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역사와 문화 - 화순군 [和順郡, Hwasun-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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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높이가 3m 정도이고 폭이 좁은 편이다. 옹성산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편축으로 이어지다가 잘록한 허리가 형성되어 있고, 거기서부터 다시 동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협축으로 축조하였다. 북벽 중간의 허리부분에서는 사방이 잘 내려다보이는데 망루로 보이는 시설물이 남아 있다.
동북쪽 암봉 사이의 작은 계곡을 따라 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계곡을 차단하는 성벽이 있다. 이 차단벽은 동북쪽 암봉 사이의 계곡을 막은 1차적 방어시설로
높이 2m 정도인데 6∼7단으로 축조하였다.
성 안에는 문지(門址) 시설이 남아 있다. 동문지는 동북쪽 암봉과 동남쪽 암봉을 연결하는 성벽의 중간으로서 해발 350m 지점이고, 남문지는 남벽과 동남쪽 암봉 사이에 있는데 해발 340m 지점이다. 그 밖에 건물지 세 곳이 있는데 동북쪽 건물지의 중앙에 우물이 있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회청색 경질 기와편과 회청색 경질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내가 철옹산성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특이한 옹구모양의 산성이라는 점과 일부가 붕괴 되었
지만 보전이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유적들은 훼손이 되면 보기 힘들다지만 이 철옹
산성의 경우에는 예전에 산성이었다는 것을 표시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한 점에서는 산성으로써의 가치와 후손에게 남겨두어도 좋을 만한 것이다.
●포곡식: 성 내에 계곡을 포함하는 형식으로 계곡과 주변의 산세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둘렀기 때문에 성내에 수원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을 뿐 아니라 외부에 노출을 방지해
주기도 한다.
●협축법: 성벽 외부를 돌로 쌓는 방법 ●편축법: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워 넣음
●암봉: 능선에서 마주치는 하나의 뾰족한 바위 탑 ●문지: 문이 있었던 곳
●건물터: 어떠한 건물이 세워졌던 땅
화순 적벽 [和順赤壁]
전라남도 화순군 창랑천 주위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경승지(景勝地).
지정번호 전남기념물 제60호 지정연도 1979년 8월 3일
소재지 전남화순군 이서면 장항리 일원
면적 389,017㎡ 분류 경승지
안개가 걷히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신비하였습니다.
시퍼런 강물, 깎아지른 절벽, 그 틈 사이에 있는 암자가 보인다.
가뭄으로 물이 빠진 적벽의 거의 전 모습을 볼 수 있다.
1979년 8월 3일 전라남도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화순적벽은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 약 7km에 걸쳐 발달한 크고 작은 수려한 절벽의 경관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복댐 상류에 있는 노루목 적벽과 물염 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이 있다.
노루목 적벽은 동복댐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 수려한 자연경관과 웅장함, 그리고 위락 공간으로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 중이던 명유(名儒)인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하며, 그뒤 많은 풍류(風流)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러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물염적벽은 규모나 풍치면에서 노루목 적벽에 미치지 못하지만 건너편 언덕 위에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이 있어 위락공간으로 이름이 높다. 보산적벽은 노루목에서 서쪽으로 약 600m 거리에 있는 보산리의 북쪽 계류가에 형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으나 수량이 풍부하였다. 창랑적벽은 창랑리에 있는데, 높이 약 40m에 길이가 100m 가량 이어진 절벽군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적벽은 동복댐 보호구역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1996년 12월에 개설된 임로(林路)로 한결 쉽게 찾을 수 있다. 적벽 앞에는 망미정, 보안사지 석탑, 망향정 등이 있다.
적벽을 보면서 그 웅장함에 한 번 놀라고 절벽의 섬세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가히 기념물로 지정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여긴다.
주변의 경치와 적벽이 한데 어울려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과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러한 적벽들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게 하였다.
●노루목 적벽: 화순 적벽의 다른 말.
●풍치: 훌륭하고 멋진 경치.
●풍류: 우아하고 멋스러운 정취(情趣). 본래 선인(先人)들, 특히 성현(聖賢)들의 유풍(遺風) ·전통을 말하였으나, 점차 고상한 아취(雅趣) ·멋스러움을 말하게 되었다.
●계류: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
●임로: 나무길
★인물들
최산두 [崔山斗, 1483 ~ ?]
조선 전기의 문신. 초계 최씨의 시조. 1513년 병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후에 사간, 지평을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1519년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되었다. 1533년 풀려났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윤구, 유성춘 등과 함께 호남의 3걸(傑)로 알려졌다.
초계최씨(草溪崔氏)의 시조. 자 경앙(景仰). 호 신재(新齋). 1504년(연산군 10) 생원(生員)이 되고 1513년(중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수찬(修撰)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후에 사간(司諫) ·지평(持平)을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동복(同福:和順)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풀려난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윤구(尹衢) ·유성춘(柳成春) 등과 함께 호남의 3걸(傑)로 알려졌다.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배향되었다.
양팽손 [梁彭孫, 1488~1545]
조선 전기의 학자로 중종 때 정언 ·교리를 지내고 기묘사화로 삭직되었다. 복관되어 용담현령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본관 제주(濟州). 자 대춘(大春). 호 학포(學圃). 시호 혜강(惠康).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을 거쳐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519년 교리(校埋)로 재직 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뒤 복관(復官)되어, 1544년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글씨를 잘 썼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능주(綾州)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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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6
  • 저작시기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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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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