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기독교의 교화
Ⅱ. 불교의 교화
1. 교서명의 불교색
2. 불교어구의 표어로의 편입
3. 「사대강령」의 제정과 그 위치
4. 불교정전 편제상의 문제
5. 교리의 불교적 변모
Ⅲ. 원불교의 교화
1.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교화
2. 민중지향의 교화
3. 사회적 방법에 의한 교화
Ⅳ. 유교의 교화
Ⅴ. 북한의 교화
Ⅵ. 삼동윤리의 교화
참고문헌
Ⅱ. 불교의 교화
1. 교서명의 불교색
2. 불교어구의 표어로의 편입
3. 「사대강령」의 제정과 그 위치
4. 불교정전 편제상의 문제
5. 교리의 불교적 변모
Ⅲ. 원불교의 교화
1.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교화
2. 민중지향의 교화
3. 사회적 방법에 의한 교화
Ⅳ. 유교의 교화
Ⅴ. 북한의 교화
Ⅵ. 삼동윤리의 교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 商頌이 유행하였다. 詩經에는 모두 305편의 詩가 실려 있는데, 크게 風(또는 國風), 雅, 頌의 3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다음으로 書經에 대해 알아본다. 上古의 聖王 帝堯로부터 周代에까지 여러 帝王들의 政法上의 言行을 기록한 책이 書經이며, 최고의 散文集으로 先秦때는 단지 書라고 칭하다가 漢代부터 尙書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기록물이면서도 先王의 書로 전승된 귀중한 자료로써, 춘추좌씨전에는 공자 이전에 이미 書가 널리 전파되어 교양서로 쓰였다고 하다. 현 행본은 58편, 戰國 말기에는 100여 편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진시황의 焚書坑儒로 거의 산실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易經을 살펴본다. 周易의 전체 구성은 本文에 해당하는 上下의 經文과 해설 부분인 十翼으로 이루어져 있다. 易의 始原인 河圖의 출현은 伏羲라는 제왕이 어진 정치를 하였는데, 그 시대에 黃河에서 龍馬가 나왔다(27上, 38左, 5 10中, 49右, 16下의 배치). 이어서 洛書의 출현은 禹임금이 천하의 홍수를 다스려 인간의 삶터를 되찾을 때 洛水에서 신비로운 거북이 나왔다. 이 거북의 등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었는데 1-9까지 숫자가 조리 정연하게 배열(上에 492, 中에 357, 下에 816)되었으며, 홍범구주와 팔괘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禮記에 대해 언급해 본다. 禮記는 총 49편으로 되어 있으며, 禮經이라 하지 않고 禮記라 한 것은 禮에 관한 기록, 또는 주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周代末 秦漢시대 여러 유학자들의 古禮에 대한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다. 공자는 夏殷周 3대 이래 문물제도, 儀禮, 예절 등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책무로 삼았으며, 공자 이후 학자들은 禮說을 늘려 漢代에 이르러 200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禮記의 내용은 통론편, 制度篇, 明堂陰陽記, 喪服, 世子法, 子法, 祭祀, 吉 禮, 吉事, 樂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春秋를 보면 본 書에는 春秋 시대에 魯나라 隱公부터 哀公에 이르는 12공 242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는 魯나라 史官이 기록한 宮廷 연대기였는데, 이에 공자가 독자적으로 역사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添削하였다. 그러나 春秋가 魯나라 역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晋, 楚, 周, 燕, 宋, 齊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春秋의 經文 속에는 사건이나 인물이 공자의 예절과 名分을 중시하는 정치이념 아래 비판되고 평가되었다.
이러한 五經을 근간으로 한 오늘날 정신적 교훈서로는 잘 알려진 것처럼 四書三經이 있다. 鄭圃隱은 大學의 提綱꽈 中庸의 會極에 있어 道를 밝히는 뜻을 얻었고, 論語와 孟子의 精微에 있어서는 操存 涵養의 요체와 체험의 방법을 얻었으며, 易經에 있어서는 선천 후천이 서로 체와 용이 됨을 알았고, 書經에 있어서는 精一과 執中의 심법임을 알았으며, 詩經에서는 民 物則에 근본하는 교훈을, 春秋에서는 그 道誼와 公利의 公辨을 알았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四書에 孟子와 大學 中庸이 들어간 것은 宋代 二程의 업적이다. 朱子는 四書를 완성하고 그 이론체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송대의 학자들은 孟子의 학설, 특히 성선설을 공자사상의 정통 계승으로 삼았으며, 孟子를 四書의 하나로 격상시킨 것이다. 즉 四書를 도통, 즉 교화됨의 소재로 삼기 위해 宋代의 程朱는 分章하여 四書 규정한 것이다. 程朱는 四書를 도통의 소재로 삼아 四書를 확립하고 經學으로써 민간들 교화에 필독서로 삼았다.
그런데 송대에는 四書가 관리 등용의 시험 교재로 될 정도로 중요한 경서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도 하였다. 주자학자와 양명학자는 물론이고 그 밖의 학자들한테서도 四書는 중요한 경서가 되었으며, 四書五經에 대한 朱熹 및 그 학파의 주석서는 元代에 이르러서는 관리 등용시험이 필수적인 교과서가 되고, 明代에는 영락대전 성리대전이 편집되어 주자학은 官學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수립하게 되었다. 곧 朱子의 四書五經의 주석서는 元代에 관리등용 시험의 필독서이자, 明代에 五經四書 大全이 편집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경우 五經의 전래는 백제의 경우에는 舊唐書에 “그 서적에는 五經과 諸子書 및 역사서가 있으며, 表나 疏는 중국의 법식에 의거하였다”고 한데서 유학이 백제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중국 한무제 때 성립된 五經博士 제도가 백제에 전해져 백제에서는 이 제도에 기초하여 유교사상을 십분 응용하였다. 우리나라에 四書의 전래는 삼국시대보다 훨씬 후기에 들어왔으며, 조선조에 四書 五經이 백성 및 지식인의 교화 교재로 애용되었다. 李齊賢의 翁稗說에 의하면 朱熹의 四書集注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전에 安杜俊 같은 일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이해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四書 三經을 교양의 필독서, 교화의 經書로 애용되는 것은 이러한 전통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經書가 우리 주변에 있다고 해도 이를 암송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孔子도 많이 외운들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바른 경서 공부가 아니라는 언급이 주목된다. 詩經 3백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그의 외침은 經書 교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공자의 이러한 언급을 깊이 새겨 지성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동양의 寶庫인 사서삼경을 인성순화 및 심성수양을 위해 교과서로 삼아 현실생활에 응용하였으면 하는 요청이 나올 법 하다. 유교가 이처럼 오래토록, 그리고 넓은 대륙인 중국에 뿌리밖에 온 것은 그들 經書가 백성들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본다.
Ⅴ. 북한의 교화
1945년 광복이후 원불교의 북한교화는 전무상태였다 할 수 있다. 1990년 4월 당시 미국에서 교화 활동을 하던 박성기교무가 평양을 잠시 다녀 온 적이 있으나 당시의 상황이 교화의 기회를 갖기는 어려웠다. 필자는 1989년대만 佛光寺에서 개최되었던 불교학 관계 국제학술회의에 다녀 온 후, 붕괴되며 개방되는 동구 공산권을 보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을 자연히 갖게 되었고 북한학자와의 상면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여 이해를 위한 준비를
다음으로 書經에 대해 알아본다. 上古의 聖王 帝堯로부터 周代에까지 여러 帝王들의 政法上의 言行을 기록한 책이 書經이며, 최고의 散文集으로 先秦때는 단지 書라고 칭하다가 漢代부터 尙書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기록물이면서도 先王의 書로 전승된 귀중한 자료로써, 춘추좌씨전에는 공자 이전에 이미 書가 널리 전파되어 교양서로 쓰였다고 하다. 현 행본은 58편, 戰國 말기에는 100여 편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진시황의 焚書坑儒로 거의 산실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易經을 살펴본다. 周易의 전체 구성은 本文에 해당하는 上下의 經文과 해설 부분인 十翼으로 이루어져 있다. 易의 始原인 河圖의 출현은 伏羲라는 제왕이 어진 정치를 하였는데, 그 시대에 黃河에서 龍馬가 나왔다(27上, 38左, 5 10中, 49右, 16下의 배치). 이어서 洛書의 출현은 禹임금이 천하의 홍수를 다스려 인간의 삶터를 되찾을 때 洛水에서 신비로운 거북이 나왔다. 이 거북의 등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었는데 1-9까지 숫자가 조리 정연하게 배열(上에 492, 中에 357, 下에 816)되었으며, 홍범구주와 팔괘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禮記에 대해 언급해 본다. 禮記는 총 49편으로 되어 있으며, 禮經이라 하지 않고 禮記라 한 것은 禮에 관한 기록, 또는 주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周代末 秦漢시대 여러 유학자들의 古禮에 대한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다. 공자는 夏殷周 3대 이래 문물제도, 儀禮, 예절 등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책무로 삼았으며, 공자 이후 학자들은 禮說을 늘려 漢代에 이르러 200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禮記의 내용은 통론편, 制度篇, 明堂陰陽記, 喪服, 世子法, 子法, 祭祀, 吉 禮, 吉事, 樂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春秋를 보면 본 書에는 春秋 시대에 魯나라 隱公부터 哀公에 이르는 12공 242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는 魯나라 史官이 기록한 宮廷 연대기였는데, 이에 공자가 독자적으로 역사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添削하였다. 그러나 春秋가 魯나라 역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晋, 楚, 周, 燕, 宋, 齊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春秋의 經文 속에는 사건이나 인물이 공자의 예절과 名分을 중시하는 정치이념 아래 비판되고 평가되었다.
이러한 五經을 근간으로 한 오늘날 정신적 교훈서로는 잘 알려진 것처럼 四書三經이 있다. 鄭圃隱은 大學의 提綱꽈 中庸의 會極에 있어 道를 밝히는 뜻을 얻었고, 論語와 孟子의 精微에 있어서는 操存 涵養의 요체와 체험의 방법을 얻었으며, 易經에 있어서는 선천 후천이 서로 체와 용이 됨을 알았고, 書經에 있어서는 精一과 執中의 심법임을 알았으며, 詩經에서는 民 物則에 근본하는 교훈을, 春秋에서는 그 道誼와 公利의 公辨을 알았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四書에 孟子와 大學 中庸이 들어간 것은 宋代 二程의 업적이다. 朱子는 四書를 완성하고 그 이론체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송대의 학자들은 孟子의 학설, 특히 성선설을 공자사상의 정통 계승으로 삼았으며, 孟子를 四書의 하나로 격상시킨 것이다. 즉 四書를 도통, 즉 교화됨의 소재로 삼기 위해 宋代의 程朱는 分章하여 四書 규정한 것이다. 程朱는 四書를 도통의 소재로 삼아 四書를 확립하고 經學으로써 민간들 교화에 필독서로 삼았다.
그런데 송대에는 四書가 관리 등용의 시험 교재로 될 정도로 중요한 경서로서의 위상을 점하기도 하였다. 주자학자와 양명학자는 물론이고 그 밖의 학자들한테서도 四書는 중요한 경서가 되었으며, 四書五經에 대한 朱熹 및 그 학파의 주석서는 元代에 이르러서는 관리 등용시험이 필수적인 교과서가 되고, 明代에는 영락대전 성리대전이 편집되어 주자학은 官學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수립하게 되었다. 곧 朱子의 四書五經의 주석서는 元代에 관리등용 시험의 필독서이자, 明代에 五經四書 大全이 편집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경우 五經의 전래는 백제의 경우에는 舊唐書에 “그 서적에는 五經과 諸子書 및 역사서가 있으며, 表나 疏는 중국의 법식에 의거하였다”고 한데서 유학이 백제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중국 한무제 때 성립된 五經博士 제도가 백제에 전해져 백제에서는 이 제도에 기초하여 유교사상을 십분 응용하였다. 우리나라에 四書의 전래는 삼국시대보다 훨씬 후기에 들어왔으며, 조선조에 四書 五經이 백성 및 지식인의 교화 교재로 애용되었다. 李齊賢의 翁稗說에 의하면 朱熹의 四書集注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전에 安杜俊 같은 일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이해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四書 三經을 교양의 필독서, 교화의 經書로 애용되는 것은 이러한 전통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經書가 우리 주변에 있다고 해도 이를 암송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孔子도 많이 외운들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바른 경서 공부가 아니라는 언급이 주목된다. 詩經 3백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그의 외침은 經書 교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공자의 이러한 언급을 깊이 새겨 지성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동양의 寶庫인 사서삼경을 인성순화 및 심성수양을 위해 교과서로 삼아 현실생활에 응용하였으면 하는 요청이 나올 법 하다. 유교가 이처럼 오래토록, 그리고 넓은 대륙인 중국에 뿌리밖에 온 것은 그들 經書가 백성들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본다.
Ⅴ. 북한의 교화
1945년 광복이후 원불교의 북한교화는 전무상태였다 할 수 있다. 1990년 4월 당시 미국에서 교화 활동을 하던 박성기교무가 평양을 잠시 다녀 온 적이 있으나 당시의 상황이 교화의 기회를 갖기는 어려웠다. 필자는 1989년대만 佛光寺에서 개최되었던 불교학 관계 국제학술회의에 다녀 온 후, 붕괴되며 개방되는 동구 공산권을 보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을 자연히 갖게 되었고 북한학자와의 상면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여 이해를 위한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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