 ‘베타흐’ 를 사용한다. 이것은 여인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10절) 것이다. 이 단어를 통해 대조가 특별하게 표현된다. 또 이사야는 ‘염려 없는’이란 단어를 취해 온다. 안일한 장소는 언젠가 ‘염려 없는’ 곳이 될 것이다. 그렇게 대조를 강화한다. 미래에는 그들의 안일한 장소가 염려 없는 곳이 될 것이니, 하나님의 선하심이 유일한 안전, 즉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E. J. Young, 428.
32:19 “본 절은 안일한 무리를 향한 징계 이후에 당신의 백성에게 임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예언하는 15-18절과 문맥적으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독특한 형벌에 대한 예언이다. 원문 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동일한 단어, 또는 유사한 발음의 단어들이 둘씩 짝지어져 있는 문학적 기법이 사용된 문장이다. 즉 ‘숲’과 ‘성읍’에 해당하는 ‘하이야아르’(r[\'Y:h)\'와 ‘하이르’(ry[ih)는 유사한 발음으로 되어 있다.” 제자원기획편집, 504.
“화평의 장면이 갑자기 중단되는데, 이는 이러한 화평이 심판이 실현되었을 때라야 올 수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13절에서 중단하였던 심판을 이끌어 내어 다시 언급한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하여 심판의 굴욕을 통과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E. J. Young, 429.
‘삼림’과 ‘성읍’에 대해서는 “‘삼림’은 분명히 더 큰 정치적 또는 경제적 단위, 왕국 또는 제국을 나타내는 은유다. ‘성읍’은 예루살렘을 나타낼 수도 있고 단순하게 도시 국가들에 근거한 문화를 나타낼 수도 있다. ” 존. D. W. 와츠, 『베이커 주석』, 677.
32:20 본 절은 19절의 심판의 예언에서 축복의 예언으로 다시 돌아와 성령의 역사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축복을 예언한다. 농사와 목축을 통하여 풍성한 수확을 거둘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됨을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징계 이후 남유다가 이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완전한 회복을 이룰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너희는 복이 있으리라’로 번역된 ‘아쉐레켐’ !k,yrev]a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이 단어의 원형 ‘아쉐르’는 모든 축복을 아우르는 총체적 의미를 갖는다.” 제자원기획편집, 505.
Ⅴ. 신학적 고찰
1)유일신 사상- “이사야는 역사의 과정을 운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말하면서 (10:5-19)앗수르인들이 비록 난공불락의 나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단지 여호와의 손에 쥐어진 채찍이요, 그들 스스로가 교만하여 자고할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헤세드종합자료씨리즈편찬위원회,『헤세드종합자료씨리즈: 제15권(이사야상)』(인천: (주)임마누엘, 1991), 40.
본문 32:9-20에서도 이사야는 유다백성의 사치와 나태, 안일함과 교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풍성함과 자고함으로 만족하는, 잠자고 있는 백성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살 길임을 강조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경고하며 예언하고 있다.
2)심판과 회복-이사야서 전체의 모티브를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과 그에 따른 심판, 그리고 열방에 대한 심판,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으로 볼 수 있다. J. N. Oswalt,『NIV 적용주석; 이사야』 장세훈. 김홍련 역(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85-86.
본문 32:9-20에서도 유다백성에 대한 책망과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 회복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사야서의 중심주제가 되는 곧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메시야 사상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 및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통일성 있게 선포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김두석, “이사야서의 메시야 이해에 관한 개론적 고찰”, 「칼빈논단 제29호」 (용인: 칼빈대학교출판부, 2009), 49.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도 이사야서에는 많은 부분에서 찾아 볼 수가 있는데,(사 42:1-9; 40:12-26; 61:1; 32:15-20) “이사야 32:15-20에서는 42장 등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 재창조가 벌써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라고(15절) 말하고 있다. 그리고 32:16-17절은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총체적 부흥이 가능함을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장재, 「대 선지서」(용인: 칼빈신학대학원, 2011), 54.
3)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서의 하나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적 관계에 대한 표시로서 하나님의 명칭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표현했다. “야웨가 세 배가 거룩하신 분이심을 계시하고 있는 성전의 환상을 본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윌리엄 S. 라솔, 『구약개관』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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