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한옥의 구분
1. 상류 주택
2. 민가
Ⅲ. 한옥의 특색
1. 한옥은 겨울과 여름을 모두 수용한다
2. 한옥은 개방적 구성이다
3. 한옥은 외부공간과 자연을 수용한다
4. 주거공간은 여성적인 공간이다
5. 한옥의 마당
Ⅳ. 한옥의 상징성
Ⅴ. 기와의 유래
Ⅵ. 기와의 종류
Ⅶ. 기와의 변화
1. 고구려시대
2. 백제시대
3. 신라시대
1) 기와의 전래
2)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
4. 통일신라
5. 고려시대
6. 조선시대
Ⅷ. 기와집
참고문헌
Ⅱ. 한옥의 구분
1. 상류 주택
2. 민가
Ⅲ. 한옥의 특색
1. 한옥은 겨울과 여름을 모두 수용한다
2. 한옥은 개방적 구성이다
3. 한옥은 외부공간과 자연을 수용한다
4. 주거공간은 여성적인 공간이다
5. 한옥의 마당
Ⅳ. 한옥의 상징성
Ⅴ. 기와의 유래
Ⅵ. 기와의 종류
Ⅶ. 기와의 변화
1. 고구려시대
2. 백제시대
3. 신라시대
1) 기와의 전래
2)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
4. 통일신라
5. 고려시대
6. 조선시대
Ⅷ. 기와집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통일신라의 전통과 고구려적인 요소를 지닌 막새형을 계승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기와를 생산하였으나 중기 이후부터는 취두나 용두와 같은 새로운 기와가 출현하게 되며 막새의 시문 단위도 연꽃무늬나 당초무늬에서 벗어나 귀목무늬의 일색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범자가 막새에 새겨지게 되며 암막새의 드림새가 장방형에서 밑으로 늘어져 커지게 된다.
고려의 기와는 도읍지인 개성을 비롯하여 서경, 동경 등의 삼경이 위치한 평양과 경주 그리고 전국 각지의 절터에서 많은 수량이 출토되고 있다. 개성에는 당시의 궁터와 여러 산성터가 남아 있고 봉은사, 흥왕사, 흥국사, 현화사 등의 큰 절터가 위치하고 있어서 고려 기와가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는 지역이다. 고려시대에는 숭불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사원을 건립하게 되었는데 기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기본 기와인 암, 수키와와 막새 그리고 마루 기와와 약간의 서까래 기와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중기 이후부터는 치미와 귀면기와 대신에 취두와 용두가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키와는 유단식과 무단식이 함께 제작되었고, 암, 수키와의 표면에는 평행선, 문살, 우상 등의 다양한 무늬가 새겨지고 있으나 우상무늬가 주로 새겨졌다. 우상무늬는 생선뼈무늬로 뼈무늬가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빗살무늬토기의 시문 명칭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우상무늬는 새의 날개깃 모양으로 무늬가 집선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때로는 문살무늬나 평행선무늬와 함께 새겨진다.
수막새에는 연꽃, 보상화, 모란, 귀면, 귀목 등이 장식되어 있고, 암막새에는 당초, 모잔당초, 연꽃, 초화, 새, 귀목 등이 새겨지고 있는데 연꽃무늬와 귀목무늬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밖에 문자와 범자가 새겨진 막새가 제작 되었다.
6.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기와는 기능성이 강조되고 장식성이나 미관성이 약화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암, 수막새는 직각이 아닌 둔각 상태로 암, 수키와와 접합되어 있고, 드림새가 밑으로 늘어져 종타원형이나 역삼각형으로 변형되어 제작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장식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타원막새, 치미, 귀면기와, 마루막새, 서까래 기와, 모서리 기와 등이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시문 단위도 단순하며, 막새의 뒷면에는 마포의 흔적인 포목흔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기와가 매우 투박하다.
조선시대의 기와는 도읍지인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관아, 산성, 향교, 제각, 사원 등지에서 약간씩 출토 되고 있다. 서울에는 당시의 궁궐인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일부 복원되어 조선 후기의 기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암, 수키와와 막새, 취두, 용두, 잡상, 망새 등의 마루기와 그리고 사래나 추녀에 사용되는 토수 등이 제작되었으나 망새를 제외한 마루 기와와 토수 등은 궁전 건축이나 관아 건물에 한정되어 사용 되었다. 조선시대의 일반 건축에 사용된 기와는 암, 수키와 막새 그리고 마루에 사용되는 망새기와로 한정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특징은 기와류가 민가에까지 파급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Ⅷ. 기와집
중국에서는 기와를 춘추 전국시대에 사용하였다고 하나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쓰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지마니 사금 11년 조\"에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렸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궁궐이나 큰 건물에 기와를 덮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 서기\"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이라고 하는 법륭사를 지을 때, 백제에서 기와 박사 네 사람이 일본에 건너가서 기와를 구어 주었다고 하므로 7세기 경에는 기와를 굽는 기술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었던 듯하다.
기와를 기와장이가 얹는다. 예전에는 기와를 만들 때, 큰 틀 안에 모래와 흙 그리고 물을 붓고 나서 소로 하여금 이리저리 밟고 다니도록 해서 잘 이긴 뒤에, 이 흙을 기틀에 넣어 꼴을 잡아 말리고 잿물을 발라 가마에 넣어 구웠다. 따라서 큰집을 지을 때에는 돈을 미리 주고 필요한 수량의 기와를 맞추어 두어야 하였다.
서민 가옥의 기와 일은 먼저 암기와를 나란히 깔고 사이사이에 숫기와를 덮고 나서, 숫기와 앞에 흙과 백토로 빚은 아귀토로 막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잘 짓는 집에서는 암막새를 먼저 놓고, 암키와를 서너 겹으로 겹쳐 깔아서 한두 장이 깨져도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수키와도 역시 숫막새를 먼저 놓고 홍두깨흙을 얹은 뒤에 덮어 나간다. 지붕 마루에는 적새라 하여 암기와를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숫기와를 덮는다. 따라서 암기와를 많이 덮을수록 지붕 마루가 높아져서 집 자체가 커 보인다.
어떤 기와집에서는 복문이라고 하여 적새 위에 숫기와를 얹을 때, 한가운데의 두 장을 서로 어스러지게 팔자(八字) 모양으로 마주 세워 두는 일이 있다. 이를 세울 때 주인은 기와장이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므로 상량을 올리는 날이 목수의 생일이라고 하듯이 이날을 기와장이의 생일이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이 문으로 복이 들어온다고 하나 까치구멍처럼 원래는 채광이나 배연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팔작 지붕의 경우에는 지붕마루마다 망와라 하여 도깨비 모양의 암막새를 얹는다. 망와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귀면에 가까우나 뒤에 점차 약화되어 왔으며, 곳에 따라서는 태극이나 주역무늬가 새겨진 것을 쓰기도 한다. 근래에는 사람 얼굴모양의 것을 많이 얹으며 단지 꽃잎을 양각한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망와는 잡귀를 물리쳐 준다는 속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광언, 우리 생활 100년, 현암 출판사
노영선, 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 전우문화사, 2004
류경수, 우리 옛건축에 담긴 표정들, 대원사, 1998
박한규, 건축설계방법론, 기문당, 1992
이규태, 우리의 집 이야기, 기린원, 1991
홍형옥, 한국 주거사, 민음사, 1992
고려 초기에는 통일신라의 전통과 고구려적인 요소를 지닌 막새형을 계승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기와를 생산하였으나 중기 이후부터는 취두나 용두와 같은 새로운 기와가 출현하게 되며 막새의 시문 단위도 연꽃무늬나 당초무늬에서 벗어나 귀목무늬의 일색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범자가 막새에 새겨지게 되며 암막새의 드림새가 장방형에서 밑으로 늘어져 커지게 된다.
고려의 기와는 도읍지인 개성을 비롯하여 서경, 동경 등의 삼경이 위치한 평양과 경주 그리고 전국 각지의 절터에서 많은 수량이 출토되고 있다. 개성에는 당시의 궁터와 여러 산성터가 남아 있고 봉은사, 흥왕사, 흥국사, 현화사 등의 큰 절터가 위치하고 있어서 고려 기와가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는 지역이다. 고려시대에는 숭불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사원을 건립하게 되었는데 기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기본 기와인 암, 수키와와 막새 그리고 마루 기와와 약간의 서까래 기와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중기 이후부터는 치미와 귀면기와 대신에 취두와 용두가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키와는 유단식과 무단식이 함께 제작되었고, 암, 수키와의 표면에는 평행선, 문살, 우상 등의 다양한 무늬가 새겨지고 있으나 우상무늬가 주로 새겨졌다. 우상무늬는 생선뼈무늬로 뼈무늬가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빗살무늬토기의 시문 명칭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우상무늬는 새의 날개깃 모양으로 무늬가 집선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때로는 문살무늬나 평행선무늬와 함께 새겨진다.
수막새에는 연꽃, 보상화, 모란, 귀면, 귀목 등이 장식되어 있고, 암막새에는 당초, 모잔당초, 연꽃, 초화, 새, 귀목 등이 새겨지고 있는데 연꽃무늬와 귀목무늬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밖에 문자와 범자가 새겨진 막새가 제작 되었다.
6.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기와는 기능성이 강조되고 장식성이나 미관성이 약화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암, 수막새는 직각이 아닌 둔각 상태로 암, 수키와와 접합되어 있고, 드림새가 밑으로 늘어져 종타원형이나 역삼각형으로 변형되어 제작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장식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타원막새, 치미, 귀면기와, 마루막새, 서까래 기와, 모서리 기와 등이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시문 단위도 단순하며, 막새의 뒷면에는 마포의 흔적인 포목흔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기와가 매우 투박하다.
조선시대의 기와는 도읍지인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관아, 산성, 향교, 제각, 사원 등지에서 약간씩 출토 되고 있다. 서울에는 당시의 궁궐인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일부 복원되어 조선 후기의 기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암, 수키와와 막새, 취두, 용두, 잡상, 망새 등의 마루기와 그리고 사래나 추녀에 사용되는 토수 등이 제작되었으나 망새를 제외한 마루 기와와 토수 등은 궁전 건축이나 관아 건물에 한정되어 사용 되었다. 조선시대의 일반 건축에 사용된 기와는 암, 수키와 막새 그리고 마루에 사용되는 망새기와로 한정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특징은 기와류가 민가에까지 파급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Ⅷ. 기와집
중국에서는 기와를 춘추 전국시대에 사용하였다고 하나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쓰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지마니 사금 11년 조\"에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렸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궁궐이나 큰 건물에 기와를 덮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 서기\"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이라고 하는 법륭사를 지을 때, 백제에서 기와 박사 네 사람이 일본에 건너가서 기와를 구어 주었다고 하므로 7세기 경에는 기와를 굽는 기술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었던 듯하다.
기와를 기와장이가 얹는다. 예전에는 기와를 만들 때, 큰 틀 안에 모래와 흙 그리고 물을 붓고 나서 소로 하여금 이리저리 밟고 다니도록 해서 잘 이긴 뒤에, 이 흙을 기틀에 넣어 꼴을 잡아 말리고 잿물을 발라 가마에 넣어 구웠다. 따라서 큰집을 지을 때에는 돈을 미리 주고 필요한 수량의 기와를 맞추어 두어야 하였다.
서민 가옥의 기와 일은 먼저 암기와를 나란히 깔고 사이사이에 숫기와를 덮고 나서, 숫기와 앞에 흙과 백토로 빚은 아귀토로 막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잘 짓는 집에서는 암막새를 먼저 놓고, 암키와를 서너 겹으로 겹쳐 깔아서 한두 장이 깨져도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수키와도 역시 숫막새를 먼저 놓고 홍두깨흙을 얹은 뒤에 덮어 나간다. 지붕 마루에는 적새라 하여 암기와를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숫기와를 덮는다. 따라서 암기와를 많이 덮을수록 지붕 마루가 높아져서 집 자체가 커 보인다.
어떤 기와집에서는 복문이라고 하여 적새 위에 숫기와를 얹을 때, 한가운데의 두 장을 서로 어스러지게 팔자(八字) 모양으로 마주 세워 두는 일이 있다. 이를 세울 때 주인은 기와장이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므로 상량을 올리는 날이 목수의 생일이라고 하듯이 이날을 기와장이의 생일이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이 문으로 복이 들어온다고 하나 까치구멍처럼 원래는 채광이나 배연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팔작 지붕의 경우에는 지붕마루마다 망와라 하여 도깨비 모양의 암막새를 얹는다. 망와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귀면에 가까우나 뒤에 점차 약화되어 왔으며, 곳에 따라서는 태극이나 주역무늬가 새겨진 것을 쓰기도 한다. 근래에는 사람 얼굴모양의 것을 많이 얹으며 단지 꽃잎을 양각한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망와는 잡귀를 물리쳐 준다는 속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광언, 우리 생활 100년, 현암 출판사
노영선, 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 전우문화사, 2004
류경수, 우리 옛건축에 담긴 표정들, 대원사, 1998
박한규, 건축설계방법론, 기문당, 1992
이규태, 우리의 집 이야기, 기린원, 1991
홍형옥, 한국 주거사, 민음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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