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흑우회의 결성
Ⅲ. 흑우회의 활동
Ⅳ. 흑우회와 흑도회
Ⅴ. 흑우회의 이념
1. 자아주의와 허무주의
2. 상호부조론과 자유연합주의
3. 반공산주의
Ⅵ. 결론
참고문헌
Ⅱ. 흑우회의 결성
Ⅲ. 흑우회의 활동
Ⅳ. 흑우회와 흑도회
Ⅴ. 흑우회의 이념
1. 자아주의와 허무주의
2. 상호부조론과 자유연합주의
3. 반공산주의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를 꾀한다는 것”이며 “우리와 서로 유사한 경우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를 발간한다고 밝혔다. 이어 흑우회는 기관지로 민중운동을 발간하고, 일본의 급진단체인 抹殺社 등과 교류하였다. 또한 젊고 활동적인 20여명의 청년들을 규합해 비밀결사인 不逞社를 조직, 초청연설회와 친일파 테러 등 반일적 직접행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흑우회의 아나키즘 선전활동과 불령사의 항일 직접행동 노선, 박렬의 폭탄의거 계획 등은 ‘大逆事件’의 빌미를 제공해 조직의 와해를 불러왔다. 즉 1923년 9월 東京大地震 당시 조선인 대학살을 벌인 일본정부와 군부, 경찰과 자경단 등은 ‘조선인과 일본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동계획’이란 조작극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을 폭동의 주범으로 몰아가려 했다. 흑우회는 이 ‘大逆事件’으로 와해된 이후, 1924년 9월 이후 재건되어 활동하다가 1928년 1월 黑友聯盟으로 재결집되면서 東京 조선인아나키즘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비해, 김약수백무김종범 등 볼셰비즘 지향세력은 신사현 사건을 계기로 9월 在日本朝鮮人勞動者情況調査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北海島와 九州에 대한 실지조사를 벌이는 한편, 노동자 학대의 참상을 보고하는 대회를 열었다. 또 이들은 사망자에 대한 장례를 치러주는 한편, 각지의 후원과 당국의 대책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조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1월 東京에는 朝鮮勞動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어 11월 2일 김종범과 김약수는 북성회 대표를 칭하고 大阪의 宋章福池健弘 등을 만나 연락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12월 1일 大阪에서는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朝鮮勞動同盟會가 결성되었다.
Ⅳ. 흑우회와 흑도회
흑도회는 일본사상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사회운동의 운명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일본사회주의동맹의 운명은 곧 흑도회에 투영되었다. 1920년 12월 결성된 일본사회주의동맹은 이후 최대 규모의 볼셰계 단체인 友愛會의 탈퇴로 이미 붕괴조짐을 보였다. 1921년 5월 동맹에 대한 정부의 강제해산과 6월 주간『노동운동』폐간조치를 계기로 두 세력은 책임공방을 표면화하면서 각기 다른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 즉 볼셰계의 近藤榮藏 高津正道 山川均 등은 비밀결사를 조직한데 이어, 월간잡지『前衛』를 발간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였다. 이에 반해, 아나계의 大杉榮 和田久太郞은 12월부터 세 번째 『勞動運動』을 발간하고 노동조합동맹회를 통해 자유연합주의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였다.
이미 大杉榮은 1920년 12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볼셰비키정권의 아나키스트 탄압을 목격한 후, 공동전선의 한계를 실감했다. 이어 코민테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어 1922년 7월 15일 일본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자, 그는 오랜 동료인 山川均과 결별하였다. 山川均은 공산당 창당에 앞서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이란 글을『前衛』1922년 7-8월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소수 지식인 중심의 사상투쟁을 지양하고 노동대중의 행동을 중시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무산계급의 정치권을 옹호하는 노선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여 아나-보르 논쟁을 격화시켰다. 두 세력은 9월 30일 大阪에서 열린 일본노동조합연합 창립대회에서 중앙집권제를 옹호하는 총동맹회측(볼셰계)과 자유연합제의 비총동맹회(아나계)가 대립함으로써 결정적으로 결별하였다. 계급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중앙집권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산계에 대해 아나계는 단위조합간의 자유연합을 옹호하면서 계급독재를 강력히 비판하였던 것이다. 대회는 기율이 잘 갖춰진 강력한 동맹을 원하는 총동맹회 측의 반대로 무산됨에 따라 아나계의 급속한 침체를 가져왔다.
이러한 일본 사상계의 흐름은 곧장 조선인 단체에 영향을 끼쳤다. 조봉암은 당시 흑도회에 참가한 일을 회고하길, “우리들은 실제에 있어서 관념적 유희에 만족했을 뿐이고 아무 일도 하려고도 못했다”고 하면서 “그저 모든 면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론에 시종했다”며 박열 주도의 언론활동을 비판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인 유희에는 만족할 수 없어” 조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볼셰비즘으로 기울었다고 술회하였다. 송봉우도 당시 흑도회가 “머릿자의 그것과 같이 A색채(=아나키즘)를 가진 회”였기 때문에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고 코스모구락부에서 만난 B색채(=공산주의) 성향의 조선, 일본, 중국, 인도인 등 30여명과 몇 차례 회합, 의기투합하여 北星會를 결성했다고 회고하였다. 특히 흑도회가 박열 중심으로 점차 무정부 공산주의 색채를 띠기 시작하자, 김약수, 백무, 조봉암, 송봉우 등 대중적 노동조합과 중앙집권적 조직론을 옹호하는 공산계는 이에 강력히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상단체의 이념을 둘러싼 대립으로 흑도회는 결성 1년만인 1922년 12월경 공산계인 北星會와 아나계인 黑友會로 분화되었다. 정확히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해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북성회가 1923년 1월, 흑우회가 2월경 설립총회를 각각 가진 것으로 보아, 또 박열의 언론 및 테러 중심 활동에 공산계가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공산계가 먼저 탈퇴해 새 조직 구성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각 단체에 참여한 인원도 정확치는 않으나, 한 일본인 아나키스트는 해체 당시 흑우회에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보았다. 또 북성회에는 대체로 학생 출신들이, 흑우회에는 노동자 출신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김약수, 김종범, 변희용 등은 12월 흑도회 탈퇴 후 宋奉瑀, 金章鉉, 李如星 등 공산주의 성향 60여명과 함께 1923년 1월 15일 북성회 설립총회를 가졌다. 이보다 앞서 김종범, 백무 등은 11월과 12월 東京과 大阪에서 각각 조선노동동맹회를 결성하고 무산자의 이익획득을 표방하며 본격적인 조합운동을 시작했다. 북성회는 이 노동단체들을 지원하는 한편, 기관지『斥候隊』를 발간하였고 국내에 들어와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때 일본인 변호사 布施辰治와 사회주의자 北原龍雄도 함께 1923년 8월 1일부터 7일간 서울을 비롯한 평양 광주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가졌다. 북성회는 山川均 片山潛의 볼세비즘노선을
그러나 흑우회의 아나키즘 선전활동과 불령사의 항일 직접행동 노선, 박렬의 폭탄의거 계획 등은 ‘大逆事件’의 빌미를 제공해 조직의 와해를 불러왔다. 즉 1923년 9월 東京大地震 당시 조선인 대학살을 벌인 일본정부와 군부, 경찰과 자경단 등은 ‘조선인과 일본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동계획’이란 조작극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을 폭동의 주범으로 몰아가려 했다. 흑우회는 이 ‘大逆事件’으로 와해된 이후, 1924년 9월 이후 재건되어 활동하다가 1928년 1월 黑友聯盟으로 재결집되면서 東京 조선인아나키즘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비해, 김약수백무김종범 등 볼셰비즘 지향세력은 신사현 사건을 계기로 9월 在日本朝鮮人勞動者情況調査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北海島와 九州에 대한 실지조사를 벌이는 한편, 노동자 학대의 참상을 보고하는 대회를 열었다. 또 이들은 사망자에 대한 장례를 치러주는 한편, 각지의 후원과 당국의 대책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조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1월 東京에는 朝鮮勞動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어 11월 2일 김종범과 김약수는 북성회 대표를 칭하고 大阪의 宋章福池健弘 등을 만나 연락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12월 1일 大阪에서는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朝鮮勞動同盟會가 결성되었다.
Ⅳ. 흑우회와 흑도회
흑도회는 일본사상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사회운동의 운명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일본사회주의동맹의 운명은 곧 흑도회에 투영되었다. 1920년 12월 결성된 일본사회주의동맹은 이후 최대 규모의 볼셰계 단체인 友愛會의 탈퇴로 이미 붕괴조짐을 보였다. 1921년 5월 동맹에 대한 정부의 강제해산과 6월 주간『노동운동』폐간조치를 계기로 두 세력은 책임공방을 표면화하면서 각기 다른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 즉 볼셰계의 近藤榮藏 高津正道 山川均 등은 비밀결사를 조직한데 이어, 월간잡지『前衛』를 발간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였다. 이에 반해, 아나계의 大杉榮 和田久太郞은 12월부터 세 번째 『勞動運動』을 발간하고 노동조합동맹회를 통해 자유연합주의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였다.
이미 大杉榮은 1920년 12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볼셰비키정권의 아나키스트 탄압을 목격한 후, 공동전선의 한계를 실감했다. 이어 코민테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어 1922년 7월 15일 일본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자, 그는 오랜 동료인 山川均과 결별하였다. 山川均은 공산당 창당에 앞서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이란 글을『前衛』1922년 7-8월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소수 지식인 중심의 사상투쟁을 지양하고 노동대중의 행동을 중시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무산계급의 정치권을 옹호하는 노선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여 아나-보르 논쟁을 격화시켰다. 두 세력은 9월 30일 大阪에서 열린 일본노동조합연합 창립대회에서 중앙집권제를 옹호하는 총동맹회측(볼셰계)과 자유연합제의 비총동맹회(아나계)가 대립함으로써 결정적으로 결별하였다. 계급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중앙집권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산계에 대해 아나계는 단위조합간의 자유연합을 옹호하면서 계급독재를 강력히 비판하였던 것이다. 대회는 기율이 잘 갖춰진 강력한 동맹을 원하는 총동맹회 측의 반대로 무산됨에 따라 아나계의 급속한 침체를 가져왔다.
이러한 일본 사상계의 흐름은 곧장 조선인 단체에 영향을 끼쳤다. 조봉암은 당시 흑도회에 참가한 일을 회고하길, “우리들은 실제에 있어서 관념적 유희에 만족했을 뿐이고 아무 일도 하려고도 못했다”고 하면서 “그저 모든 면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론에 시종했다”며 박열 주도의 언론활동을 비판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인 유희에는 만족할 수 없어” 조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볼셰비즘으로 기울었다고 술회하였다. 송봉우도 당시 흑도회가 “머릿자의 그것과 같이 A색채(=아나키즘)를 가진 회”였기 때문에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고 코스모구락부에서 만난 B색채(=공산주의) 성향의 조선, 일본, 중국, 인도인 등 30여명과 몇 차례 회합, 의기투합하여 北星會를 결성했다고 회고하였다. 특히 흑도회가 박열 중심으로 점차 무정부 공산주의 색채를 띠기 시작하자, 김약수, 백무, 조봉암, 송봉우 등 대중적 노동조합과 중앙집권적 조직론을 옹호하는 공산계는 이에 강력히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상단체의 이념을 둘러싼 대립으로 흑도회는 결성 1년만인 1922년 12월경 공산계인 北星會와 아나계인 黑友會로 분화되었다. 정확히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해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북성회가 1923년 1월, 흑우회가 2월경 설립총회를 각각 가진 것으로 보아, 또 박열의 언론 및 테러 중심 활동에 공산계가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공산계가 먼저 탈퇴해 새 조직 구성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각 단체에 참여한 인원도 정확치는 않으나, 한 일본인 아나키스트는 해체 당시 흑우회에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보았다. 또 북성회에는 대체로 학생 출신들이, 흑우회에는 노동자 출신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김약수, 김종범, 변희용 등은 12월 흑도회 탈퇴 후 宋奉瑀, 金章鉉, 李如星 등 공산주의 성향 60여명과 함께 1923년 1월 15일 북성회 설립총회를 가졌다. 이보다 앞서 김종범, 백무 등은 11월과 12월 東京과 大阪에서 각각 조선노동동맹회를 결성하고 무산자의 이익획득을 표방하며 본격적인 조합운동을 시작했다. 북성회는 이 노동단체들을 지원하는 한편, 기관지『斥候隊』를 발간하였고 국내에 들어와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때 일본인 변호사 布施辰治와 사회주의자 北原龍雄도 함께 1923년 8월 1일부터 7일간 서울을 비롯한 평양 광주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가졌다. 북성회는 山川均 片山潛의 볼세비즘노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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