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이데올로기
Ⅲ.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헌법
Ⅳ.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국제화
Ⅴ.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통일정책
Ⅵ.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대외정책
1. 60년대 전후 국제정치환경
2. 제 2 공화국의 외교원칙
Ⅶ.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경제개발정책
1. 경제개발계획의 의지 표명
2. 경제개발계획의 원칙과 방침 수립
3.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Ⅷ.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언론정책
1. 언론정책
2. 언론동향
참고문헌
Ⅱ.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이데올로기
Ⅲ.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헌법
Ⅳ.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국제화
Ⅴ.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통일정책
Ⅵ.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대외정책
1. 60년대 전후 국제정치환경
2. 제 2 공화국의 외교원칙
Ⅶ.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경제개발정책
1. 경제개발계획의 의지 표명
2. 경제개발계획의 원칙과 방침 수립
3.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Ⅷ.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언론정책
1. 언론정책
2. 언론동향
참고문헌
본문내용
획의 ‘3가지 지도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전력, 석탄 등의 전략적 부문에 대한 중점적 투자를 통하여 산업기반을 구축하고,
② 유휴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국토의 개발과 고용의 확대를 꾀하고,
③ 농업생산력을 증대하여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둔다.
이러한 원칙과 방향에 따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요강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이 요강을 토대로 1961년 3월 13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부흥부 특별고문 자격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때 브리핑은 김립삼이 맡았다고 한다. 산업개발위원회에서의 토론 후 찰스 울프 박사는 3월 28일자로 부흥부 장관 태완선에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답변했다.
3.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4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정부는 외국의 전문가와 연구하여 강력하게 추진할 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천이 되면 경제계에 대변모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이 답변은 적어도 4월말에는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 측 대표가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AID를 방문하여 대한원조책임자 캐어리 과장을 만났을 때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또 민주당 정권의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은 문서화되어 1961년 5월 12일 오위영 장관이 국무회의에 보고 되었고, 동일자로 부흥부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계획의 일부 내용은 당시의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현재 1961년 5월 12일자로 발표된 장면 정부의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 원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제2공화국의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의 내용은 1961년 5월 군사정권 수립 후 건설부 시안으로 작성된 문건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따라서 제2공화국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비교하는 대부분의 논자들은 건설부안을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아직도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경제정책을 연구한 유광호는 민주당 정권의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보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을 주요 자료로 사용하였다. 이완범은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확정된 안도 없었으며 실천 준비도 없었고, 차수도 없는 중기적인 것이었다고 보았다.
박진태는 5.16 군사정변 이후 건설부 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라는 증거로서 장면 정권의 경제 고문 울프 박사의 증언과 미국측의 평가를 제시하였다. 민주당 정권의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던 김립삼도 건설부 시안이 바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후대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당시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1961년 5월 건설부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은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다. 건설부 시안의 형식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 문건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1961년 5월 건설부 내부용으로 등사판으로 인쇄한 문건이고, 1961년 7월 21일 발행한 경제조사월보 1961년 6월호에 활자화되어 발표된 문건이다. 이 두 문건을 대조한 결과 몇군데 문장과 도표 내용을 고친 것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동일하다. 경제조사월보 1961년 6월호는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건설부시안) 특집호로 간행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건설부 시안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당 정권에서 완성한 경제개발계획임을 밝힐 수에 없는 입장을 완곡하면서도 소신 있게 밝히고 있다. 즉 민주당 정권에서 완성한 경제개발계획은 투자액을 높게 책정하여 성장률을 높이면서 국민생활 수준을 향상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5.16 이후에도 근본적 변화는 필요 없다고 했다. 따라서 그대로 건설부시안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는 것이다. 비록 군사정권에 의해 수정되고 또 별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한다고 하더라도 민주장 정권에서 작업한 성과는 결코 허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경제조사월보의 편집겸 발행인은 건설부 종합기회국장 김종대였다. 김종대는 산업개발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입안 작업 실무 책임자였다. 5.16 직후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불려나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여러번 브리핑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 부의장 등은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하여 별도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던 것을 불쾌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건설부 시안에서는 첫 부분에는 5.16에 과한 언급이 첨부되어 5.16 직후 손질이 가해진 흔적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검토가 있었다면 시정되었을 사소한 착오가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착오의 발견은 오히려 과거 민주당 정권에서 작업했던 내용에 대한 수정없이 그대로 편집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군사정권에서 건설부 시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건설부 시안의 이전 정권의 산물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Ⅷ.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언론정책
1. 언론정책
- 1960.7.1. <신문 및 정당의 등록에 관한 법률>공포로 정기간행물의 등록제 실시.
2. 언론동향
-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었고 보도와 논평의 자유도 거의 무제한으로 용인
- 각종 간행물 급증 등 양적 팽창의 이면에는 무책임한 보도 등 부작용도 있었음.
참고문헌
ⅰ. 문종욱(2005), 제2공화국 헌정에 관한 연구, 정문사
ⅱ. 박유민(2010), 제 2 공화국 시기 혁신정당 통합운동과 통합의 성격, 고려대학교
ⅲ. 이미애 외 1명(2011), 제2공화국의 행정권력에 대한 소고, 한국행정사학회
ⅳ. 이병규(2010), 제2공화국 헌법상의 의원내각제, 한국비교공법학회
ⅴ. 오문환(2007), 공화주의의 시각에서 본 제2공화국의 붕괴,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ⅵ. 허동현(2004), 제2공화국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① 전력, 석탄 등의 전략적 부문에 대한 중점적 투자를 통하여 산업기반을 구축하고,
② 유휴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국토의 개발과 고용의 확대를 꾀하고,
③ 농업생산력을 증대하여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둔다.
이러한 원칙과 방향에 따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요강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이 요강을 토대로 1961년 3월 13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부흥부 특별고문 자격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때 브리핑은 김립삼이 맡았다고 한다. 산업개발위원회에서의 토론 후 찰스 울프 박사는 3월 28일자로 부흥부 장관 태완선에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답변했다.
3.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4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정부는 외국의 전문가와 연구하여 강력하게 추진할 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천이 되면 경제계에 대변모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이 답변은 적어도 4월말에는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 측 대표가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AID를 방문하여 대한원조책임자 캐어리 과장을 만났을 때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또 민주당 정권의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은 문서화되어 1961년 5월 12일 오위영 장관이 국무회의에 보고 되었고, 동일자로 부흥부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계획의 일부 내용은 당시의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현재 1961년 5월 12일자로 발표된 장면 정부의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 원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제2공화국의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의 내용은 1961년 5월 군사정권 수립 후 건설부 시안으로 작성된 문건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따라서 제2공화국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비교하는 대부분의 논자들은 건설부안을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아직도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경제정책을 연구한 유광호는 민주당 정권의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보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을 주요 자료로 사용하였다. 이완범은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확정된 안도 없었으며 실천 준비도 없었고, 차수도 없는 중기적인 것이었다고 보았다.
박진태는 5.16 군사정변 이후 건설부 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라는 증거로서 장면 정권의 경제 고문 울프 박사의 증언과 미국측의 평가를 제시하였다. 민주당 정권의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던 김립삼도 건설부 시안이 바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후대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당시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1961년 5월 건설부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은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다. 건설부 시안의 형식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 문건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1961년 5월 건설부 내부용으로 등사판으로 인쇄한 문건이고, 1961년 7월 21일 발행한 경제조사월보 1961년 6월호에 활자화되어 발표된 문건이다. 이 두 문건을 대조한 결과 몇군데 문장과 도표 내용을 고친 것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동일하다. 경제조사월보 1961년 6월호는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건설부시안) 특집호로 간행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건설부 시안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당 정권에서 완성한 경제개발계획임을 밝힐 수에 없는 입장을 완곡하면서도 소신 있게 밝히고 있다. 즉 민주당 정권에서 완성한 경제개발계획은 투자액을 높게 책정하여 성장률을 높이면서 국민생활 수준을 향상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5.16 이후에도 근본적 변화는 필요 없다고 했다. 따라서 그대로 건설부시안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는 것이다. 비록 군사정권에 의해 수정되고 또 별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한다고 하더라도 민주장 정권에서 작업한 성과는 결코 허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경제조사월보의 편집겸 발행인은 건설부 종합기회국장 김종대였다. 김종대는 산업개발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입안 작업 실무 책임자였다. 5.16 직후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불려나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여러번 브리핑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 부의장 등은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하여 별도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던 것을 불쾌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건설부 시안에서는 첫 부분에는 5.16에 과한 언급이 첨부되어 5.16 직후 손질이 가해진 흔적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검토가 있었다면 시정되었을 사소한 착오가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착오의 발견은 오히려 과거 민주당 정권에서 작업했던 내용에 대한 수정없이 그대로 편집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군사정권에서 건설부 시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건설부 시안의 이전 정권의 산물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Ⅷ.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정부)의 언론정책
1. 언론정책
- 1960.7.1. <신문 및 정당의 등록에 관한 법률>공포로 정기간행물의 등록제 실시.
2. 언론동향
-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었고 보도와 논평의 자유도 거의 무제한으로 용인
- 각종 간행물 급증 등 양적 팽창의 이면에는 무책임한 보도 등 부작용도 있었음.
참고문헌
ⅰ. 문종욱(2005), 제2공화국 헌정에 관한 연구, 정문사
ⅱ. 박유민(2010), 제 2 공화국 시기 혁신정당 통합운동과 통합의 성격, 고려대학교
ⅲ. 이미애 외 1명(2011), 제2공화국의 행정권력에 대한 소고, 한국행정사학회
ⅳ. 이병규(2010), 제2공화국 헌법상의 의원내각제, 한국비교공법학회
ⅴ. 오문환(2007), 공화주의의 시각에서 본 제2공화국의 붕괴,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ⅵ. 허동현(2004), 제2공화국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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