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연혁
Ⅲ.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사상
1. 자강론
2. 민족사관
3. 민중사관
Ⅳ.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학
Ⅴ.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문학
1. 개화기시대의 역사소설
2. 개화기 전기소설
Ⅵ.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연보
1. 1880년 12월 8일(陰曆 庚辰 11月 7日)
2. 1887년(8세)
3. 1988년(9세) - 1893년(14세)
4. 1895년(16세)
5. 1897년(18세)
6. 1898년(19세)
7. 1901년(22세)
8. 1902년(23세)
9. 1905년(26세)
10. 1906년(27세)
11. 1907년(28세)
12. 1908년(29세)
13. 1909년(30세)
14. 1910년(31세)
15. 1912년(33세)
16. 1913년(34세)
17. 1914년(35세)
18. 1915년(36세)
19. 1916년(37세)
20. 1917년(38세)
21. 1918년(39세)
22. 1919년(40세)
23. 1920년(41세)
24. 1921년(42세)
25. 1922년(43세)
26. 1923년(44세)
27. 1924년(45세)
28. 1925년(46세)
29. 1926년(47세)
30. 1927년(48세)
31. 1928년(49세)
32. 1929년(50세)
33. 1930년(51세)
34. 1931년(52세)
35. 1935년(56세)
36. 1936년(57세)
37. 1942년
38. 1943년
39. 1945년
40. 1946년
41. 1948년
42. 1955년
43. 1962년
44. 1970년
45. 1971년
46. 1972년
47. 1975년
48. 1977년
49. 1986년
Ⅶ. 결론
참고문헌
Ⅱ.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연혁
Ⅲ.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사상
1. 자강론
2. 민족사관
3. 민중사관
Ⅳ.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학
Ⅴ.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문학
1. 개화기시대의 역사소설
2. 개화기 전기소설
Ⅵ.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연보
1. 1880년 12월 8일(陰曆 庚辰 11月 7日)
2. 1887년(8세)
3. 1988년(9세) - 1893년(14세)
4. 1895년(16세)
5. 1897년(18세)
6. 1898년(19세)
7. 1901년(22세)
8. 1902년(23세)
9. 1905년(26세)
10. 1906년(27세)
11. 1907년(28세)
12. 1908년(29세)
13. 1909년(30세)
14. 1910년(31세)
15. 1912년(33세)
16. 1913년(34세)
17. 1914년(35세)
18. 1915년(36세)
19. 1916년(37세)
20. 1917년(38세)
21. 1918년(39세)
22. 1919년(40세)
23. 1920년(41세)
24. 1921년(42세)
25. 1922년(43세)
26. 1923년(44세)
27. 1924년(45세)
28. 1925년(46세)
29. 1926년(47세)
30. 1927년(48세)
31. 1928년(49세)
32. 1929년(50세)
33. 1930년(51세)
34. 1931년(52세)
35. 1935년(56세)
36. 1936년(57세)
37. 1942년
38. 1943년
39. 1945년
40. 1946년
41. 1948년
42. 1955년
43. 1962년
44. 1970년
45. 1971년
46. 1972년
47. 1975년
48. 1977년
49. 1986년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국사연구에 힘썼다. 그러한 자강주의를 담은 그의 논설의 모델은 \'대한의 희망\' 에 \'크구나 대한의 오늘의 희망이여! 아름답구나 대한의 오늘의 희망이여, 머지않아 조물주가 세 계 각 국민의 시험성적을 발표할 것이니, 우리 국민이 제1등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의 국민이 아니라 장래의 기대되는 대한의 국민상을 제시하고, 우리 국민도 타민족에 못지않게 우수하다는 민족적 긍지를 강조, \'오 우리 국민이여, 큰 일을 할 국민이 아닌가\'라고 외칠 수 있는 사상 적 거점은 자강론이었다.
그에게 근대국가의 사상적 과제는 민족국가의 원리에 따르는 민족국가 건설이기 때문에 민족적 자아의 확립이 제1의 과제로 기왕의 역사를 \'무정신의 역사로 규정\'하고, 그런 역사는 혼이 빠진 역사 요, 국사일수는 없다는 것으로 정신이 있는 역사, 즉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민족을 주체로 삼는 역사라는 국사의 규정을 제시하여 국사 속에서 자강론적 국가아의 발견에 힘쓴다.
2. 민족사관
수많은 어느 정치 운동자와는 달리 신채호는 근대 민족국가의 이념을 부여한 국사학자요, 국사연구를 기초로 해서 민족사적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했는데, 그의 근대국가의 형성을 위해서는 [1민족 1 국가]의 원리에 따르는 [내 나라 의식]의 이념이 필요하였다.
구한말 근대적 국사 인식의 유파로서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 왜곡 작업, 1920년대 이후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은 사회경제사학, 1930년대 근대적 역사학의 훈련을 받은 한국 지식인들 에 의한 실증사학이 있었으나, 이상 3유파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사의 주체로서의 민족과 그 주체적 전개 과정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공통적 약점으로 파악하고, 자강론 적 자주의지를 바탕으로 근대국가의 성립을 위하여 민족사에 대한 역사서술에 헌신한 그는 민족사적 국사연구는 단순한 역사연구에 그치지 않고, 자강주의적 대한독립을 추구하는 실천적 의지에 바탕을 둔 한국 근대 민족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역사의 단위는 민족이라고 규정, 역사가 민족의 자아를 자각케 하고 국가를 형성하고 자강할 수 있는 길임을 역설, \'민족을 빼놓고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라고 해서 세계사를 민족의 흥망과정으로 이해하려는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하고, 그의 민족사적 국사 개념은 사대주의 비판에서 확립하고, 외국사와 이에 대한 본국사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민족 본위의 역사를 구상하여 사대주의적 사관 에 대치되는 本國史를 강조한다. 동국통감, 동사강목에 싹을 보인 동국본위의 민족사적 역사인식을 근대적 국사인식에로 발전시킨다.
한민족의 我의 발견을 위해 사대주의가 정착되기 이전의 고대사 분야로 거슬러 올라가 단군신화, 화랑도, 묘청의 칭제건원론, 그밖에 고구려주의적으로 非我에 대한 我의 투쟁을 부각시켜 역사에 있어서 투쟁의 승리자가 되도록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의 경쟁 속에서 民族我의 감각적 확립을 통해 非我 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하는 자강론적인 사관을 정립한다.
자강론적 아와 비아의 투쟁사관은 기왕의 역사가들이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다룬 두 인물, 즉 묘청과 정여립을 재평가한 점이 주목을 받는데, 이 두 인물은 사대주의 사학에서는 반시대적 환상가에 불과하고, 사대적 왕조의 입장에서는 반역자에 불과하나 역사적 인물평가의 기준을 그의 반사대주의적 민족사관에 놓을 때 이 두 반역적 인물의 역사해석은 완전히 전환되며, 이와 동시에 최치원, 이퇴계등은 주자학적 통념을 뒤집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특히 최치원에 대해서는 \'한문졸업생에 불과하고, 학식은 그저 漢書나 불전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 1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純支那化하려는 것 뿐이요\'라고 그를 사대모화의 모델로 규탄하고 있다.
3. 민중사관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중국 망명지에서의 무정부주의적 혁명사 상의 영향을 받아 역사사상은 점차 자강론적 영웅사관에서 보다 진보적인 사회사관으로 옮아가고, 역사적 운동의 주체는 민족에서 민중으로 그 독립방략에 있어서도 교화, 준비론 등의 온건한 운동에서 무력 투쟁적 혁명노선과 무정부주의적인 테러리즘의 정당화에까지 관심을 보여 1923년의 朝鮮革命宣 言(일명 義烈團宣言)을 집필한다.
이 선언에서 좁은 사회 진화론적인 내셔널리즘에 무정부주의적 인류의 보편성이 가미되어 \'인류로 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자\'고 이 선언을 끝맺어 제국주의 인식을 깊이 있게 표현하고, 초기 자민족 중심의 내셔널리즘이 타민족 압박의 군국주의로 타락할 수 있는 함정을 막은 것으로 보아 후기사상이 순연한 아나키즘이 아님을 보여주며 日 帝 파시즘이 날로 독립운동의 방도를 막아버린 막다른 골목에서 유일하게 남은 독립투쟁의 혈로로 서, 즉 가능한 유일의 방법으로서 폭력(암살, 파괴, 폭동)방법을 의열단선언으로 제시해 본 것으로 이 는 또한 그의 민족사관이 민중사관에로 진보했다고 본다.
1928년 4월 중국에 망명해 있던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북경에서 회합을 가졌을 때 그는 주동 적 역할을 하여 자금 마련을 위한 그해 5월 8일 東方無政府主義聯盟의 外國爲替事件으로 여순 감옥에 서 10년형을 치르다 순국한다.
Ⅳ.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학
민족사학의 계열에 서는 역사가 중에서 위당 정인보는 중추적인 기능을 하였다. 그는 일제 관학자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왜곡과 우리 역사학자들이 줏대 없이 역사를 연구하여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였고, 여기서 그는 일제 관학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이 제기한 한사군론(漢四郡論)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위당의 역사학에서 가장 정채를 발하는 부분은 정신사적인 역사관인데, 이른바 <얼>의 사관이 그것이었다. 그이게 있어서의 <얼>은 민족정신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역사의 본질을 이 <얼>에서 찾고 있었다.
위당과 동시기에 위당의 동학(同學)으로서 민족사학의 사풍의 또 다른 일면을 개척하고 있었던 것은 민세(民世) 안재홍이었다. 민세의 고대사 연구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군조선에서 삼
그에게 근대국가의 사상적 과제는 민족국가의 원리에 따르는 민족국가 건설이기 때문에 민족적 자아의 확립이 제1의 과제로 기왕의 역사를 \'무정신의 역사로 규정\'하고, 그런 역사는 혼이 빠진 역사 요, 국사일수는 없다는 것으로 정신이 있는 역사, 즉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민족을 주체로 삼는 역사라는 국사의 규정을 제시하여 국사 속에서 자강론적 국가아의 발견에 힘쓴다.
2. 민족사관
수많은 어느 정치 운동자와는 달리 신채호는 근대 민족국가의 이념을 부여한 국사학자요, 국사연구를 기초로 해서 민족사적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했는데, 그의 근대국가의 형성을 위해서는 [1민족 1 국가]의 원리에 따르는 [내 나라 의식]의 이념이 필요하였다.
구한말 근대적 국사 인식의 유파로서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 왜곡 작업, 1920년대 이후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은 사회경제사학, 1930년대 근대적 역사학의 훈련을 받은 한국 지식인들 에 의한 실증사학이 있었으나, 이상 3유파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사의 주체로서의 민족과 그 주체적 전개 과정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공통적 약점으로 파악하고, 자강론 적 자주의지를 바탕으로 근대국가의 성립을 위하여 민족사에 대한 역사서술에 헌신한 그는 민족사적 국사연구는 단순한 역사연구에 그치지 않고, 자강주의적 대한독립을 추구하는 실천적 의지에 바탕을 둔 한국 근대 민족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역사의 단위는 민족이라고 규정, 역사가 민족의 자아를 자각케 하고 국가를 형성하고 자강할 수 있는 길임을 역설, \'민족을 빼놓고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라고 해서 세계사를 민족의 흥망과정으로 이해하려는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하고, 그의 민족사적 국사 개념은 사대주의 비판에서 확립하고, 외국사와 이에 대한 본국사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민족 본위의 역사를 구상하여 사대주의적 사관 에 대치되는 本國史를 강조한다. 동국통감, 동사강목에 싹을 보인 동국본위의 민족사적 역사인식을 근대적 국사인식에로 발전시킨다.
한민족의 我의 발견을 위해 사대주의가 정착되기 이전의 고대사 분야로 거슬러 올라가 단군신화, 화랑도, 묘청의 칭제건원론, 그밖에 고구려주의적으로 非我에 대한 我의 투쟁을 부각시켜 역사에 있어서 투쟁의 승리자가 되도록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의 경쟁 속에서 民族我의 감각적 확립을 통해 非我 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하는 자강론적인 사관을 정립한다.
자강론적 아와 비아의 투쟁사관은 기왕의 역사가들이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다룬 두 인물, 즉 묘청과 정여립을 재평가한 점이 주목을 받는데, 이 두 인물은 사대주의 사학에서는 반시대적 환상가에 불과하고, 사대적 왕조의 입장에서는 반역자에 불과하나 역사적 인물평가의 기준을 그의 반사대주의적 민족사관에 놓을 때 이 두 반역적 인물의 역사해석은 완전히 전환되며, 이와 동시에 최치원, 이퇴계등은 주자학적 통념을 뒤집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특히 최치원에 대해서는 \'한문졸업생에 불과하고, 학식은 그저 漢書나 불전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 1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純支那化하려는 것 뿐이요\'라고 그를 사대모화의 모델로 규탄하고 있다.
3. 민중사관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중국 망명지에서의 무정부주의적 혁명사 상의 영향을 받아 역사사상은 점차 자강론적 영웅사관에서 보다 진보적인 사회사관으로 옮아가고, 역사적 운동의 주체는 민족에서 민중으로 그 독립방략에 있어서도 교화, 준비론 등의 온건한 운동에서 무력 투쟁적 혁명노선과 무정부주의적인 테러리즘의 정당화에까지 관심을 보여 1923년의 朝鮮革命宣 言(일명 義烈團宣言)을 집필한다.
이 선언에서 좁은 사회 진화론적인 내셔널리즘에 무정부주의적 인류의 보편성이 가미되어 \'인류로 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자\'고 이 선언을 끝맺어 제국주의 인식을 깊이 있게 표현하고, 초기 자민족 중심의 내셔널리즘이 타민족 압박의 군국주의로 타락할 수 있는 함정을 막은 것으로 보아 후기사상이 순연한 아나키즘이 아님을 보여주며 日 帝 파시즘이 날로 독립운동의 방도를 막아버린 막다른 골목에서 유일하게 남은 독립투쟁의 혈로로 서, 즉 가능한 유일의 방법으로서 폭력(암살, 파괴, 폭동)방법을 의열단선언으로 제시해 본 것으로 이 는 또한 그의 민족사관이 민중사관에로 진보했다고 본다.
1928년 4월 중국에 망명해 있던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북경에서 회합을 가졌을 때 그는 주동 적 역할을 하여 자금 마련을 위한 그해 5월 8일 東方無政府主義聯盟의 外國爲替事件으로 여순 감옥에 서 10년형을 치르다 순국한다.
Ⅳ.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학
민족사학의 계열에 서는 역사가 중에서 위당 정인보는 중추적인 기능을 하였다. 그는 일제 관학자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왜곡과 우리 역사학자들이 줏대 없이 역사를 연구하여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였고, 여기서 그는 일제 관학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이 제기한 한사군론(漢四郡論)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위당의 역사학에서 가장 정채를 발하는 부분은 정신사적인 역사관인데, 이른바 <얼>의 사관이 그것이었다. 그이게 있어서의 <얼>은 민족정신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역사의 본질을 이 <얼>에서 찾고 있었다.
위당과 동시기에 위당의 동학(同學)으로서 민족사학의 사풍의 또 다른 일면을 개척하고 있었던 것은 민세(民世) 안재홍이었다. 민세의 고대사 연구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군조선에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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