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5 18광주민주화운동(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중항쟁)
Ⅲ. 10 18마산민주화운동(10 18마산민주항쟁)
Ⅳ. 2 28대구민주운동(2 28대구민주의거)
Ⅴ.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
참고문헌
Ⅱ. 5 18광주민주화운동(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중항쟁)
Ⅲ. 10 18마산민주화운동(10 18마산민주항쟁)
Ⅳ. 2 28대구민주운동(2 28대구민주의거)
Ⅴ. 6월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
참고문헌
본문내용
과제\"에서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한겨레, 1996. 4. 2). 즉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정희시대를 총체적으로 마감하는 박정희 죽음의 직전에 일어난 10.18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부마 민중항쟁은 박정희시대의 상황의 모순이 결집되어 발생한 것으로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만일 10.18 민주 항쟁이 해석된다면 바로 박정희시대의 전반적인 사회흐름을 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마산 지역에서 발생한 생생한 역사적인 경험인 10.18 마산 민주항쟁을 이해함으로써 지역민의 사회적인 조건과 역사적인 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계나 지역의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역사에 대해 애써 무시해 왔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에서도 부마사태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부마사태\'라고 불리우는 부마 민중항쟁만큼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면서도,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도 드물 것이다\"(한국 기독교 협의회인권위원회, 1987: 1762). 즉 저널리즘적인 보도가 신문(1988년 한겨레)이나 월간지(신동아 1985년 5월호; 월간 조선 1985년 5, 6월호)에 기사화된 것과 부마민중항쟁 기념사업회가 펴낸 자료집은 있으나, 이를 사회학적 연구대상으로 평가한 것은 없다. 이는 3.15기념사업회가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기념사업의 현실이나, 마산지역이 민주화의 오랜 근거지였다는 마산시민들의 자부심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의아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지역민의 정체 의식속에 내재해 있는 1960년의 3.15, 1979년의 10.18 등의 역사적 경험은 이제 다시 드러내어져서 변화된 사회속에 사는 시민들의 삶속에 재침투되기 위해서도 재해석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데모를 주동한 대학생층은 시위를 촉발하였고 여기에 주로 룸펜 프로레타리아트라고 부를 수 있는 광범위한 부동층의 참여가 시위의 대규모화에 기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남부희도 \"마산민중항쟁은 학생만이 아닌 시민전체의 항쟁으로서 진실과 정의의 굳센 물결이 어둠의 장막을 걷고 자유과 민주를 향한 뜨거운 합창이었다\"(한겨레, 88. 10. 19)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학생이 주동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참여는 시민전체가 참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기는 유신독재체제의 억압적인 상황이라고 표현되어 있지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마산민주항쟁은 2일 정도의 소요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짧은 기간의 소요였지만 인근에서 발생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부산항쟁보다도 훨씬 과격하였다고 알려진다. \"마산사태가 부산보다 격렬하였고 밤에는 무법천지였다고 하나 세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다\"(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 1767). 또한 군사재판 회부자가 부산은 43명이었던데 반해, 인구가 1/10정도에 불과한 마산은 46명이었다는 점도 증거로 제시된다. 시민전체가 참여하였지만 격렬한 시위였다는 두가지 점은 시위가
또한 마산 지역에서 발생한 생생한 역사적인 경험인 10.18 마산 민주항쟁을 이해함으로써 지역민의 사회적인 조건과 역사적인 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계나 지역의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역사에 대해 애써 무시해 왔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에서도 부마사태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부마사태\'라고 불리우는 부마 민중항쟁만큼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면서도,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도 드물 것이다\"(한국 기독교 협의회인권위원회, 1987: 1762). 즉 저널리즘적인 보도가 신문(1988년 한겨레)이나 월간지(신동아 1985년 5월호; 월간 조선 1985년 5, 6월호)에 기사화된 것과 부마민중항쟁 기념사업회가 펴낸 자료집은 있으나, 이를 사회학적 연구대상으로 평가한 것은 없다. 이는 3.15기념사업회가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기념사업의 현실이나, 마산지역이 민주화의 오랜 근거지였다는 마산시민들의 자부심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의아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지역민의 정체 의식속에 내재해 있는 1960년의 3.15, 1979년의 10.18 등의 역사적 경험은 이제 다시 드러내어져서 변화된 사회속에 사는 시민들의 삶속에 재침투되기 위해서도 재해석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데모를 주동한 대학생층은 시위를 촉발하였고 여기에 주로 룸펜 프로레타리아트라고 부를 수 있는 광범위한 부동층의 참여가 시위의 대규모화에 기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남부희도 \"마산민중항쟁은 학생만이 아닌 시민전체의 항쟁으로서 진실과 정의의 굳센 물결이 어둠의 장막을 걷고 자유과 민주를 향한 뜨거운 합창이었다\"(한겨레, 88. 10. 19)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학생이 주동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참여는 시민전체가 참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기는 유신독재체제의 억압적인 상황이라고 표현되어 있지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마산민주항쟁은 2일 정도의 소요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짧은 기간의 소요였지만 인근에서 발생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부산항쟁보다도 훨씬 과격하였다고 알려진다. \"마산사태가 부산보다 격렬하였고 밤에는 무법천지였다고 하나 세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다\"(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 1767). 또한 군사재판 회부자가 부산은 43명이었던데 반해, 인구가 1/10정도에 불과한 마산은 46명이었다는 점도 증거로 제시된다. 시민전체가 참여하였지만 격렬한 시위였다는 두가지 점은 시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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