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해양팽창과 근대의 형성
<커피, 홍차와 해상팽창>
-커피와 홍차의 기원, 전파과정,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1.서론
2.커피와 홍차의 기원
3. 자국 내에서 확산
4.유럽으로의 전파
5.커피와 홍차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
커피와 홍차의 효능논쟁
공공장소에서의 커피와 홍차
커피와 홍차의 자체생산
보스턴 차사건과 홍차·커피
커피·홍차와 식사문화
6.결론
7. 참고문헌
<커피, 홍차와 해상팽창>
-커피와 홍차의 기원, 전파과정,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1.서론
2.커피와 홍차의 기원
3. 자국 내에서 확산
4.유럽으로의 전파
5.커피와 홍차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
커피와 홍차의 효능논쟁
공공장소에서의 커피와 홍차
커피와 홍차의 자체생산
보스턴 차사건과 홍차·커피
커피·홍차와 식사문화
6.결론
7. 참고문헌
본문내용
권장되었다. 상게서, 81면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와인상점 아예 문을 닫을 정도였다. 이제 커피의 효용은 널리 인정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커피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1554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는데 커피하우스는 ‘문화의 학교’로 커피는 ’체스 두는 사람들과 사색가들의 우유‘로 불렸다. 상게서, 82면
앞서 말했듯이 홍차는 17세기 이전부터 중국에서 생산되었지만 지금까지 널리 이용되지 않았다. 발효차는 탄닌 함유량이 많아서 중국의 물에서 우려내면 떫은맛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기문홍차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기문홍차 90%이상이 수출되기 때문에 기문지방에 가도 기문홍차를 맛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4.유럽으로의 전파
커피에 대한 정보는 일찍이 유럽으로 전달되었다. 동부 지역을 여행한 기독교도 여행가들이 커피에 대한 소식을 전해했지만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1548년 안토니오 메나비오는 투르크인이 마시는 음료 목록에서 커피를 제외시켰으며 1558년 페에르 벨론 역시 해당 지역의 과수나무를 조사하면서도 커피나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커피에 대한 정보는 언급되더라도 긍정적인 효용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이 강조되었다. 때문에 비엔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도 사람들은 이것을 ‘투르크의 찌꺼기’라고 부르며 투르크식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커피를 유럽인의 입맛에 맞게 계량하면서 커피의 수요가 늘며 여러 지역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그러나 커피는 대부분 지역에서 소비량이 매우 적었고 북부 유럽으로 퍼져 나가기 위해서는 맥주와 싸워야 했다. 14세기에 북유럽은 맥주의 창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만취할 정도로 과하게 술을 마시는 풍조가 만연했다. 사람들의 눈, 혈관, 감각은 맥주에 절어 있다고 할 정도 였으며 사람들은 맥주 속에서 사고하고 느끼고 판단했다. 상게서, 110면
특히 이러한 경향은 독일에서 가장 심했는데 이는 독일 공작부인이 1712년에 쓴 편지의 “나는 커피나 차, 초콜렛 따위를 참아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해할 수 없다. 나한테는 무엇보다 맥주수프가 제일이다.”라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커피는 중부유럽에서 서부유럽보다 더 느린 속도로 퍼져나갔고 고지대 독일지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반화된 이후에도 8년 동안 대중화되지 못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 영국인들은 주독을 해소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 반면 독일인들은 안티 바쿠스음료에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게서, 118-119면
비단, 향료 등을 동양으로부터 수입하던 유럽 상인들은 17세기가 되어서야 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박이 일본의 히라도에 처음 내항했고 이곳에서 차를 처음 수출했는데 이것이 유럽이 접한 최초의 차였다. 반세기 정도가 지나서야 영국은 네덜란드 통해 차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23년 암보니아 학살사건으로 인해 영국과 네덜란드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644년에 들어서 영국은 독자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차를 들여온다. 츠노야마 사가에, 서은미 역, 『녹차문화 홍차문화』, 예문서원,2001, 24면
초기에 차는 동양의 전통이자 만병통치약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실제로 “오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들은 동양의 차를 그 무게의 두 배나 되는 은으로 수입하고 있다.”라는 것이 차의 판매문구였으며 차는 만병통치약으로서 두통, 결석, 수종, 괴혈병, 기억상실, 복통, 설사, 악몽 등의 증상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으며 식욕을 억제하고, 폭음·폭식 후 위장을 다스리는 데도 사용되었다. 이소부치 다케시, 전게서, 42면
영국에서는 왕비 캐서린이 차, 일본 차 도구, 자기 다완 등 영국왕실소개하면서 차 문화가 궁정, 시민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녹차보다는 발효차가 영국이 기호에 적합하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는 영국의 수질과 관련이 있는데 런던의 물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된 경도가 높은 물이기 때문에 녹차는 맛과 향이 약한 반면 발효차인 홍차가 그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츠노야마 사카에의 『차의 세계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녹차의 수입량이 반 이상이었지만 30년대 이후에는 압도적으로 홍차를 선호하게 되면서 수입량도 급증했다. 상게서, 78면
5.커피와 홍차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
커피와 홍차가 유럽에 확산되면서 그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변동)이 생겨났다. 비록 커피가 홍차에 앞서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둘 다 음료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유사했다. 그래서 ‘커피와 홍차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에서는 커피와 홍차 순으로 설명한 앞과는 달리 문화적 움직임의 종류에 따라 설명할 것이다.
커피와 홍차의 효능논쟁
커피와 홍차는 서로 다른 시기에 유입되었지만 둘 모두 유입 이후 그 효능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다. 네덜란드의 전의 분테쿠는 지나칠 정도로 커피의 음용을 권장하였다. 그는 커피가 혈액 순환을 촉진시켜서 생명체 활동을 자극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 『기초의학교본』에서 “전국적으로 또 범세계적으로 차를 마실 것을 권한다. 남자나 여자나 매일같이 차를 마시는 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매시간 마실 것이며, 처음에는 하루 10잔 정도로 시작하여 점차 위장과 신장이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음용량을 늘려나가는 것이 좋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하루 50잔의 차를 처방하기도 했는데, 베를린의 궁정에서 분테쿠가 꽤 많은 환자들을 저승으로 이끈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인리히 E.야콥, 전게서, 123면
반면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의사들은 커피를 독약으로 규정했다. 마르세이유의 의사들은 커피가 대단한 열정을 일으키고 이렇게 고무된 열정은 어떠한 경고와 박해도 무력화 시키며 커피가 일단 혈액으로 침투하면 림프를 공격하고 신장을 건조하게 한다고 경고했다. 또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커피는 뇌에 위협을 주기 때문에 신경 액은 고갈되고 그 결과 무력감, 마비, 발기불능이 나타난다고 한다. 상게서, 135면
그런데 이렇게 의사들이 커피를 유해한 것으로 규정한 예는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아라비아, 페르시아 투르크의 의사들은 커피가 몸에 활력을 주고, 몸살과 우울함을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와인상점 아예 문을 닫을 정도였다. 이제 커피의 효용은 널리 인정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커피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1554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는데 커피하우스는 ‘문화의 학교’로 커피는 ’체스 두는 사람들과 사색가들의 우유‘로 불렸다. 상게서, 82면
앞서 말했듯이 홍차는 17세기 이전부터 중국에서 생산되었지만 지금까지 널리 이용되지 않았다. 발효차는 탄닌 함유량이 많아서 중국의 물에서 우려내면 떫은맛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기문홍차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기문홍차 90%이상이 수출되기 때문에 기문지방에 가도 기문홍차를 맛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4.유럽으로의 전파
커피에 대한 정보는 일찍이 유럽으로 전달되었다. 동부 지역을 여행한 기독교도 여행가들이 커피에 대한 소식을 전해했지만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1548년 안토니오 메나비오는 투르크인이 마시는 음료 목록에서 커피를 제외시켰으며 1558년 페에르 벨론 역시 해당 지역의 과수나무를 조사하면서도 커피나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커피에 대한 정보는 언급되더라도 긍정적인 효용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이 강조되었다. 때문에 비엔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도 사람들은 이것을 ‘투르크의 찌꺼기’라고 부르며 투르크식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커피를 유럽인의 입맛에 맞게 계량하면서 커피의 수요가 늘며 여러 지역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그러나 커피는 대부분 지역에서 소비량이 매우 적었고 북부 유럽으로 퍼져 나가기 위해서는 맥주와 싸워야 했다. 14세기에 북유럽은 맥주의 창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만취할 정도로 과하게 술을 마시는 풍조가 만연했다. 사람들의 눈, 혈관, 감각은 맥주에 절어 있다고 할 정도 였으며 사람들은 맥주 속에서 사고하고 느끼고 판단했다. 상게서, 110면
특히 이러한 경향은 독일에서 가장 심했는데 이는 독일 공작부인이 1712년에 쓴 편지의 “나는 커피나 차, 초콜렛 따위를 참아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해할 수 없다. 나한테는 무엇보다 맥주수프가 제일이다.”라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커피는 중부유럽에서 서부유럽보다 더 느린 속도로 퍼져나갔고 고지대 독일지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반화된 이후에도 8년 동안 대중화되지 못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 영국인들은 주독을 해소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 반면 독일인들은 안티 바쿠스음료에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게서, 118-119면
비단, 향료 등을 동양으로부터 수입하던 유럽 상인들은 17세기가 되어서야 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박이 일본의 히라도에 처음 내항했고 이곳에서 차를 처음 수출했는데 이것이 유럽이 접한 최초의 차였다. 반세기 정도가 지나서야 영국은 네덜란드 통해 차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23년 암보니아 학살사건으로 인해 영국과 네덜란드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644년에 들어서 영국은 독자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차를 들여온다. 츠노야마 사가에, 서은미 역, 『녹차문화 홍차문화』, 예문서원,2001, 24면
초기에 차는 동양의 전통이자 만병통치약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실제로 “오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들은 동양의 차를 그 무게의 두 배나 되는 은으로 수입하고 있다.”라는 것이 차의 판매문구였으며 차는 만병통치약으로서 두통, 결석, 수종, 괴혈병, 기억상실, 복통, 설사, 악몽 등의 증상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으며 식욕을 억제하고, 폭음·폭식 후 위장을 다스리는 데도 사용되었다. 이소부치 다케시, 전게서, 42면
영국에서는 왕비 캐서린이 차, 일본 차 도구, 자기 다완 등 영국왕실소개하면서 차 문화가 궁정, 시민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녹차보다는 발효차가 영국이 기호에 적합하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는 영국의 수질과 관련이 있는데 런던의 물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된 경도가 높은 물이기 때문에 녹차는 맛과 향이 약한 반면 발효차인 홍차가 그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츠노야마 사카에의 『차의 세계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녹차의 수입량이 반 이상이었지만 30년대 이후에는 압도적으로 홍차를 선호하게 되면서 수입량도 급증했다. 상게서, 78면
5.커피와 홍차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
커피와 홍차가 유럽에 확산되면서 그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변동)이 생겨났다. 비록 커피가 홍차에 앞서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둘 다 음료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유사했다. 그래서 ‘커피와 홍차의 전파에 따른 문화적 움직임’에서는 커피와 홍차 순으로 설명한 앞과는 달리 문화적 움직임의 종류에 따라 설명할 것이다.
커피와 홍차의 효능논쟁
커피와 홍차는 서로 다른 시기에 유입되었지만 둘 모두 유입 이후 그 효능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다. 네덜란드의 전의 분테쿠는 지나칠 정도로 커피의 음용을 권장하였다. 그는 커피가 혈액 순환을 촉진시켜서 생명체 활동을 자극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 『기초의학교본』에서 “전국적으로 또 범세계적으로 차를 마실 것을 권한다. 남자나 여자나 매일같이 차를 마시는 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매시간 마실 것이며, 처음에는 하루 10잔 정도로 시작하여 점차 위장과 신장이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음용량을 늘려나가는 것이 좋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하루 50잔의 차를 처방하기도 했는데, 베를린의 궁정에서 분테쿠가 꽤 많은 환자들을 저승으로 이끈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인리히 E.야콥, 전게서, 123면
반면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의사들은 커피를 독약으로 규정했다. 마르세이유의 의사들은 커피가 대단한 열정을 일으키고 이렇게 고무된 열정은 어떠한 경고와 박해도 무력화 시키며 커피가 일단 혈액으로 침투하면 림프를 공격하고 신장을 건조하게 한다고 경고했다. 또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커피는 뇌에 위협을 주기 때문에 신경 액은 고갈되고 그 결과 무력감, 마비, 발기불능이 나타난다고 한다. 상게서, 135면
그런데 이렇게 의사들이 커피를 유해한 것으로 규정한 예는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아라비아, 페르시아 투르크의 의사들은 커피가 몸에 활력을 주고, 몸살과 우울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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