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답사동기와 답사 일정
Ⅱ. 무령왕릉 발굴
1. 발굴 과정
2. 의의
Ⅲ. 무령왕의 생애와 장례
1. 무령왕의 생애
2. 무령왕 부부의 장례
Ⅳ. 무령왕릉의 건축1. 구조
2. 축조과정
3. 중국과의 비교
Ⅴ. 무령왕릉의 유물
1. 묘지석, 진묘수
2. 왕의 시신 주변의 유물
3. 왕비의 시신 주변의 유물
Ⅵ. 지역주민 인터뷰
Ⅶ. 고찰
1. 사전조사와 답사의 차이점
2. 지역과 문화재의 관계
3. 소감 및 결론
Ⅷ. 참고문헌
Ⅱ. 무령왕릉 발굴
1. 발굴 과정
2. 의의
Ⅲ. 무령왕의 생애와 장례
1. 무령왕의 생애
2. 무령왕 부부의 장례
Ⅳ. 무령왕릉의 건축1. 구조
2. 축조과정
3. 중국과의 비교
Ⅴ. 무령왕릉의 유물
1. 묘지석, 진묘수
2. 왕의 시신 주변의 유물
3. 왕비의 시신 주변의 유물
Ⅵ. 지역주민 인터뷰
Ⅶ. 고찰
1. 사전조사와 답사의 차이점
2. 지역과 문화재의 관계
3. 소감 및 결론
Ⅷ. 참고문헌
본문내용
덤
* 부장품에 있어서도 중국 양나라에서 수입한 철제 오수전, 백자 잔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복숭아 모양의 벽감과 가창 등도 중국 남조식 고분의 특징이다.
* 규모나 구조적으로 무령왕릉과 가장 흡사한 남조 고분으로는 남경 연자기의 양보통 2년묘, 대문산묘가 있다. 전자에서는 긴 묘지가 출토되었으나 내용이 아직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연대나 등급이 무령왕릉과 가장 근사한 무덤들이므로 앞으로 상세한 내용이 공개되면 무령왕릉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2) 중국 남조 고분과 무령왕릉의 차이점
- 남조 : 널길과 관대 높이가 다르다. 현실 바닥에 벽돌로 음정을 만들고 도랑으로 연결해서 묘실 밖으로 배출하는 매우 긴 배수구가 존재한다. (50m~190m)
- 백제: 널길과 관대의 높이 차이 없다. 배수구가 있으나 중국에 비해 짧고 음정 존재하지 않는다.(18.7m 정도)
=>약간의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령왕릉의 입지와 구조, 축조방식이 전형적인 남조식으로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므로 무령왕릉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지고 구조적으로나 장제, 부장품 등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은 남조시대 무덤을 연구함으로서 무령왕릉을 더 잘 알 수 있다. 또한 목관에 사용된 금송, 벽돌무덤, 복숭아모양의 벽감, 벽돌 무늬 등으로 미루어 보아 웅진 시대의 백제가 중국 남조나 일본 야마토 정권과 밀접한 외교관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Ⅴ. 유물을 통해서 보는 백제 예술
1. 발굴당시 유물 배치도
(1) 지석
-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있는 2장의 장방형 석판
- 무령왕이 523년에 세상을 떠나자 2년 3개월간 빈장하였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던 것.
-526년에 왕비가 죽자 빈장 후 529년에 왕릉 안치시 매지권 뒤집어 왕비 묘지 새김.
-지석에 나와있는 글 :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출생의 비밀) 께서 나이 62세 되 는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525년)8월 12일에 안장하 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의미: 우리나라 묘지석 중 가장 오래된것, 삼국시대 왕릉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 할 수 있는 유일 한 무덤.
-간지도: 왕 묘지석 뒷면 이용 직선을 새기고, 그 선위에 방향을 나타내는 십간, 십이지를 안쪽을 향하여 새겼는데, 서쪽부분을 향하는 쪽에는 신-경-유-신-술 등의 간지부분을 쓰지 않고 비워두었다.
-매지권: 묘지를 만들 때 지신에게서 묘지의 터를 매입하는 형식을 밟아 그 증서에 해당하는 문서를 작성해 놓은 것이다. 무령왕릉의 묘지석위에는 당시 중국 양나라에서 통용되던 동전인 오수전 한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왕비 묘지석 : 왕비 묘지권의 특징은 글자의 크기가 무령왕 묘지석, 매지권, 간지도보다 작고 글자체 역시 다르다. 왕과 왕비의 묘지석을 만든 사람이 다른 사람임을 알수 있고, 왕의 묘지석의 글씨는 힘이 넘치고 세련됨에 비해 왕비의 묘지석의 글씨는 그에비하면 작고 미숙하다. 성왕 7년에 추가하여 새김.
- 오수전 : 중국 한나라 시대에 사용된 동전. 무령왕릉에서 나온 철제 오수전은 양나라 때 만든 것으로 양나라에서 백제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임. 실제 문서에는 일만매라고 되어있으나 그렇게 놓지 못함.
(2) 진묘수
-중국에서 함께 부장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한 대까지는 거대한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었으나, 진에서는 박장을 추진. 남조의 황제릉에서는 무덤앞에 배치되는 석각에 이러한 진묘수를 포함시켰는데, 무덤 내부에도 넣음. 무령왕릉 진묘수의 경우 남조의 것과 비슷
-형태는 악어, 돼지, 물소 등 다양.
-진묘수의 역할은 단순히 무덤을 지키는 게 아니라 죽은 자를 서왕모(불로‘불사약 을 가졌다고 하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가 사는 곳으로 인도함으로써 영 혼의 승선을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
-진묘수의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진 것은,
1) 왕비 매장시 실수로 했을 가능성
2) 남조무덤에서 나온 것 들도 부러짐->일부러 부러뜨렸을 가능성( 일종의 의레 과정)
3) 왕을 지키는 진묘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함.
(3) 도자기
: 무령왕릉에서는 백제토기 없고, 중국 도자기 9점 발견 됨. (청자 단지 2 점, 네귀 달린 흑자 병 1점, 백자잔 6점)-등잔, 청자 육이호, 흑갈유사이병 모두 포 함.
-보통 1점에서 4점 ( 지배층) 왕릉의 신분차이 보여줌.
-흑유반구병 주둥이 한쪽 깨짐-> 제사나 무덤 부장용 토기의 한귀퉁이 깨는 풍습. (훼기)신라 가야에서도 나타남.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기 위함)
2. 왕의 시신 주변의 유물 배치도
(1) 뒤꽂이
: 상투에 꽂아 머리를 단정하게 하는 비녀의 일종 세워서 꽂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길이가 18,4cm 되기 때문에 윗부분이 머리 위로 돌출되어 관을 쓰면 눌리게 된다. 이를 통해 관이 상부 개방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귀걸이 : 왕은 1쌍, 왕비는 4쌍 발견.
중요한 특징은 구슬 위에 반구체를 잇댄 형태인데 이것은 백제의 특징이고, 송산리 6호분의 출토품, 옥전 11호분, 일본 카모이 나리야마고분의 출토품이 이와 같은 형태
(3)관식
-왕과 광비가 각기 순금으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관에 누워 있었는데, 이 모자는 비 단같은 유기질로 형태를 만들고 순금으로 된 관식1쌍을 덧붙인 것이었음.
-왕의 관식이 역동적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왕비의 관식은 좌우가 정연 한 대칭을 이루어서 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무늬는 연꽃, 인동당초 불꽃 무늬
-무령왕 부부의 관식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관은 무령왕릉 보다 좀 늦은 시기에 만 들어진 후지노키 고분의 출토품. 일본의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여 백제의 문화를 알 아냄(무령왕의 관식으로는 전체 관의 형태 알수 없었으나. 일본 의 것으로 재구성
하여 알아낼수 있었음.)
-무령왕의 관과 일본 후지노키 고분의 금동관이 비슷한 점은 정면 둑군데가 솟아오 른 넓은 띠에 2개의 솟을 장식을 세운 형태.
-좌우대칭을 이루는 2개의 솟을 장식 : 무령왕 부부의 관식을 연상시킴
(4) 의자손수대경 - 방격규구신수문경
-칼이 현실적인 무력의 상징이라면 거울은 자연과
* 부장품에 있어서도 중국 양나라에서 수입한 철제 오수전, 백자 잔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복숭아 모양의 벽감과 가창 등도 중국 남조식 고분의 특징이다.
* 규모나 구조적으로 무령왕릉과 가장 흡사한 남조 고분으로는 남경 연자기의 양보통 2년묘, 대문산묘가 있다. 전자에서는 긴 묘지가 출토되었으나 내용이 아직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연대나 등급이 무령왕릉과 가장 근사한 무덤들이므로 앞으로 상세한 내용이 공개되면 무령왕릉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2) 중국 남조 고분과 무령왕릉의 차이점
- 남조 : 널길과 관대 높이가 다르다. 현실 바닥에 벽돌로 음정을 만들고 도랑으로 연결해서 묘실 밖으로 배출하는 매우 긴 배수구가 존재한다. (50m~190m)
- 백제: 널길과 관대의 높이 차이 없다. 배수구가 있으나 중국에 비해 짧고 음정 존재하지 않는다.(18.7m 정도)
=>약간의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령왕릉의 입지와 구조, 축조방식이 전형적인 남조식으로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므로 무령왕릉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지고 구조적으로나 장제, 부장품 등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은 남조시대 무덤을 연구함으로서 무령왕릉을 더 잘 알 수 있다. 또한 목관에 사용된 금송, 벽돌무덤, 복숭아모양의 벽감, 벽돌 무늬 등으로 미루어 보아 웅진 시대의 백제가 중국 남조나 일본 야마토 정권과 밀접한 외교관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Ⅴ. 유물을 통해서 보는 백제 예술
1. 발굴당시 유물 배치도
(1) 지석
-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있는 2장의 장방형 석판
- 무령왕이 523년에 세상을 떠나자 2년 3개월간 빈장하였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던 것.
-526년에 왕비가 죽자 빈장 후 529년에 왕릉 안치시 매지권 뒤집어 왕비 묘지 새김.
-지석에 나와있는 글 :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출생의 비밀) 께서 나이 62세 되 는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525년)8월 12일에 안장하 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의미: 우리나라 묘지석 중 가장 오래된것, 삼국시대 왕릉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 할 수 있는 유일 한 무덤.
-간지도: 왕 묘지석 뒷면 이용 직선을 새기고, 그 선위에 방향을 나타내는 십간, 십이지를 안쪽을 향하여 새겼는데, 서쪽부분을 향하는 쪽에는 신-경-유-신-술 등의 간지부분을 쓰지 않고 비워두었다.
-매지권: 묘지를 만들 때 지신에게서 묘지의 터를 매입하는 형식을 밟아 그 증서에 해당하는 문서를 작성해 놓은 것이다. 무령왕릉의 묘지석위에는 당시 중국 양나라에서 통용되던 동전인 오수전 한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왕비 묘지석 : 왕비 묘지권의 특징은 글자의 크기가 무령왕 묘지석, 매지권, 간지도보다 작고 글자체 역시 다르다. 왕과 왕비의 묘지석을 만든 사람이 다른 사람임을 알수 있고, 왕의 묘지석의 글씨는 힘이 넘치고 세련됨에 비해 왕비의 묘지석의 글씨는 그에비하면 작고 미숙하다. 성왕 7년에 추가하여 새김.
- 오수전 : 중국 한나라 시대에 사용된 동전. 무령왕릉에서 나온 철제 오수전은 양나라 때 만든 것으로 양나라에서 백제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임. 실제 문서에는 일만매라고 되어있으나 그렇게 놓지 못함.
(2) 진묘수
-중국에서 함께 부장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한 대까지는 거대한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었으나, 진에서는 박장을 추진. 남조의 황제릉에서는 무덤앞에 배치되는 석각에 이러한 진묘수를 포함시켰는데, 무덤 내부에도 넣음. 무령왕릉 진묘수의 경우 남조의 것과 비슷
-형태는 악어, 돼지, 물소 등 다양.
-진묘수의 역할은 단순히 무덤을 지키는 게 아니라 죽은 자를 서왕모(불로‘불사약 을 가졌다고 하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가 사는 곳으로 인도함으로써 영 혼의 승선을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
-진묘수의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진 것은,
1) 왕비 매장시 실수로 했을 가능성
2) 남조무덤에서 나온 것 들도 부러짐->일부러 부러뜨렸을 가능성( 일종의 의레 과정)
3) 왕을 지키는 진묘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함.
(3) 도자기
: 무령왕릉에서는 백제토기 없고, 중국 도자기 9점 발견 됨. (청자 단지 2 점, 네귀 달린 흑자 병 1점, 백자잔 6점)-등잔, 청자 육이호, 흑갈유사이병 모두 포 함.
-보통 1점에서 4점 ( 지배층) 왕릉의 신분차이 보여줌.
-흑유반구병 주둥이 한쪽 깨짐-> 제사나 무덤 부장용 토기의 한귀퉁이 깨는 풍습. (훼기)신라 가야에서도 나타남.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기 위함)
2. 왕의 시신 주변의 유물 배치도
(1) 뒤꽂이
: 상투에 꽂아 머리를 단정하게 하는 비녀의 일종 세워서 꽂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길이가 18,4cm 되기 때문에 윗부분이 머리 위로 돌출되어 관을 쓰면 눌리게 된다. 이를 통해 관이 상부 개방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귀걸이 : 왕은 1쌍, 왕비는 4쌍 발견.
중요한 특징은 구슬 위에 반구체를 잇댄 형태인데 이것은 백제의 특징이고, 송산리 6호분의 출토품, 옥전 11호분, 일본 카모이 나리야마고분의 출토품이 이와 같은 형태
(3)관식
-왕과 광비가 각기 순금으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관에 누워 있었는데, 이 모자는 비 단같은 유기질로 형태를 만들고 순금으로 된 관식1쌍을 덧붙인 것이었음.
-왕의 관식이 역동적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왕비의 관식은 좌우가 정연 한 대칭을 이루어서 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무늬는 연꽃, 인동당초 불꽃 무늬
-무령왕 부부의 관식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관은 무령왕릉 보다 좀 늦은 시기에 만 들어진 후지노키 고분의 출토품. 일본의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여 백제의 문화를 알 아냄(무령왕의 관식으로는 전체 관의 형태 알수 없었으나. 일본 의 것으로 재구성
하여 알아낼수 있었음.)
-무령왕의 관과 일본 후지노키 고분의 금동관이 비슷한 점은 정면 둑군데가 솟아오 른 넓은 띠에 2개의 솟을 장식을 세운 형태.
-좌우대칭을 이루는 2개의 솟을 장식 : 무령왕 부부의 관식을 연상시킴
(4) 의자손수대경 - 방격규구신수문경
-칼이 현실적인 무력의 상징이라면 거울은 자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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