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출 전 : 삼국유사5권 피은 신충괘관조(信忠掛冠條)
2. 원 문
3. 배경설화
4. 기존연구사
《기존 『원가』전문의 해독》
《연구사의 검토》
1. 어학적 연구
2. 문학적 연구
3. 종교 민속학적 연구
4. 작자 연구
5. 창작 연대 연구
《원가 연구의 난해점》
5. 해당구절
* 汝於多攴行齊敎因隱 *
《기존의 해독 및 해석》
《해당 구절 해독에 대한 비판》
《해당 구절의 해독을 위한 대안》
◇ 참 고 문 헌 ◇
2. 원 문
3. 배경설화
4. 기존연구사
《기존 『원가』전문의 해독》
《연구사의 검토》
1. 어학적 연구
2. 문학적 연구
3. 종교 민속학적 연구
4. 작자 연구
5. 창작 연대 연구
《원가 연구의 난해점》
5. 해당구절
* 汝於多攴行齊敎因隱 *
《기존의 해독 및 해석》
《해당 구절 해독에 대한 비판》
《해당 구절의 해독을 위한 대안》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원 가
<여어다복행제교인은>
을 중심으로
1. 출 전 : 삼국유사5권 피은 신충괘관조(信忠掛冠條)
2. 원 문
物叱乎栢史 (물질호복백사)
秋察尸不冬爾屋墮米 (추찰시부동이옥복타미)
汝於多行齊敎因隱 (여어다복행제교인은)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양돈은면의개의사호은동의야)
月羅理影古理因潤之叱 (월나리영복고리인윤지질)
行尸浪阿叱沙矣以如 (행시랑아질사의이복여복)
貌史沙叱望阿乃 (모사사질망아내)
世理都之叱逸烏隱第也 (세리도지질일오은제야)
< 後句亡 후구망 >
3. 배경설화
신라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대궐 뜰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다가 신충에게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로 남으리라.\"
신충은 감격하여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몇 달 후에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의 일은 까맣게 잊고서 등용시키지 않았다. 신충은 왕을 원망하며 노래를 지어서 그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잣나무가 시들고 말았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신하가 잣나무에 붙어 있는 그 노래를 왕에게 전달하니 왕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정무(政務)가 번잡하여 하마터면 충신을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그제야 잣나무도 되살아났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과 경덕왕조에 걸쳐서 그 총애가 두터웠다.
경덕왕(효성왕의 아우) 22년 계묘에 신충이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악으로 들어가 두 번씩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산에 숨어 대왕에게 복을 바치겠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영정이 금당 뒷벽에 있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삼화상전에 보면 신충의 봉성사가 있는데 여기와는 서로 틀린다. 그러나 신문왕 때와 계산하면 경덕왕과는 이미 백여 년의 거리가 있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과거세의 인연이 있다 함은 이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잘 알아 밝혀야겠다.)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했다)이 일찍부터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출가하여 절을 지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 50이었다.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들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 장로라 하였다. 절에 살기 20년 만에 죽었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4. 기존연구사
《기존 『원가』전문의 해독》
● 오쿠라신페이
것쳐 잣
안들 갓가오어 러디매
너 어듸 녀제이신
울워 조을은 에 고티샤온들로
의 그름자 고인 못을
녈난 ㅅ 모래예 머믈어
짓을사 바라나
누리도 지즐은 제요
(후구 잊음)
● 양주동
믈
<여어다복행제교인은>
을 중심으로
1. 출 전 : 삼국유사5권 피은 신충괘관조(信忠掛冠條)
2. 원 문
物叱乎栢史 (물질호복백사)
秋察尸不冬爾屋墮米 (추찰시부동이옥복타미)
汝於多行齊敎因隱 (여어다복행제교인은)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양돈은면의개의사호은동의야)
月羅理影古理因潤之叱 (월나리영복고리인윤지질)
行尸浪阿叱沙矣以如 (행시랑아질사의이복여복)
貌史沙叱望阿乃 (모사사질망아내)
世理都之叱逸烏隱第也 (세리도지질일오은제야)
< 後句亡 후구망 >
3. 배경설화
신라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대궐 뜰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다가 신충에게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로 남으리라.\"
신충은 감격하여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몇 달 후에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의 일은 까맣게 잊고서 등용시키지 않았다. 신충은 왕을 원망하며 노래를 지어서 그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잣나무가 시들고 말았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신하가 잣나무에 붙어 있는 그 노래를 왕에게 전달하니 왕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정무(政務)가 번잡하여 하마터면 충신을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그제야 잣나무도 되살아났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과 경덕왕조에 걸쳐서 그 총애가 두터웠다.
경덕왕(효성왕의 아우) 22년 계묘에 신충이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악으로 들어가 두 번씩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산에 숨어 대왕에게 복을 바치겠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영정이 금당 뒷벽에 있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삼화상전에 보면 신충의 봉성사가 있는데 여기와는 서로 틀린다. 그러나 신문왕 때와 계산하면 경덕왕과는 이미 백여 년의 거리가 있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과거세의 인연이 있다 함은 이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잘 알아 밝혀야겠다.)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했다)이 일찍부터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출가하여 절을 지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 50이었다.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들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 장로라 하였다. 절에 살기 20년 만에 죽었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4. 기존연구사
《기존 『원가』전문의 해독》
● 오쿠라신페이
것쳐 잣
안들 갓가오어 러디매
너 어듸 녀제이신
울워 조을은 에 고티샤온들로
의 그름자 고인 못을
녈난 ㅅ 모래예 머믈어
짓을사 바라나
누리도 지즐은 제요
(후구 잊음)
● 양주동
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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