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위대한 클리셰
2. GONZO의《巖窟王》- 스토리 라인
3. 번역자로서의 GONZO
4. 결언
참고 자료
2. GONZO의《巖窟王》- 스토리 라인
3. 번역자로서의 GONZO
4. 결언
참고 자료
본문내용
관계에 의해 성립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22막에서는 스스로를 운명의 톱니바퀴의 하나라고 표현한다. 극 초반부에 의지로서 운명을 개척한다는 말을 알베르를 속이기 위한 가면으로 생각할 만큼, 백작의 주의는 확고한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하나는 프란츠가 말해준 主意主義적 인식의 세계이다. 12막에서 외제니는 프란츠로부터 자기 자신을 잃지 말고 자신이 찾는 진실을 응시할 것을 당부 받는다. 실제로 프란츠는 주인공인 알베르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며 스스로가 인식하는 바를 증명하는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단테스는 알베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그의 주변 세계로 침입한다. (우연과 인과의 조작) 그럼으로써, 자신이 겪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알베르에게도 느끼게 하려고 한다. 동시에 그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이미지와 사려 깊고 지혜로운 행동으로 그가 말하는 절대적 인과율의 세계에 알베르가 무의식중에 편입되도록 조장한다. 프란츠는 극 중 내내 그것을 못마땅해 하고 말리지를 못하나, 죽을 것이 분명한 결투에 알베르 대신 나가는 죽는 것으로, 알베르를 각성시키는데 성공한다. 13막에서 에데는 백작이 자신에게 “너 자신의 의지대로 네가 바라는 바를 하면 된다.” 고 말해준 일을 알베르에게 말해준다. 그에 대해 알베르는 감명 받은 인상을 주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프란츠의 언행은 알베르의 정신적인 향상에 있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알베르는 단테스와 페르낭의 싸움에서도 둘 모두를 자기 합리화의 모순이라고 비판할 만큼,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원작『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복수의 허망함을 깨닫는 에드몽 단테스의 깨우침을 말하고 있다면,《암굴왕》은 순진하고 미숙했던 알베르 에레라 에레라는 메르세데스의 성이다. 또한 순진하고 미숙하다는 말은 그를 지켜본 암굴왕의 말이기도 하다.
의 영혼이 인격적 완성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암굴왕》은 에드몽 단테스라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안타고니스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번안인 것이다. 그리고《암굴왕》이라는 기묘한 번역이 나온 것은, 憑依라는 동양적인 소재를 통해, 단테스의 행위에 상당한 변화를 주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개연성을 불어넣는 것에서부터 가능했었던 것이다.
4. 결언
발터 벤야민은 “하나의 번역이 어느 정도 이러한 형식의 본질에 상응할 수 있는가는, 객관적으로 원문의 번역가능성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반성완 편역,『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8, p.332
고 말한바 있다. 이 진술은 미디어 번역에 있어서도 일정부분 통용되는 것이 있는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무의식 속 이미지 형상화에 고정된 이미지의 영상 텍스트가 이길 수 없다는 전제하에, 모든 문자텍스트 원작의 영화는 원작을 넘는 평가를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하다. 여기에서 글보다 이모티콘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이는 귀여니의 소설과 그것을 영상화 한 영화는 논외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주어진 텍스트를 그대로 충실히 옮긴 것은 번역으로서 가치는 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미디어에 걸 맞는 서사 변용과 장면 배치, 그리고 주제 의식의 발현 형태 등등에 의해 수용자에게 있어 서사의 흡인력이 발생하느냐 마느냐에, 그리고 미디어가 가질 수 있는 감각과 표현의 묘를 살린 미디어 번역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밝혔듯,『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번역가능성이 넓은 범위에 걸쳐 있고, 또 그만큼 많은 국가에서 많은 매체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이 작품이 골자를 유지하더라도 문화적 차이에서는 크게 상이하지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임을 의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巖窟王》은 시대를 뛰어넘은 원작의 초월 번역은 아닐지라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무제한의 매체를 통해 전과 다른 새로운 번역의 가능성을 보여준 미디어 번역의 예시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알렉상드르 뒤마,『몽테크리스토 백작』, 김성호 옮김, 청목, 1994.
발터 벤야민,〈번역가의 과제〉,반성완 편역,『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1988.
김복순,『1910년대 한국문학과 근대성』, 소명 출판, 1999.
박진영,〈1910년대 번안소설과 ‘정탐 소설’의 매혹>, 《대동문화연구》제 52집.
마에다 마히로,《巖窟王》, GONZO-MEDIA FACTORY 제작, 2004년, TV 아사히 방영.
(한국에서는 2005년, 케이블 채널 ANIMAX에서 방영.)
다른 하나는 프란츠가 말해준 主意主義적 인식의 세계이다. 12막에서 외제니는 프란츠로부터 자기 자신을 잃지 말고 자신이 찾는 진실을 응시할 것을 당부 받는다. 실제로 프란츠는 주인공인 알베르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며 스스로가 인식하는 바를 증명하는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단테스는 알베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그의 주변 세계로 침입한다. (우연과 인과의 조작) 그럼으로써, 자신이 겪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알베르에게도 느끼게 하려고 한다. 동시에 그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이미지와 사려 깊고 지혜로운 행동으로 그가 말하는 절대적 인과율의 세계에 알베르가 무의식중에 편입되도록 조장한다. 프란츠는 극 중 내내 그것을 못마땅해 하고 말리지를 못하나, 죽을 것이 분명한 결투에 알베르 대신 나가는 죽는 것으로, 알베르를 각성시키는데 성공한다. 13막에서 에데는 백작이 자신에게 “너 자신의 의지대로 네가 바라는 바를 하면 된다.” 고 말해준 일을 알베르에게 말해준다. 그에 대해 알베르는 감명 받은 인상을 주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프란츠의 언행은 알베르의 정신적인 향상에 있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알베르는 단테스와 페르낭의 싸움에서도 둘 모두를 자기 합리화의 모순이라고 비판할 만큼,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원작『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복수의 허망함을 깨닫는 에드몽 단테스의 깨우침을 말하고 있다면,《암굴왕》은 순진하고 미숙했던 알베르 에레라 에레라는 메르세데스의 성이다. 또한 순진하고 미숙하다는 말은 그를 지켜본 암굴왕의 말이기도 하다.
의 영혼이 인격적 완성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암굴왕》은 에드몽 단테스라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안타고니스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번안인 것이다. 그리고《암굴왕》이라는 기묘한 번역이 나온 것은, 憑依라는 동양적인 소재를 통해, 단테스의 행위에 상당한 변화를 주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개연성을 불어넣는 것에서부터 가능했었던 것이다.
4. 결언
발터 벤야민은 “하나의 번역이 어느 정도 이러한 형식의 본질에 상응할 수 있는가는, 객관적으로 원문의 번역가능성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반성완 편역,『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8, p.332
고 말한바 있다. 이 진술은 미디어 번역에 있어서도 일정부분 통용되는 것이 있는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무의식 속 이미지 형상화에 고정된 이미지의 영상 텍스트가 이길 수 없다는 전제하에, 모든 문자텍스트 원작의 영화는 원작을 넘는 평가를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하다. 여기에서 글보다 이모티콘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이는 귀여니의 소설과 그것을 영상화 한 영화는 논외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주어진 텍스트를 그대로 충실히 옮긴 것은 번역으로서 가치는 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미디어에 걸 맞는 서사 변용과 장면 배치, 그리고 주제 의식의 발현 형태 등등에 의해 수용자에게 있어 서사의 흡인력이 발생하느냐 마느냐에, 그리고 미디어가 가질 수 있는 감각과 표현의 묘를 살린 미디어 번역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밝혔듯,『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번역가능성이 넓은 범위에 걸쳐 있고, 또 그만큼 많은 국가에서 많은 매체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이 작품이 골자를 유지하더라도 문화적 차이에서는 크게 상이하지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임을 의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巖窟王》은 시대를 뛰어넘은 원작의 초월 번역은 아닐지라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무제한의 매체를 통해 전과 다른 새로운 번역의 가능성을 보여준 미디어 번역의 예시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알렉상드르 뒤마,『몽테크리스토 백작』, 김성호 옮김, 청목, 1994.
발터 벤야민,〈번역가의 과제〉,반성완 편역,『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1988.
김복순,『1910년대 한국문학과 근대성』, 소명 출판, 1999.
박진영,〈1910년대 번안소설과 ‘정탐 소설’의 매혹>, 《대동문화연구》제 52집.
마에다 마히로,《巖窟王》, GONZO-MEDIA FACTORY 제작, 2004년, TV 아사히 방영.
(한국에서는 2005년, 케이블 채널 ANIMAX에서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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