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근대 (전전)戰前의 천황과 황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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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근대 (전전)戰前의 천황과 황실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근대 (전전)戰前의 천황과 황실상


일본화가 안고 있던 정치적 역할
인민고유와 지방순행
천황의 초상문제
니시키에 속의 황실상
이에적인 질서의 모범적인 체현자
일부일처제의 이상과 가족도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는 것이다. 일반 국민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늙어서 이에의 경영이 곤란해진 경우에 은거하여 가독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새로이 가장이 된 자식의 지휘 하에 아버지가 들어가게 되어 있으나 이는 부자간의 정서상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황실에서는 천황 생존 중에는 황위를 자식에서 물려주지 않았으며, 병상 등으로 섭정을 둘 경우에도 섭정은 천황보다 아래의 존재였으므로 가부장제라고 하는 의미에서 황실제도는 이상적인 것이었다.
셋째는 가방이 가족을 강력히 통제감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황실전범에서 “황족은 천황이 이를 감독한다”(제35조)고 규정하고 있는데, 『황실전범의해』는 이 내용을 황족의 필요 경비를 지급할 권한, 황족의 결혼, 외국여행에 대한 허가권, 부친이 없는 어린 황족에 대한 교육보호권 등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가장인 천황은 사실상 일가를 거느린 황족에까지 가장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가명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인 보장물인 세습재산(황실의 ‘세전어료’〔世傳御料〕)을 엄밀히 관리하는 것, 또한 가족이 그 은혜를 입고 있는 가산가업가명의 연원인 조상의 제사를 행하는 것도 이에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으며, 천황은 그것을 가장 엄격하게 실행하는 가장이었다. 더욱이 조상의 유훈을 지키는 것도 오래된 가문에서는 중요시 되었는데 천황은 즉위하면서 황조황종의 영을 이어받음으로써 솔선하여 유훈을 준수하고 체현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처럼 황실은 이상적인 이에로서 부각되었으며 천황은 이상적인 가장으로 부각되었다. 말하자면, 천황과 황실은 일본의 사회질서인 이에 질서를 이상적으로 체현함으로써 이에 질서(로 편성된) 사회에 군림했던 것이다.
일부일처제의 이상과 가족도
이와 같이 천황과 황후 그리고 후계자로서의 황태자를 하나의 단위로서 시각화하는 도상이 나타난다. 1892년 토슈 쇼게츠에 의한 니시키에 「宮中遊覽圖」 도판 5
는 이 세 사람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병풍처럼 국정을 담당하는 고관들을 배치하고 있다. 국가의 최소단위가 부부인 것 그리고 천황일가가 그 모델인 것을 단언하는 도상이다.
황태자가 황후의 친자가 아닌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황태자의 생모, 야나기하라 나루코는 메이지 10년대에는 니시키에의 화제(畵題)가 되기도 하여 출산의 기도에는 축가의 뜻을 담은 출판도 행해지고 있었다. 황후에 다음 가는 지위의 여성으로서 천황을 사이에 두고 황후와 나란히 그려진 니시키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음 해에는 메이지 헌법이 발포된 시기를 맞아 천황을 둘러싼 여성들의 모습은 황태자의 생모라고 해도 감춰지고 말았다.
메이지 말년이 되면 元旦의 신문의 별도 광고지라는 형태로 사진이 배포되고 있었다. 삽화는 1905년의 元旦에 「大阪每日新聞」 도판 6
이 별도부록으로서 각 가정에 배포한 컬러인쇄사진이나, 천황과 황후, 황태자 부처, 그리고 그 아이들이 직계가족으로서 일람할 수 있다. 측실을 두지 않았던 다이쇼 천황에 의해서 현실을 감추기까지 해서 만들어 내려고 했던 일부일처제의 가족의 이상은 여기에서 현실이 되었다.
참고문헌
구노 오사무쓰루미

키워드

근대,   천황,   일왕,   황실상,   일본,   일본화,   초상문제
  • 가격1,7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3.02.17
  • 저작시기2013.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3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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