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SEVEN CORP 쓰리세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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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THREESEVEN CORP 쓰리세븐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쓰리세븐의 역사 및 소개

2. 해외진출 과정의 역경• 극복 과정
2.2 품질로 승부를 걸다
2.3 부가가치의 창출
2.4 새로운 유통 경로의 확보
2.4.1 월마트를 뚫어라
2.5 위기를 기회로
2.6 브랜드를 지키다
2.6.1 보잉사를 뚫어라

3. 성공 요인

4. 결론

본문내용

777
THREESEVEN CORP.
조장:연병소2002210017
조원:윤여광2004817004
고정우2004817001
<목차>
prologue
1. 쓰리세븐의 역사 및 소개
2. 해외진출 과정의 역경 극복 과정
2.2 품질로 승부를 걸다
2.3 부가가치의 창출
2.4 새로운 유통 경로의 확보
2.4.1 월마트를 뚫어라
2.5 위기를 기회로
2.6 브랜드를 지키다
2.6.1 보잉사를 뚫어라
3. 성공 요인
4. 결론
PROLOGUE
지난 1997년 10월, 중국 경공업 단체 방문시 중국 주룽지 부총리가 한 말이 있다.
“한국의 777같은 손톱깎이는 외관과 날이 이렇게 정밀한데 우리 중국은 왜 그 수준을 못따라 가는가..?”
16억 인구의 마음을 사로잡은 쓰리세븐.
이 쓰리세븐 제품은 중국에서 명품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 경제 대국 중국의 부총리의 발언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한국의 높은 기술력을 부러워하는 콧대 높은 중국의 자기 반성적 발언이었다. 쓰리세븐의 이러한 비결의 핵심 기술은 날의 제조 과정에 있다. 선진국의 높은 기술의 이전은 엄두도 못 내고 자체적으로 손톱깎이 전용 열처리설비 개발을 하고, 최적의 경도 수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쓰리세븐은 세계최초로 2차 자동연삭기를 개발하여 성공하게 되었다.
쓰리세븐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 92개국에 손톱깎이를 수출하고 있다.
쓰리세븐은 모든 것이 부족했던 6,70년대 생활용품 하나도 미제를 써야 했던 시절, 미제 드럼통을 뜯어 손톱깎이를 만들던 기술 후진국의 현실, 미국 업체들의 독무대였던 세계시장에 남의 이름으로 수출해야했던 후발주자의 설움에도 불구하고 작은 손톱깎이 하나로 세계를 제패했다.
1. 쓰리세븐의 역사 및 소개
쓰리세븐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인 1960년대, 창업자 김형규 회장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형규회장은 1935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처음으로 손톱깍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45년 이었다. 해방 후 공산정권이 북쪽에 들어서면서 그의 집은 고향을 떠나 월남하였다. 4형제였던 그의 가족은 천안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생계를 위한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형제들은 많은 물품을 들고 다니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가지 제품을 팔아보던 둘째형이 손톱깍기 회사를 운영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당시에는 한창 미제 손톱깍이인 트림(TRIM)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김형규 회장 역시 그러한 유행을 목격하고 형의 제안이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김형규 회장이 형의 제안을 받아들여 손톱깍이 사업에 뛰어들게 된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김회장은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쪽이 불편하였다. 또한 6.25때 포탄을 맞아 한쪽 눈이 불편하였다. 때문에 김형규 회장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는 잡화상보다 손톱깎이 제조와 인연을 맺게 한 큰 이유였다.
그들이 처음 생산한 손톱깎이는 사실 지금 생각하면 손톱깎이라고도 이름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조악한 제품이었다. 전쟁 후 생산 시설은 발달하지 못했기에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섬세한 손톱깎이를 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형제는 오히려 전쟁후의 상황을 잘 활용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미군 부대의 물품을 활용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한 것에 착안, 그들 형제가 최초로 제작한 손톱깎이 역시 미군 부대의 물품을 활용한 것이었다. 손톱깎이의 본체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드럼통을 잘라서 만들었다. 지렛대는 자동차 휠로 만들었으며 아크릴이 없이 미군부대 천막에 붙어있는 두꺼운 비닐 창을 뜯어와 꽃무늬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제작한 손톱깎이의 품질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얼마 후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손톱깎이가 만들어지자 직원들은 환호하였으나 솔직히 그것은 손톱깎이라기보다 손톱뜯기에 가까운 조악한 품질을 갖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당시 김형규 회장이 생산한 손톱깎이는 조금이지만 팔려 나갔고 나름대로 회사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김형규 회장은 언제나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도전적인 그의 기업가 정신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회사운영에 그럭저럭 만족하던 형에게 그는 제품 수출을 시도할 것을 제안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비롯한 각종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국내 기업의 수출과 경공업 산업 육성을 장려하고 있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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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25
  • 저작시기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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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35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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