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시위의 시대적 배경
Ⅲ. 시위의 변화
Ⅳ. 시위의 양상과 사회적 지지
1. 시위 양상의 변화
2. 여론의 동향과 사회적 지지의 변화
Ⅴ. 시위와 조선시대 학생시위
Ⅵ. 시위와 온라인시위
Ⅶ. 시위와 사이버시위
1. 통신질서확립법 반대 온라인 시위 : 8.20, 8.26, 8.28
2. 매향리 온라인 시위 : 9.21
3. 전교조 온라인 시위 : 10.15
4. 과학기술노조 사이버 파업 : 10.16
5. 그 외 사례
Ⅷ. 시위와 중국 배외시위
참고문헌
Ⅱ. 시위의 시대적 배경
Ⅲ. 시위의 변화
Ⅳ. 시위의 양상과 사회적 지지
1. 시위 양상의 변화
2. 여론의 동향과 사회적 지지의 변화
Ⅴ. 시위와 조선시대 학생시위
Ⅵ. 시위와 온라인시위
Ⅶ. 시위와 사이버시위
1. 통신질서확립법 반대 온라인 시위 : 8.20, 8.26, 8.28
2. 매향리 온라인 시위 : 9.21
3. 전교조 온라인 시위 : 10.15
4. 과학기술노조 사이버 파업 : 10.16
5. 그 외 사례
Ⅷ. 시위와 중국 배외시위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글들을 다시 올리는 온라인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마저 삭제하자 ‘여론통제’라며 강력 반발한 전교조는 다시 ‘인권유린 규탄’이란 글을 게시글 앞머리에 붙이는 ‘말머리 달기 운동’을 전개하며 경찰측의 공식 사과와 게시물 원상 복구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4. 과학기술노조 사이버 파업 : 10.16
전국과학기술노조에 소속된 과학기술부 산하 3개 지부 임단협 공동투쟁본부에서는 10월 16일 인터넷에서 ‘사이버 파업(net-strike)’을 감행하였다. 이날 사이버 파업은 정부의 과학기술부 홈페이지(www.most.go.kr) ‘참여마당’의 ‘묻고 답하기’ 게시판에 노동조합의 요구와 과학기술부의 정책에 대한 항의의 글을 집중적으로 조합원 실명으로 올리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시한부로 진행된 사이버 파업은 과기노조 조합원들의 적극적 참여로 약 300여건의 글이 한꺼번에 과기부 홈페이지를 장식하여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과기부에 직접 전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과기부 홈페이지는 한때 갑작스런 접속량을 견디지 못해 운영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사이버 파업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자, 공투본은 10월 19일에도 기획예산처를 상대로 2차 시한부 사이버 파업을 진행했다.
5. 그 외 사례
- 아셈반대 온라인 시위(10.20)와 사이버 참여연대의 온라인 시위(11.9) 등
아셈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더욱 강화하려는 정부에 맞서 10월 20일 새사회연대, 국제노동정보센터 등으로 구성된 ‘아셈반대 민중전선’은 ‘전국민이 함께 하는 아셈반대 온라인 시위’를 주도하였다. 여기에서도 사이버 연좌시위, 항의메일 보내기, [말머리] 달기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는 11월 9일 오후 1시부터 청와대 게시판에 ‘집단소송제와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위한 온라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도 수백건의 게시물이 쏟아졌으며, 저녁 늦은 시간까지 게시물이 이어졌다. 이번 시위는 사이버 서명운동과 병행된 사이버 캠페인의 일환으로 11월 2일부터 재정경제부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벌어졌던 ‘경제개혁 게시판 물결 캠페인\'에 이어 청와대에 경제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한편, 부실기업 퇴출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설산업연맹에서도 11월 중순부터 항의메일 보내기 등 본격적인 사이버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www.kfcitu.org/onload.htm 참조)
Ⅷ. 시위와 중국 배외시위
1971년에서 1980년 기간동안의 배외의 하락은 분명히 북경의 1949년에서 1970년까지의 기간의 강경한 반미논조와 대조를 이루는데 중국은 인도지나에서 미국이 담당한 역할이 무기력 하여서 지지하는 바에 대한 저조가 1970년 이후의 국제 행위의 특징이 되었다. 이 특징은 1970년과 1971년의 파리와의 평화 회담에서 가장 먼저 보여진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중국정부는 성명을 발표 하지않고, 미국의 정책에ㅜ 대해서만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의 지적만을 발표했다. 북경은 미국이 1972년5월북월남 항만에 지뢰를 매설한 것과 아울러 미국이 1972년 하노이와 하이퐁에서 크리스마스 대폭격등, 이 두 가지 사건에서 반영하듯 북경의 이 새로운 태도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그 이후에, 「미국 침략 죄행 」을 규탄하는 언론과 군중시위는 점차 줄어들었다. 북경의 군중시위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보면, 우리는 중국이 미국의 대한 태도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먼저 1971년에 반미 군중시위 활동의 횟수는 27번이고, 그중에 11번이 월남과 관계가 있고 9번은 미국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침략죄행」을 견준 것이고 7번은 조선문제와 관계가 있고, 한번은 대만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것은 중국이 이전에 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1970년의 중국의 군중 배외시위는 총 260여 차례였고 그중249번은 미국이 월남에서의 「침략죄행」에 반대한 것이고 11번은 조선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것은 중국이 「월남에서의 미국」의 태도를 바꾼 것뿐만 아니라, 게다가 미국에 대한 전반적인 국제행위의 태도를 바꾼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972년에 이르러, 군중 배외시위는20여 차례로 감소하였고, 그중 18차례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나 단지 2번만이 구체적으로 미국의 월남에서의 침략죄행을 지적한 것이다. 1973년의 군중배외 시위의 횟수는 13번으로 떨어지고 그 중 10차례는 미국을 겨냥 한 것이다. 군중배외 시위는 1974년 10회로 감소하였다; 1975년에는 6회로; 1977년에는 4차례로 감소하였고 ;1978년에는 0으로 내려갔다. 1978년1월, 월남이 소련의 지지하에서 캄보디아를 침략한 것을 규탄하는 한차례의 군중시위가 있었다. 비록 북경과 하노이의 관계가 긴박하나 ,그러나 월남이 화교를 박해하고 경시하는 것 그리고 중국영토의 침입에 대해서는 어떠한 군중시위도 없었다.
배외시위의 횟수감소는 하나의 지표가되는데, 이것으로써 우리는 북경의 배외하락을 살펴 볼 수 있다. 다른 한가지의 지표는 배외시위 규모의 감소이다. 1949년으로부터 1970년에 이르는 기간에, 최소한 10만의 사람들이 참가하는 시위 활동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50년으로부터 1952년간의 조선침략에 대한 반미 시위활동은 참가한 사람의 수만 해도 빈번히 100만을 넘었다. 1967년으로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월남침략에 대한 반미 시위의 대부분은 10만안이 넘게 참가 했다. 그러나 1971년 이후에는 어떠한 한차례의 군중시위 에 참가한 사람의 수도 10만을 넘지 않았다.
참고문헌
안경환(2003), 집회와 시위의 자유, 사람생각
이희훈(2010), 사이버 집회·시위에 대한 헌법적 고찰, 홍익대학교법학연구소
조병인(2002), 집회와 시위의 보장과 규제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병인(2003), 집회 및 시위의 보장과 규제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석흥(2000), 조선학생전위동맹의 조직과 활동, 국민대학교
장우영(2001), 사이버 시위의 규범적 한계,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4. 과학기술노조 사이버 파업 : 10.16
전국과학기술노조에 소속된 과학기술부 산하 3개 지부 임단협 공동투쟁본부에서는 10월 16일 인터넷에서 ‘사이버 파업(net-strike)’을 감행하였다. 이날 사이버 파업은 정부의 과학기술부 홈페이지(www.most.go.kr) ‘참여마당’의 ‘묻고 답하기’ 게시판에 노동조합의 요구와 과학기술부의 정책에 대한 항의의 글을 집중적으로 조합원 실명으로 올리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시한부로 진행된 사이버 파업은 과기노조 조합원들의 적극적 참여로 약 300여건의 글이 한꺼번에 과기부 홈페이지를 장식하여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과기부에 직접 전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과기부 홈페이지는 한때 갑작스런 접속량을 견디지 못해 운영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사이버 파업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자, 공투본은 10월 19일에도 기획예산처를 상대로 2차 시한부 사이버 파업을 진행했다.
5. 그 외 사례
- 아셈반대 온라인 시위(10.20)와 사이버 참여연대의 온라인 시위(11.9) 등
아셈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더욱 강화하려는 정부에 맞서 10월 20일 새사회연대, 국제노동정보센터 등으로 구성된 ‘아셈반대 민중전선’은 ‘전국민이 함께 하는 아셈반대 온라인 시위’를 주도하였다. 여기에서도 사이버 연좌시위, 항의메일 보내기, [말머리] 달기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는 11월 9일 오후 1시부터 청와대 게시판에 ‘집단소송제와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위한 온라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도 수백건의 게시물이 쏟아졌으며, 저녁 늦은 시간까지 게시물이 이어졌다. 이번 시위는 사이버 서명운동과 병행된 사이버 캠페인의 일환으로 11월 2일부터 재정경제부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벌어졌던 ‘경제개혁 게시판 물결 캠페인\'에 이어 청와대에 경제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한편, 부실기업 퇴출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설산업연맹에서도 11월 중순부터 항의메일 보내기 등 본격적인 사이버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www.kfcitu.org/onload.htm 참조)
Ⅷ. 시위와 중국 배외시위
1971년에서 1980년 기간동안의 배외의 하락은 분명히 북경의 1949년에서 1970년까지의 기간의 강경한 반미논조와 대조를 이루는데 중국은 인도지나에서 미국이 담당한 역할이 무기력 하여서 지지하는 바에 대한 저조가 1970년 이후의 국제 행위의 특징이 되었다. 이 특징은 1970년과 1971년의 파리와의 평화 회담에서 가장 먼저 보여진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중국정부는 성명을 발표 하지않고, 미국의 정책에ㅜ 대해서만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의 지적만을 발표했다. 북경은 미국이 1972년5월북월남 항만에 지뢰를 매설한 것과 아울러 미국이 1972년 하노이와 하이퐁에서 크리스마스 대폭격등, 이 두 가지 사건에서 반영하듯 북경의 이 새로운 태도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그 이후에, 「미국 침략 죄행 」을 규탄하는 언론과 군중시위는 점차 줄어들었다. 북경의 군중시위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보면, 우리는 중국이 미국의 대한 태도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먼저 1971년에 반미 군중시위 활동의 횟수는 27번이고, 그중에 11번이 월남과 관계가 있고 9번은 미국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침략죄행」을 견준 것이고 7번은 조선문제와 관계가 있고, 한번은 대만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것은 중국이 이전에 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1970년의 중국의 군중 배외시위는 총 260여 차례였고 그중249번은 미국이 월남에서의 「침략죄행」에 반대한 것이고 11번은 조선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것은 중국이 「월남에서의 미국」의 태도를 바꾼 것뿐만 아니라, 게다가 미국에 대한 전반적인 국제행위의 태도를 바꾼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972년에 이르러, 군중 배외시위는20여 차례로 감소하였고, 그중 18차례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나 단지 2번만이 구체적으로 미국의 월남에서의 침략죄행을 지적한 것이다. 1973년의 군중배외 시위의 횟수는 13번으로 떨어지고 그 중 10차례는 미국을 겨냥 한 것이다. 군중배외 시위는 1974년 10회로 감소하였다; 1975년에는 6회로; 1977년에는 4차례로 감소하였고 ;1978년에는 0으로 내려갔다. 1978년1월, 월남이 소련의 지지하에서 캄보디아를 침략한 것을 규탄하는 한차례의 군중시위가 있었다. 비록 북경과 하노이의 관계가 긴박하나 ,그러나 월남이 화교를 박해하고 경시하는 것 그리고 중국영토의 침입에 대해서는 어떠한 군중시위도 없었다.
배외시위의 횟수감소는 하나의 지표가되는데, 이것으로써 우리는 북경의 배외하락을 살펴 볼 수 있다. 다른 한가지의 지표는 배외시위 규모의 감소이다. 1949년으로부터 1970년에 이르는 기간에, 최소한 10만의 사람들이 참가하는 시위 활동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50년으로부터 1952년간의 조선침략에 대한 반미 시위활동은 참가한 사람의 수만 해도 빈번히 100만을 넘었다. 1967년으로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월남침략에 대한 반미 시위의 대부분은 10만안이 넘게 참가 했다. 그러나 1971년 이후에는 어떠한 한차례의 군중시위 에 참가한 사람의 수도 10만을 넘지 않았다.
참고문헌
안경환(2003), 집회와 시위의 자유, 사람생각
이희훈(2010), 사이버 집회·시위에 대한 헌법적 고찰, 홍익대학교법학연구소
조병인(2002), 집회와 시위의 보장과 규제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병인(2003), 집회 및 시위의 보장과 규제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석흥(2000), 조선학생전위동맹의 조직과 활동, 국민대학교
장우영(2001), 사이버 시위의 규범적 한계,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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