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관][정산종사 학문관][남명 조식 학문관][고정옥 학문관][신숙주 학문관][공자 학문관][설총]정산종사의 학문관, 남명 조식의 학문관, 고정옥의 학문관, 신숙주의 학문관, 공자의 학문관, 설총의 학문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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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학문관][정산종사 학문관][남명 조식 학문관][고정옥 학문관][신숙주 학문관][공자 학문관][설총]정산종사의 학문관, 남명 조식의 학문관, 고정옥의 학문관, 신숙주의 학문관, 공자의 학문관, 설총의 학문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정산종사의 학문관
1. 지식과 학문
2. 교육과 학문
3. 실력과 학문

Ⅱ. 남명 조식의 학문관
1. 학문적 성장과정
2. 박문약례와 치용실천
3. 하학상달과 위기천리
4. 거경집의

Ⅲ. 고정옥의 학문관

Ⅳ. 신숙주의 학문관

Ⅴ. 공자의 학문관

Ⅵ. 설총의 학문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신숙주와 성삼문의 거듭되고 까다로운 질문이 어려워서 피했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에 간접으로 편지만 전하고 읊은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으로 왕래한 것은 세 번(성삼문과 주고받은 많은 시에서 요동을 네 번, 다섯 번 갔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이지만, 여러 번, 곧 10여 회 만나 배운 것은 봄과 초여름의 두 번이라고 생각된다. 한 번 갔을 때마다 당연히 여러 차례 만나게 되어 13회의 왕래였다면 5, 60회나 만나 배웠을 것이므로 뒤의 예겸과 같은 중국 사신에게 더 물어볼 내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홍무정운역훈서」의 7, 8회의 중국 왕래는 요동의 이 3회와 4, 5회의 개별적인 북경 방문이 된다. 기록으로 확인된 것만 보아도, 신숙주의 서문 집필 전 방문은 그의 생애에서 말한 1452년 사은사 서장관으로서의 일이고,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成勝)이 1447년 성절사(聖節使)와 1450년(문종 즉위년) 10월 정조부사(正朝副使)로 갔을 때에 수행한 일이다. 특히 성삼문의 1450년 방문에는 신숙주가 음운을 질문할 사목(事目)을 왕에게 아뢴 실록의 기사(문종 즉위년 10월 10일자)가 있다. 그밖에 이들이나 다른 사람의 한두 차례 북경 방문이 있었다면 7, 8회가 된다. 그러므로 겉으로 어긋나는 이들 세 기록의 방문 횟수도 어느 하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횟수 계산의 근거가 다른 데 말미암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으로 황찬에게 음운을 질문하기 위하여 요동을 왕복한 횟수는 1445년의 3회이고, 객관에서 황찬의 숙소 왕래는 모두 10여 회가 되는 셈이다. 신숙주가 말한 7, 8회의 중국 왕래는 요동의 3회와 북경의 4, 5회를 합친 계산이다. 그러나 우리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의 정리와 음역을 위한 중국의 학자에게 질문한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450년 윤1월에 사신으로 온 예겸에게도 신숙주와 성삼문이 왕명으로 질문하였다. 실록(세종 32년 윤1월 3일자)에 정인지를 따라 이들이 사신을 만나 『홍무정운』을 가지고 강론하였다고 한다. 이때도 손수산은 통사로 참여하였다.(14) 그런데 예겸의 기록에는 갑인일(甲寅日) 곧 윤1월 9일부터 매일 식후에 신숙주가 책상에 책을 얹어 놓고 제기한 음운의 의심을 강교(講校)하였다고 한다.(15) 20일 서울을 떠날 때까지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기사」와 문집에 의하면 두 사람은 의주까지 배웅한 것으로 보이므로 약간의 문제(위의 문종 즉위년 10월 10일자 실록 기사 참조)가 남았겠지만 큰 의문은 거의 해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황찬과 예겸에게 음운을 배웠으나, 해례본과 운서의 편찬에 진작부터 참여하였으므로 이미 운서와 중국어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성삼문의 경우, 요동의 왕래에서 신숙주에게 준 시(권 11)에 \"십년의 한학 공부 어디에 쓰려나/ 이제야 겨우 두세 마디 얻은 것을\" 하는 구절이 있다. 성과는 보잘것없지만 10년 동안 중국어 공부를 하였다는 것이다. 신숙주의 중국어 공부는 얼마나 오랜 기간인지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졸기에서 한어 곧 중국어에 능통하였다고 하고, 「행장」에서는 한어, 왜어, 몽고어, 여진어의 이른바 사학(四學)에 모두 능통하여 간혹 통사 없이도 스스로 의사소통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황찬이나 예겸을 만날 때 통사를 데려간 사실에 비추어 좀 과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록에 문종이 신숙주는 한어를 모르나 음훈(音訓)에는 정통하다고 말한 기사(문종 1년 8월 5일자)가 더 정확하다고 하겠다.(16) 요컨대 중국어에도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운서를 깊이 공부한 데다 황찬과 예겸에게 질정하여 음운과 자훈(字訓)에 대하여는 정통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운서의 편찬에 핵심 인물로 참여하여 서문을 쓰고, 또 스스로 『사성통고』를 편찬한 것이다.
Ⅴ. 공자의 학문관
공장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동양의 학문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이 공자에 의하여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것으로서, 시경과 서경을 읽고 禮와 樂을 공부함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교과서를 읽어서 道를 닦고 君子가 됨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학문을 닦는다는 것은 독서와 수양을 병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먼저 學而 편을 보면, 우선 학문함의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학문을 참되게 닦아서 배움의 세계로 접어들어 성현의 도른 깨닫게 되면, 혼자 느끼는 기쁨으로만 만족하지 못하여 그 기쁨이 타인에게 까지 미친다는 것을 배움의 의의를 제 1 명제 로 제시한다.
1) 學 而
01-01-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01-01-2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01-01-3.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해석) 공자가 말하기를, “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배움의 기쁨이 자신으로부터 타인에게 이를 수 있다는 공자의 논지는 학문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자신의 수양 혹은 배움으로부터 점점 넓은 범위의 타인에게로 퍼져 결국엔 한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유가철학 특유의 수양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자에게 있어 학문이란 그 기본 시작에서부터 수양과 함께 병행해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를 수신으로부터 풀어 나가야 한다는 문구가 도처에 발견된다.
7) 述 而
07-02-0 子曰 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해석) 공자가 말하기를, “묵묵히 이를 새겨두고, 배워서 싫어하지 않고, 사람을 가르쳐서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무슨 어려움이 나에게 있으랴?” 했다.
07-18-1 葉公 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07-18-2.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해석)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더니 자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그 사람됨이, 인간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에 식사도 잊고, 스스로의 즐거움에 근심을 잊어, 늙음이 장차 다가오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하였다.
14) 憲 問
14-25-0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해석) 공자가 말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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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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