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 또한 조선 급진주의운동의 파벌간 세력판도에도 뚜렷한 변화를 초래했는데. 1차 조공은 비록 파벌연합의 산물이었다고는 하지만 화요회가 가장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이같은 경향은 2차 조공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실상 다른 파벌의 입장에서 볼 때 화요회의 독주는 파벌투쟁의 근본 원인이었다. 그러나 6·10 만세사건으로 화요회가 붕괴되자 그와 함께 공산주의운동의 세력균형 또한 무너지게 된다.
③ 제3차 조선공산당
결성 : 후계당 조직을 위한 최초의 시도는 검거를 모면한 김철수와 그의 몇몇 동지들에 의해 1926년 9월에 이루어졌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김철수,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으로 이어지는 책임비서 시대를 말하며 마르크스·레닌당, 즉 ML당이라 한다.
- 김철수의 시대 : 본래 상해파로 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었던 김철수는 어떤 이유인지 체포를 모면했고 1926년 9월 2일에 서울에서 오희선, 고광수, 원우관 등과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당 조직의 확대를 위해 동경회의 「일월회」간부 및 서울파를 포섭하였다. 김철수는 조선공산당 재건의 조직방침을 파벌주의의 지양과 파벌 규합에 두고, 당원을 주로 서울청년회파의 조직에서 구하게 되었다. 김철수는 12월 중순경 코민테른 당국에 보고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떠나서 같은 상해파인 박진순의 통역 덕분에 김찬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김철수에 의한 제3차 당조직은 코민테른의 승리를 얻었으며 11개항의 지령을 하달받았다, 그리고 김찬 등의 상해 해외부는 코민테른의 지령에 의하여 폐지되게 된다.
- 안광천의 시대 : 1926년 12월 6일 2차 당대회는 최근 동경에서 귀국한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로운 당지도부를 승인했다. ‘정우회 선언 정우회는 1926년 4월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의 4단체 합동위원회에 의하여 발족된 공산주의 단체이다. 특히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진영과의 협동전선을 제창하여 신간회 결성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의 실세였던 화요회의 주도하에 조직됨으로써 합법 공산주의단체 가운데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정우회선언은 특히 민족주의 진영과의 제휴를 주창하며 획기적인 ‘방향전환론’으로 전체 공산주의 진영의 운동노선으로 채택되어 신간회 탄생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의 작성자로 유명한 안광천은 동경유학생 출신이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 때문에 표면활동이 가능하였고 따라서 당조직을 지하 깊숙이 확보하는데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책임비서로 재임했던 1927년 9월 20일경까지의 10개월 동안에 조선공산당 조직은 국내외를 통해 상당한 진적을 보았다. 특히 김준연, 김세연의 도움으로 일본내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활발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준연의 시대 : 안광천에 대체하여 약 1개월동안 책임비서직을 인계받은 김준연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그는 편집국장으로서의 직무에 대해 일제의 추적과 취조를 받게 되자 책임비서직을 사임하고, 뒷일을 양명에게 일임하였다.
- 김세연의 시대 : 1927년 11월 12일경 후계당 조직을 위임받은 양명은 김세연을 책임비서로 선정하고 후계 간부를 조직하게 하였다. 김세연당의 중앙간부는 양명과 최익한이었으며 당정책의 중심과제는 파쟁청산과 방향전환의 실천이었다. 이 당은 1927년 11월 최익한을 동경으로 보내 코민테른으로부터 일화 3,300엥의 보조금을 받았다. 김세연 책임비서 시대는 비록 2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코민테른으로부터 자금뿐만 아니라 지령하달 등으로 그 관계가 긴밀했다.
조선공산청년회 : 화요계인 고강수가 김철수의 각파 규합방침에 복종하여 <서울청년회>의 정예분자들과 합동하는 형식으로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1926년 12월 중순에 북경유학생이면서 일월회계도 서울파도 아니던 양명이 책임비서직을 인계받았으나 일월회도 서울파도 아니어서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조기에 퇴진하게 된다. 제3 대 책임비서는 일월회 간부였던 하필원으로 안광천과 함께 방향전환론을 내걸었던 자이다. 당 책임비서 김준연의 퇴진과 함께 물러났으며 제4대 책임비서는 김철로 이어진다.
해체 : 파벌투쟁이 가열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잇던 공산주의자들이 경우에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경찰에 제공했다고 믿을만한 근거로 미루어 보아 의도적이진 않았다 해도 운동권 내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많은 비밀이 누설되었다. 물론 3차 조공의 출범 당시부터 경찰은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1926년 9월 당중앙집행위원회 결성이 있은 지 몇 주 후 경찰은 이 움직임을 포착했고, 1928년 2월 3차 당원 다수를 일제히 검거한 경찰은 조사를 진행함에 따라 마침내 4월에는 공산당원의 대부분 역시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평가 : 1년 5개월의 수명을 지녔던 2차에 걸친 조선공산당 검거로 인하여 지도력이 열약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폭을 확대해나갔다. 조선노동총동맹의 기능분립(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립), 조선총동맹의 강화, 사상단체의 통합과 정치투쟁으로의 집중 등 상당한 투쟁을 벌였으며 민족진영에 파고들어 범 국민당으로서의 <신간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를 등장시키기 위하여 일익을 담당한 것은 전환기의 이론과 정치투쟁의 결과였다.
④ 제4차 조선공산당
결성 :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 1928년 2월 27일, 28일에 제3차 당대회를 개최하면서 제4차 조선공산당은 시작된다. 제3차 당대회에서는 그동안 미비했던 점들을 보강하여 새로운 당칙을 제정하였는데 입당절차를 보다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이는 파쟁관계로 당내 사정이 복잡하였고, 경찰의 대검거를 당했던 쓰라린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1928년 3월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책임비서로 임명된 차금봉은 노동자 출신으로서「조선노동공제회」안에서 인텔리 배격을 주장하며 정통파를 자처했던 자였다.
활동 : 제4차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추적으로부터 당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각 도간부를 개선했으며 해외조직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북경에는 새로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신간회와 근우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단체 안에도 푸락
③ 제3차 조선공산당
결성 : 후계당 조직을 위한 최초의 시도는 검거를 모면한 김철수와 그의 몇몇 동지들에 의해 1926년 9월에 이루어졌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김철수,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으로 이어지는 책임비서 시대를 말하며 마르크스·레닌당, 즉 ML당이라 한다.
- 김철수의 시대 : 본래 상해파로 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었던 김철수는 어떤 이유인지 체포를 모면했고 1926년 9월 2일에 서울에서 오희선, 고광수, 원우관 등과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당 조직의 확대를 위해 동경회의 「일월회」간부 및 서울파를 포섭하였다. 김철수는 조선공산당 재건의 조직방침을 파벌주의의 지양과 파벌 규합에 두고, 당원을 주로 서울청년회파의 조직에서 구하게 되었다. 김철수는 12월 중순경 코민테른 당국에 보고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떠나서 같은 상해파인 박진순의 통역 덕분에 김찬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김철수에 의한 제3차 당조직은 코민테른의 승리를 얻었으며 11개항의 지령을 하달받았다, 그리고 김찬 등의 상해 해외부는 코민테른의 지령에 의하여 폐지되게 된다.
- 안광천의 시대 : 1926년 12월 6일 2차 당대회는 최근 동경에서 귀국한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로운 당지도부를 승인했다. ‘정우회 선언 정우회는 1926년 4월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의 4단체 합동위원회에 의하여 발족된 공산주의 단체이다. 특히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진영과의 협동전선을 제창하여 신간회 결성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의 실세였던 화요회의 주도하에 조직됨으로써 합법 공산주의단체 가운데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정우회선언은 특히 민족주의 진영과의 제휴를 주창하며 획기적인 ‘방향전환론’으로 전체 공산주의 진영의 운동노선으로 채택되어 신간회 탄생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의 작성자로 유명한 안광천은 동경유학생 출신이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 때문에 표면활동이 가능하였고 따라서 당조직을 지하 깊숙이 확보하는데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책임비서로 재임했던 1927년 9월 20일경까지의 10개월 동안에 조선공산당 조직은 국내외를 통해 상당한 진적을 보았다. 특히 김준연, 김세연의 도움으로 일본내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활발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준연의 시대 : 안광천에 대체하여 약 1개월동안 책임비서직을 인계받은 김준연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그는 편집국장으로서의 직무에 대해 일제의 추적과 취조를 받게 되자 책임비서직을 사임하고, 뒷일을 양명에게 일임하였다.
- 김세연의 시대 : 1927년 11월 12일경 후계당 조직을 위임받은 양명은 김세연을 책임비서로 선정하고 후계 간부를 조직하게 하였다. 김세연당의 중앙간부는 양명과 최익한이었으며 당정책의 중심과제는 파쟁청산과 방향전환의 실천이었다. 이 당은 1927년 11월 최익한을 동경으로 보내 코민테른으로부터 일화 3,300엥의 보조금을 받았다. 김세연 책임비서 시대는 비록 2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코민테른으로부터 자금뿐만 아니라 지령하달 등으로 그 관계가 긴밀했다.
조선공산청년회 : 화요계인 고강수가 김철수의 각파 규합방침에 복종하여 <서울청년회>의 정예분자들과 합동하는 형식으로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1926년 12월 중순에 북경유학생이면서 일월회계도 서울파도 아니던 양명이 책임비서직을 인계받았으나 일월회도 서울파도 아니어서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조기에 퇴진하게 된다. 제3 대 책임비서는 일월회 간부였던 하필원으로 안광천과 함께 방향전환론을 내걸었던 자이다. 당 책임비서 김준연의 퇴진과 함께 물러났으며 제4대 책임비서는 김철로 이어진다.
해체 : 파벌투쟁이 가열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잇던 공산주의자들이 경우에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경찰에 제공했다고 믿을만한 근거로 미루어 보아 의도적이진 않았다 해도 운동권 내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많은 비밀이 누설되었다. 물론 3차 조공의 출범 당시부터 경찰은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1926년 9월 당중앙집행위원회 결성이 있은 지 몇 주 후 경찰은 이 움직임을 포착했고, 1928년 2월 3차 당원 다수를 일제히 검거한 경찰은 조사를 진행함에 따라 마침내 4월에는 공산당원의 대부분 역시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평가 : 1년 5개월의 수명을 지녔던 2차에 걸친 조선공산당 검거로 인하여 지도력이 열약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폭을 확대해나갔다. 조선노동총동맹의 기능분립(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립), 조선총동맹의 강화, 사상단체의 통합과 정치투쟁으로의 집중 등 상당한 투쟁을 벌였으며 민족진영에 파고들어 범 국민당으로서의 <신간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를 등장시키기 위하여 일익을 담당한 것은 전환기의 이론과 정치투쟁의 결과였다.
④ 제4차 조선공산당
결성 :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 1928년 2월 27일, 28일에 제3차 당대회를 개최하면서 제4차 조선공산당은 시작된다. 제3차 당대회에서는 그동안 미비했던 점들을 보강하여 새로운 당칙을 제정하였는데 입당절차를 보다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이는 파쟁관계로 당내 사정이 복잡하였고, 경찰의 대검거를 당했던 쓰라린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1928년 3월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책임비서로 임명된 차금봉은 노동자 출신으로서「조선노동공제회」안에서 인텔리 배격을 주장하며 정통파를 자처했던 자였다.
활동 : 제4차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추적으로부터 당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각 도간부를 개선했으며 해외조직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북경에는 새로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신간회와 근우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단체 안에도 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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