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 오리엔탈즘의 모순점과
한국문화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
1. 서론
1.1. 추방자 지식인 사이드의 “시작”과 “타자적 상상력”
2. 본론
2.1.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담론”이다.
2.2.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조금은 아쉽다.
2.3 한국 역사 속에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한다.
3. 결론 - 논문을 마치며
― 오리엔탈즘의 모순점과
한국문화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
1. 서론
1.1. 추방자 지식인 사이드의 “시작”과 “타자적 상상력”
2. 본론
2.1.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담론”이다.
2.2.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조금은 아쉽다.
2.3 한국 역사 속에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한다.
3. 결론 - 논문을 마치며
본문내용
히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 사회를 살펴보니 오리엔탈리즘이 단순히 딱딱한 이론, 근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과거의 유물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생각이 크게 빗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뜬구름을 잡는 이론 공부가 아닌 실제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양한 예를 살펴보면서 지금까지 생각했던 내가 옳다고만 여겼던 생각들을 다시 한 번 뒤집어서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판적인 자각과 각성이 필요하다.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 2003, p77-88.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우리안의 서구주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19세기 중반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를 보는 서구의 시각은 일본과 일본 모델을 따라간 남한은 성공했고 중국과 북한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일본이 왜 성공했는지 그리고 중국이 왜 실패했는지를 역사적 결정론의 입장에서 목적론적으로 설명한다. 중국의 철저한 중화의식과 복잡한 중앙집권제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방해하여 결국 공산당 지배 체제라는 제국의 재판을 가져다 준 반면, 유연하고 지방 분권적인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서방을 잘 모방하여 선공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 자본주의가 성공한 까닭은 서양을 그 모델로 해서 전근대를 탈피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개혁을 ‘아시아에서의 유일한 문명화의 승리’로 본 것은 물론이고 주변부 자본주의 지향 사상가들도 메이지 유신을 찬양하여 다른 비서구 지역의 발전 모델로 삼았다. 이것은 한국의 예를 들면 꼭 일치한다. 정치적인 친일파들은 물론이고 서재필이나 이승만 같은 친미파들도 한국에서의 개혁을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단행하기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 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의 일부 보수적 사학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우리가 근대 개혁에 실패하고 일본이 성공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기정사실로 보고 이를 의심치 않는다.
물론 메이지 유신과 1910~20년대의 중화학 공업 발전을 계기로 일본이 세계체제의 주변부를 탈피해 준중심부에 진입한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를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인류의 성공으로 본다면 메이지 유신도 박정희의 개발도 성공이다. 이렇게 서구 중심주의 사상이 기본적인 의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를 오로지 서구 자본주의 사상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메이지 유신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의 민중들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책과 신문, 잡지등과 같은 매체를 살펴보면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성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자본 축적에는 성공했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했고 동아시아 피지배민들의 삶 역시 착취당했다. 앞에 책, p90-95.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자본주의적 논리 위에서만 결정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누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데 그것만이 오로지 목표가 되어가고 경쟁하는 사회구도이다. 오리엔탈리즘과 긍정적 옥시덴탈리즘에 의해서 국가나 역사와 같은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소소한 내부 사회 현상들까지 알고 보면 같은 맥락 위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다름이다. 따라서 획일 된 논리와 가치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와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찾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승자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옳고 그름의 시각에서 탈피해서 보다 윤리적이고 타당한 것을 가려내야 한다고 본다.
3. 결론 - 논문을 마치며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저 『오리엔탈리즘』이 나온 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은 귀에 익은 사회과학용어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한국을 타율성과 정체성으로 보는 시각, 미국의 보수적 학자들이 한국인들의 복종 습관 및 태생적인 권위주의로 보는 시각과 우리들이 중국이나 베트남을 더럽고 부패하고 위험한 곳으로 보는 시각 역시 모두 똑같은 서구 중심적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다. 동양을 ‘퇴보적’, ‘태생적인 전제주의’로 보고 서양을 ‘진보적’, ‘시민적 성숙’,‘태생적 자유주의적 성향’이라고 보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세계지배는 곧 역사적인 논리로 이용되어 왔다. 이것은 과거 제국주의 사회에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구의 사상으로 동양의 고유한 가치와 정신적 사상을 인정하지 않고 동양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져 왔다. 한국에는 이미 서양을 흠모하고 맹종의 대상으로 삼는 서구 신화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비서구 지역인 우리는 서구적 질서에 따르며 서구의 가치를 중시한다.
하지만 책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서구는 과대평가 되어 왔다. 이는 역사 속에서도 정당화되고 취사선택되어 기록되어온 결과이다. 실제적으로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을 자행해온 서구가 오늘날에는 마치 평화를 위한 것이었고 선진 국가를 이룩하게 된 자신들의 논리를 비서구에 도입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서구의 현실과 실체를 덮고 역사에서는 그들의 논리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하고 이를 타파해야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의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며 배타적인 편견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자신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로서 대립적인 이념관계를 탈피하고 중심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 등 다양한 입장에 서서 사고하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야지만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 평등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고부응, 『에드워드 사이드와 탈식민주의 이론』, (서울:중앙대학교, 2003).
김종갑, 「언어적 무의식의 탐구」, 『어문학논총』, 제6집, (서울:숙명여자대학교, 1994.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 2003.
양경화, 「에드워드 사이드의 탈식민주의 문학이론」, 제6집, (서울:숙명여자대학교, 1994).
정정호, 「오리엔탈리즘, “탈”식민주의, “타자”의 문화윤리학」, 중앙대.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우리안의 서구주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19세기 중반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를 보는 서구의 시각은 일본과 일본 모델을 따라간 남한은 성공했고 중국과 북한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일본이 왜 성공했는지 그리고 중국이 왜 실패했는지를 역사적 결정론의 입장에서 목적론적으로 설명한다. 중국의 철저한 중화의식과 복잡한 중앙집권제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방해하여 결국 공산당 지배 체제라는 제국의 재판을 가져다 준 반면, 유연하고 지방 분권적인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서방을 잘 모방하여 선공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 자본주의가 성공한 까닭은 서양을 그 모델로 해서 전근대를 탈피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개혁을 ‘아시아에서의 유일한 문명화의 승리’로 본 것은 물론이고 주변부 자본주의 지향 사상가들도 메이지 유신을 찬양하여 다른 비서구 지역의 발전 모델로 삼았다. 이것은 한국의 예를 들면 꼭 일치한다. 정치적인 친일파들은 물론이고 서재필이나 이승만 같은 친미파들도 한국에서의 개혁을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단행하기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 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의 일부 보수적 사학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우리가 근대 개혁에 실패하고 일본이 성공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기정사실로 보고 이를 의심치 않는다.
물론 메이지 유신과 1910~20년대의 중화학 공업 발전을 계기로 일본이 세계체제의 주변부를 탈피해 준중심부에 진입한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를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인류의 성공으로 본다면 메이지 유신도 박정희의 개발도 성공이다. 이렇게 서구 중심주의 사상이 기본적인 의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를 오로지 서구 자본주의 사상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메이지 유신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의 민중들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책과 신문, 잡지등과 같은 매체를 살펴보면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성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자본 축적에는 성공했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했고 동아시아 피지배민들의 삶 역시 착취당했다. 앞에 책, p90-95.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자본주의적 논리 위에서만 결정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누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데 그것만이 오로지 목표가 되어가고 경쟁하는 사회구도이다. 오리엔탈리즘과 긍정적 옥시덴탈리즘에 의해서 국가나 역사와 같은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소소한 내부 사회 현상들까지 알고 보면 같은 맥락 위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다름이다. 따라서 획일 된 논리와 가치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와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찾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승자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옳고 그름의 시각에서 탈피해서 보다 윤리적이고 타당한 것을 가려내야 한다고 본다.
3. 결론 - 논문을 마치며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저 『오리엔탈리즘』이 나온 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은 귀에 익은 사회과학용어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한국을 타율성과 정체성으로 보는 시각, 미국의 보수적 학자들이 한국인들의 복종 습관 및 태생적인 권위주의로 보는 시각과 우리들이 중국이나 베트남을 더럽고 부패하고 위험한 곳으로 보는 시각 역시 모두 똑같은 서구 중심적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다. 동양을 ‘퇴보적’, ‘태생적인 전제주의’로 보고 서양을 ‘진보적’, ‘시민적 성숙’,‘태생적 자유주의적 성향’이라고 보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세계지배는 곧 역사적인 논리로 이용되어 왔다. 이것은 과거 제국주의 사회에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구의 사상으로 동양의 고유한 가치와 정신적 사상을 인정하지 않고 동양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져 왔다. 한국에는 이미 서양을 흠모하고 맹종의 대상으로 삼는 서구 신화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비서구 지역인 우리는 서구적 질서에 따르며 서구의 가치를 중시한다.
하지만 책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서구는 과대평가 되어 왔다. 이는 역사 속에서도 정당화되고 취사선택되어 기록되어온 결과이다. 실제적으로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을 자행해온 서구가 오늘날에는 마치 평화를 위한 것이었고 선진 국가를 이룩하게 된 자신들의 논리를 비서구에 도입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서구의 현실과 실체를 덮고 역사에서는 그들의 논리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하고 이를 타파해야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의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며 배타적인 편견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자신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로서 대립적인 이념관계를 탈피하고 중심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 등 다양한 입장에 서서 사고하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야지만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 평등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고부응, 『에드워드 사이드와 탈식민주의 이론』, (서울:중앙대학교, 2003).
김종갑, 「언어적 무의식의 탐구」, 『어문학논총』, 제6집, (서울:숙명여자대학교, 1994.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 2003.
양경화, 「에드워드 사이드의 탈식민주의 문학이론」, 제6집, (서울:숙명여자대학교, 1994).
정정호, 「오리엔탈리즘, “탈”식민주의, “타자”의 문화윤리학」, 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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