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족보의 역사
1. 한국 성관의 유래와 특징
1) 한국의 성씨제도
2) 한국적 성관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
2. 양반사회의 발달과 족보
1) 15세기 이전의 족보
2) 조선전기의 족보
3) 17세기후반 이후의 족보
Ⅲ. 족보의 의의
Ⅳ. 족보의 용어
1. 시조 비조 중시조
2. 선계와 세계
3. 세와 대
Ⅴ. 성씨제도와 족보
Ⅵ. 성씨제도와 중국
Ⅶ. 성씨제도와 외국 성씨제도
Ⅷ. 성씨제도의 한국 중국 비교
Ⅸ. 결론
참고문헌
Ⅱ. 족보의 역사
1. 한국 성관의 유래와 특징
1) 한국의 성씨제도
2) 한국적 성관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
2. 양반사회의 발달과 족보
1) 15세기 이전의 족보
2) 조선전기의 족보
3) 17세기후반 이후의 족보
Ⅲ. 족보의 의의
Ⅳ. 족보의 용어
1. 시조 비조 중시조
2. 선계와 세계
3. 세와 대
Ⅴ. 성씨제도와 족보
Ⅵ. 성씨제도와 중국
Ⅶ. 성씨제도와 외국 성씨제도
Ⅷ. 성씨제도의 한국 중국 비교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本貫)이다. 우리민족의 성씨제도란 성과 본관으로 구성된 성관체제를 이르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성이 같으면 혈족이지만, 우리민족은 원칙적으로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혈족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성씨는 본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성 그 자체보다도 본관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관이란 간단히 말하면 그 성씨의 시조나 조상이 살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 본관으로 구성된 성관체제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고려 초이다. 성이 왕실과 귀족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던 신라에서는 성만으로도 가계와 혈통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신라하대를 거치면서 이들의 성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혈연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면서 가계와 혈통은 물론 신분조차 판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려 초에 본관이 필요했던 객관적인 조건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통일사업을 완수한 후 공신들과 고급관료, 통일사업에 협조했던 호족들에게 그들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내리는 한편, 전국 군현을 개편하여 각 구획에 토착하고 있던 유력층에게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성을 나누어 주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각 읍 성씨조는 고려초 토성분정 이후 15세기까지 성씨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약 250여 성과 4,500여 본관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성씨의 수는 15세기와 마찬가지로 대략 250여개이지만, 본관은 약 1,100여개가 줄어든 3,400여개로 파악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5세기까지도 전인구의 40-50%는 성이 없는 무성층이었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점차 성을 취득하게 된다.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무성층이 성을 새롭게 취득했는데도 이와 무관하게 성씨의 수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천민층의 성씨취득이 새로운 성씨의 창출과 무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250여개의 성 중에서 김, 이, 박, 최, 정 등 5대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반면에 159개의 성을 사용하는 인구는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성의 편중현상이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성을 새롭게 취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성씨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사용되고 있던 유명 성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Ⅸ. 결론
족보라 함은 모든 보첩(譜諜)을 통틀어 지칭(指稱)하는 대명사(代名詞)이며 동일씨족(同一氏族)의 관향(貫 鄕)을 중심으로 시조(始祖)이하 동족(同族)의 발원(發源)에 대한 사적(史蹟)과 선조(先祖)로부터 본인에 이르기까지 명(名). 휘(諱). 호(號)를 사략(事略)을 상세히 수록(手錄)하여 종족(宗族)의 근원(根源)을 밝히고 자랑스런 선조(先祖)의 행적(行蹟)과 동족간(同族間)의 소목(昭穆)을 알려 화애돈목(和愛敦睦)함을 목적으로 편 수(編修)한 보첩(譜諜)을 말함. 즉 보첩이란 한 종족(種族)의 계통을 부계(父系)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동일혈족(同一 血族)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家統)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참고문헌
1. 권오영(2010), 조선시대의 족보기록에 보이는 유교이념의 양상과 의미, 한국계보연구회
2. 이성무(2010)한국의 성씨와 족보, 한국계보연구회
3. 장인진(1994), 족보자료의 문헌학적 고찰, 계명한문학회
4. 차장섭(2010), 조선시대 족보의 유형과 특징, 역사교육학회
5. Hwang Kyung-Moon(2010), 사회윤리를 반영해 온 \'계보\'들의 의미 : 한국사 속의 족보, 한국계보연구회
6. Miyajima Hiroshi(2012),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국 족보, 성균관대학교
본관이란 간단히 말하면 그 성씨의 시조나 조상이 살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 본관으로 구성된 성관체제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고려 초이다. 성이 왕실과 귀족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던 신라에서는 성만으로도 가계와 혈통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신라하대를 거치면서 이들의 성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혈연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면서 가계와 혈통은 물론 신분조차 판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려 초에 본관이 필요했던 객관적인 조건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통일사업을 완수한 후 공신들과 고급관료, 통일사업에 협조했던 호족들에게 그들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내리는 한편, 전국 군현을 개편하여 각 구획에 토착하고 있던 유력층에게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성을 나누어 주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각 읍 성씨조는 고려초 토성분정 이후 15세기까지 성씨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약 250여 성과 4,500여 본관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성씨의 수는 15세기와 마찬가지로 대략 250여개이지만, 본관은 약 1,100여개가 줄어든 3,400여개로 파악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5세기까지도 전인구의 40-50%는 성이 없는 무성층이었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점차 성을 취득하게 된다.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무성층이 성을 새롭게 취득했는데도 이와 무관하게 성씨의 수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천민층의 성씨취득이 새로운 성씨의 창출과 무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250여개의 성 중에서 김, 이, 박, 최, 정 등 5대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반면에 159개의 성을 사용하는 인구는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성의 편중현상이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성을 새롭게 취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성씨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사용되고 있던 유명 성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Ⅸ. 결론
족보라 함은 모든 보첩(譜諜)을 통틀어 지칭(指稱)하는 대명사(代名詞)이며 동일씨족(同一氏族)의 관향(貫 鄕)을 중심으로 시조(始祖)이하 동족(同族)의 발원(發源)에 대한 사적(史蹟)과 선조(先祖)로부터 본인에 이르기까지 명(名). 휘(諱). 호(號)를 사략(事略)을 상세히 수록(手錄)하여 종족(宗族)의 근원(根源)을 밝히고 자랑스런 선조(先祖)의 행적(行蹟)과 동족간(同族間)의 소목(昭穆)을 알려 화애돈목(和愛敦睦)함을 목적으로 편 수(編修)한 보첩(譜諜)을 말함. 즉 보첩이란 한 종족(種族)의 계통을 부계(父系)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동일혈족(同一 血族)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家統)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참고문헌
1. 권오영(2010), 조선시대의 족보기록에 보이는 유교이념의 양상과 의미, 한국계보연구회
2. 이성무(2010)한국의 성씨와 족보, 한국계보연구회
3. 장인진(1994), 족보자료의 문헌학적 고찰, 계명한문학회
4. 차장섭(2010), 조선시대 족보의 유형과 특징, 역사교육학회
5. Hwang Kyung-Moon(2010), 사회윤리를 반영해 온 \'계보\'들의 의미 : 한국사 속의 족보, 한국계보연구회
6. Miyajima Hiroshi(2012),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국 족보, 성균관대학교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