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미술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중국미술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1.선사시대와 선진시대의 미술
 2.진·한대의 미술
 3.위진남북조·수·당시대의 미술
 4.오대·송·원대의 미술 
 5.명·청대의 미술
 6.근대의 미술

Ⅲ.결론

본문내용

“미술교육으로 종교를 대신하자는 주장”
-신학과 미술교육
신학은 중국의 고유 문화에 대립하여 출현한 것으로 유신사조와 외래문화가 결합한 자산계급의 신문화이다. 청말기의 중학과 서학의 대립, 구학과 신학의 투쟁은 중국 가산계급의 신문화와 봉건 구 문화의 투쟁을 반영하며 미술교육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미술교육이 서방국가와 다른 점은 미술교육이 시작되었을 때 즉시 중국화 과목을 설치하고 저명한 중국 산수화가로 호남성 형양인인 소질천을 초빙하여 민족적 특색을 지니게 한 것이었다. 중국화의 교육은 과거의 사도제에서 근대 학교제로 전환하였고 점차 경험을 축적하여 독자적인 교학체계를 형성하는 기회를 가졌다. 후에는 내용과 성질이 다른 것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채원배의 겸수병축 사상의 영향으로 중국의 미술교육은 중·서미술 교육의 병행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중국과 서양간의 모순을 조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고 양쪽의 견해차는 매우 깊었다.
-유학생과 초기의 서양화가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 침략으로 압박을 받는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중국인민은 분발하여 국가의 부강을 꾀하고 국내에서 교육을 부흥시키고 인재를 배양하는 한편 많은 수의 유학생을 선발하여 세계의 선진국가에 파견하여 유학하게 하였다. 그중에서 미술유학생은 일본과 불란서에 가장 많이 유학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청말기에서 1930년대까지 외국에서 회화와 조각을 전공한 사람은 6,70인에 이르렀는데 이는 중국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학업을 마친 후에 귀국하여 미술교육을 담당하거나 직업화가가 되어 근대미술 발전에 큰 작용을 하였고 동서양 미술교류의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다.
초기의 서양화가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는 이숙동(1880~1942)이다. 19세기에 모친의 명을 따라 남하하여 상해에서 남양공학에 입학하여 채원배에게 배웠다, 1905년 4월 일본에 건너가 동경국립미술전문학교에서 회화를 배우고 일본의 저명한 유화가 구로다 세이키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회화충격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여러 전문가부터 음악을 배웠으며 이론과 기술에 조예가 깊었다. 1918년에 이숙동은 항주 호포상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후에는 다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서법은 견지하여 해이되지 않았고 독특한 풍격을 이루었다. 이숙동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지만 신해혁명 이후 자산계급의 민주혁명이 진정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전국이 군벌혼전의 수렁에 빠지자 현실생활에 혐오를 느끼고 불문에 귀의하여 초탈을 추구하였다.
Ⅲ.결론
중국의 미술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되고 완결성과 장식미를 추구한 독특한 미술 세계를 전개해왔다. 우리나라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미, 균형감, 실용성을 갖췄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초기의 불교전래와 거기에 잇따른 중국문화의 유입은 한국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는 예술을 애호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작하는 것이 지배계급의 기본적인 교양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를 시문과 더불어 으뜸으로 여겼으며, 회화는 서를 보완하는 구상성과 도덕교육에 보탬이 되는 실용성으로 중당 무렵부터 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청조에 이르기까지 소기 ·말예로 보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조각이나 공예 등 지식인이 직접 제작에 종사하지 않는 장르에서는, 직인·공장의 산물이라 하여 서화와 동렬로 보지 않았고, 장인예술을 천시하였다. 표현형식은 구상을 벗어나지 않으며, 결코 기하학적 문양이나 추상적 조형에 흐르지 않았다. 피 ·나체 ·데포르메 등 비일상적 소재를 배제하고, 단정 ·명결 ·솔직하고 논리적 ·사실적인 표현을 정통으로 하며, 숭고 ·풍만 등 정신의 충실을 제일의로 하였다. 또 비애 ·통곡 등 격정의 표출을 이단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역대 왕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중국미술의 본질이며, 이민족의 침입에 의한 지배하에서도 변화나 동요가 없었다.
참고문헌
<간추린 중국미술역사> 북경 중앙미술학원 미술사계 중국미술사교연실 편저 2003.03.20
<중국미술사> 마이클설리번 저 1999.03.01
<한권으로 보는 중국미술사 101장면> 장훈 저 1999.10.25
네이버 백과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389&docId=260113&mobile&categoryId=1389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278&docId=1528582&categoryId=3780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389&docId=894799&mobile&categoryId=1389
다음 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2s0387b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7a0865a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j0022b007#ID30
구글 이미지
http://www.google.co.kr/search
http://www.google.co.kr/search?q=%EC%88%98%EB%82%98%EB%9D%BC+%EB%8F%84%EC%84%B1%EA%B1%B4%EC%84%A4&newwindow=1&source=lnms&tbm=isch&sa=X&ei=GuqgUcDJGoWZiQeL8IGQBQ&ved=0CAcQ_AUoAQ&biw=1680&bih=830#newwindow=1&tbm=isch&sa=1&q=%EC%95%88%EC%A0%9C%EA%B5%90&oq=%EC%95%88%EC%A0%9C%EA%B5%90&gs_l=img.3...1772188.1772829.7.1773547.7.6.0.0.0.2.218.640.0j3j1.4.0...0.0...1c.4j1.14.img.LkQQYJFyDl0&bav=on.2,or.r_qf.&bvm=bv.47008514,d.aGc&fp=aecbea612db9352&biw=1680&bih=830
  • 가격4,000
  • 페이지수35페이지
  • 등록일2013.10.23
  • 저작시기201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735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