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 전쟁과 호남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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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오농민 전쟁과 호남사상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동학농민운동이라고도 한다.
(출처 :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did=ct0+pWkLNCGikdZCLKr8CkpLaJm0E83&ts=105529439)
Ⅰ. 머리말
: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은 전남지방은 온화한 기후와 비옥하고 넓은 평야지대로 풍부한 물산과 수려한 경관을 지녔다. 그 속에 삶을 편 남도인들은 개방적이고 섬세하며 다정다감하여 인정이 넘쳐 흘렀고 수준높은 문화생활을 즐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정치의 주변부로 전락하여 추악하고 비열한 정치싸움에 휘말리지 않아서 일찍부터 충절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은둔지가 되었고 현실정치에서 못 견딘 의리의 선비들이 유배되거나 보금자리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남지방은 의로운 정서가 넘쳐 흘렀고 불의와 민족적 위기에는 과감하게 대처하였으니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건졌고 그 후에도 자주독립과 민주화의 쟁취에 앞장서서 정의사회의 구현에 크게 공헌했다.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근대사회는 이제까지 탄압받고 수탈 당하던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나라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민주사회를 이룩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나라 근대의 서막이요 이후의 민족운동과 민주운동의 원동력으로 우리 나라의 역사발전을 이끌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호남인들은 구조적 모순을 안고 출범한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병폐를 제거하고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외세를 배척하는 일에 앞장섰다. 동학농민혁명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반봉건의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가장 소외당하고 수탈 당했으며 탄압 당했던 호남의 농민들이 시작했으며 힘차게 추진했고 최후까지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신무기 때문에 좌절되었지만 그것은 계승 발전되어 한국사의 길잡이가 되었으며 오늘의 우리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한 뜻에서 남도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켰는가를 자세하게 살펴 보려는 것이다.
(출처 : 전남대학교 사학과 이상식 교수 논문 “전남의 동학농민 혁명”)
Ⅱ. 동학혁명의 배경과 전남
: 구조적 모순을 안고 등장한 조선왕조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그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종말이 가까워 왔다. 그것은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인데 안으로는 변태적인 양반정치인 세도정치로 인해 탐관오리가 판을 쳤으며 향리와 지방 호족의 횡포가 극심하여 농민을 수탈하고 탄압하였다. 밖으로는 서세동점의 물결이 중국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고 서서히 우리 나라에까지 위협하였으며 미국에 개국된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해 무섭게 성장하여 그 힘이 우리나라에 뻗치고 있었다.
봉건체제와 외세의 침탈은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극심했으니 토지세는 전국의 64.5%를 부담했고 다른 세금들을 합하더라도 전국세액의 51.75%를 전라도가 부담했다. (출처 : 마생무구, “조선전세고”1949, 부록 실상납편)
또한 탐관오리들은 앞을 다투어 호남지방에 부임하여 수탈을 일삼았으니 그 정황을 매천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근세에 탐묵이 날로 심하였는데 호남은 재물이 풍부하여 그 욕심을 메꾸어 줄 수가 있었다. 대체로 벼슬하는 자들은 이에 백성을 마치 양이나 돼지처럼 보고 마음대로 묶고 베이고 일생동안 종처럼 치고 북처럼 두드려서 모두 제 마음대로 재물을 갖다 썼다. 그리하여 요즘 서울을 동요에 이르기를 자식을 낳아서 호남에 가서 벼슬하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출처 : 황현, “오하기문”수필,p.45)
그러한 탐관오리들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민중들이 일제히 봉기했으니 1862년의 임술민중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경상도의 진주, 전라도의 함평, 남쪽의 제주도, 북쪽의 함흥 등 전국의 70여개 지방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일어났는데 그 중 전라도 지역은 38개 지방이었으며 전남지방에서는 18개 지방이었다. (출처 : 오영교, 1862년 농민항쟁연구)
함평에서는 정한순의 주도하에 함평현민 전부가 일어서서 현감을 끌어내어 무안 경계로 쫓아내고 1개월 가까이 농민들의 뜻을 모아 스스로 고을을 다스려 나갔다. 그러나 임술민중항쟁은 산발적이거나 일시적인 농민봉기로 그치고 말았으니 그것은 농민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의 수가 급증하자 탐관오리들의 착취도 심각하여 동학을 신봉했다는 구실로 농민들을 수탈하고 탄압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1892년에 접어들면서 동학의 도는 전라, 충청에 가장 널리 퍼져 이에 따라 관리의 탄압도 심하여 동학당이라면 편히 앉아서 살수가 없었다. 조선의 국세는 날로 기울어 가고 백성은 날마다 망국가를 부르면서 동학을 믿고 몰려드니 난폭한 관리들은 이것을 기화로 동학당이라면 잡아다가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판국이었다. (출처 : 오지영, “동학사”문선각,1973,p.138)
조정의 동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교단 측은 전국에 글을 보내 보은 장내로 모이라고 통고했다. 보은에서 열린 3차 집회는 1893년 3월 11일부터 수만의 교도가 운집했는데 왜와 서양오랑캐를 배척하자는 척왜양창의의 깃발을 들고 대오가 정연했으며 집단행동이 마치 군사조직을 방불케 했다.
3차시위는 수만명이 모였는데 그 중 51%가 전라도의 동학농민이었고 그들은 가장 활발한 시위를 전개했으며 조정의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은 동학농민의 70%가 호남인들이었다. (출처 : 취어 상 pp. 123~5)
또한 현실개혁을 바라는 남접의 전라도 동학농민들 1만여명이 따로 금구원평에 모여 보은의 시위군중들과 같이 상경투쟁을 추진하기도 했다.
1893년 11월에 희대의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개한 전봉준 등 20여명이 고부군 죽산리의 송두호 집에 모여 사발통문을 작성함으로부터 혁명의 준비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를 함락한 후 서울로 직향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데 서명한 사람 가운데 전봉준 등 10명이 동학농민혁명에 희생되었고 통문의 내용이 혁명의 과정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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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28
  • 저작시기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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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49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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