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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朝鮮의 現狀及黨의 計劃」, 위의 책, 67~73쪽 참조
이는 당시 박헌영이 문화운동주의자나 자치운동주의자들에 대해 매우 강경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이후 조직된 조공노선 보다 더욱 급진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2차 조공은 민족주의자와의 협동전선 구축을 위해 활동했다. 제3차 조공은 민족유일당 건설, 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설을 내걸었고,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면서 신간회를 대체로 ‘민족단일전선당의 매개형태’로 이해했다. 제3차 조공의 후계당의 성격이 강한 제4차 조공은 제3차 조공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신간회를 조선민중의 투쟁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신간회 각 지회에 프랙션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12월테제가 채택되기 이전까지는 사회주의세력이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의 건설에 적극 가담했고, 또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를 ‘민족유일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12월테제 채택 이후 한국사회주의자들은 반대로 신간회 해체를 주도하게 되고,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 건설에 기초한 당 재건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③ 1927년 11월 출옥부터 1933년 7월 세 번째 투옥까지
1925년 11월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된 박헌영은 1928년 8월 어느 날 아내 주세죽과 함께 조선을 탈출하는 데에 성공, 소련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어 그는 국제공청 집행위원회 비서부의 추천을 받아 1929년 1월부터 1931년 말까지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맑스-레닌주의를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 직후인 1929년 2월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데에 이어 1929년 말에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최성우, 박애와 더불어 박헌영이 참가한 ‘조선위원회’는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아래와 같은 사업을 전개했다.
먼저 조선 내부에서 조선위원회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할 기도기관으로서 1929년 12월 김단야를 파견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산하가관으로서 그 ‘국내부’ 역할을 수행한 ‘조선공산당조직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김단야는 동 조직을 결성한 후 다음 해 2월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그런데 ·다음 해 3.1절 기념일에 즈음해서 서울 일원에 살포된 ‘불온격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량검거사건이 발생하는데, 일경의 표현에 따르면 ‘화요파조선공산당재조직사건’을 불린 이 사건이 터진 것을 계기로 조선위원회는 조선 국내에 중앙기관을 설치한다는 방침을 취소하고 그 대신 공장과 농촌의 공산주의 세포를 지도하는 코민테른 전권위원을 국경에 근접한 해외에 상주시킨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이 방침은 이른바 ‘국제선’의 수직적 지도하에 전개된 1930년대의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 당 재건운동 등의 전개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활동 중 서울에 잠입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지만 1933년 7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체포된 후 6개월 뒤 잡지사업이 중단되었는데, 이에 따라 김단야는 주세죽과 함께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박헌영이 국제레닌대학 재학 중 참여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는 1928년 말에 코민테른 지부승인이 취소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만든 잠정적인 최고상급기관이었다. 이는 그가 당시 최성우, 박애와 더불어 12월테제 채택이후 ‘코민테른요원 직접 지도하에서의 당 재건’을 자신의 기본방침으로 설정한 코민테른이 인정하는 당 재건사업을 위한 최고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박헌영은 1929년 12월 13일~19일에 있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일본반 합동회의”에서의 발언을 통해 12월테제에서 코민테른이 조선사회주의운동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한 종파투쟁 문제와 관련하여 “종파투쟁의 단점은 이미 코민테른이 결정에서도 언급했고 그 결정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합니다. 나는 반대파에 속했었고 서울파에 대항해서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잘못된 일이었으며, 우리는 모든 종파투쟁의 전통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전집』제4권, 226쪽
라고 말함으로써 화요파 중심으로 당을 건설하려 한 자신의 과거 활동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조공 해산 이후에 나타난 ‘계급투쟁’‘현단계’‘볼세비키’그룹들이 조선에서의 노동자-대중운동과 아무런 연관을 맺음이 없이 무원칙적인 싸움만 벌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최성우, 박애, 박헌영으로 구성된 조선위원회 학생선발위원회는 1930년 5월 18일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인 학생들을 심사한 결과를 조선위원회 회의에 제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엠엘파 출신들의 분파 활동에 대해서는 제명, 자기비판 뒤 공산대학 잔류 등 매우 엄격한 처분을 내리면서도 화요파에 속했거나 그에 우호적인 인사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이 자신이 속했던 화요파 인사들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는 점을, 따라서 당 재건 사업에 다른 분파들에 상대적으로 비분파적인 인자들은 참여시켜야 하지만 당의 구심은 여전히 구 화요계 인사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아울러 당요원은 노동자-대중에 깊이 뿌리내린 인사여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④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1934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은 박헌영은 1939년 9월에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된다. 그가 감옥에 있는 코민테른은 1935년의 7차 대회를 통해 인민전선전술의 채택이라는 운동노선상의 대전환을 단행했는데, 후일 샤브시나여사가 박헌영에게 감옥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대략적으로 알았다”고 답변했다.
박헌형은 출옥 후 곧장 당 재건을 위한 지하활동에 착수하는데, 그 과정에서 9월 중 당시 이관술이 지도하고 있던 서울의 지하공산당조직(경성 콤그룹)과 관계를 맺고 그 그룹의 책임비서직을 맡게 된다. 이 조직은 고려공산
이는 당시 박헌영이 문화운동주의자나 자치운동주의자들에 대해 매우 강경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이후 조직된 조공노선 보다 더욱 급진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2차 조공은 민족주의자와의 협동전선 구축을 위해 활동했다. 제3차 조공은 민족유일당 건설, 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설을 내걸었고,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면서 신간회를 대체로 ‘민족단일전선당의 매개형태’로 이해했다. 제3차 조공의 후계당의 성격이 강한 제4차 조공은 제3차 조공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신간회를 조선민중의 투쟁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신간회 각 지회에 프랙션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12월테제가 채택되기 이전까지는 사회주의세력이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의 건설에 적극 가담했고, 또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를 ‘민족유일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12월테제 채택 이후 한국사회주의자들은 반대로 신간회 해체를 주도하게 되고,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 건설에 기초한 당 재건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③ 1927년 11월 출옥부터 1933년 7월 세 번째 투옥까지
1925년 11월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된 박헌영은 1928년 8월 어느 날 아내 주세죽과 함께 조선을 탈출하는 데에 성공, 소련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어 그는 국제공청 집행위원회 비서부의 추천을 받아 1929년 1월부터 1931년 말까지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맑스-레닌주의를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 직후인 1929년 2월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데에 이어 1929년 말에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최성우, 박애와 더불어 박헌영이 참가한 ‘조선위원회’는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아래와 같은 사업을 전개했다.
먼저 조선 내부에서 조선위원회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할 기도기관으로서 1929년 12월 김단야를 파견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산하가관으로서 그 ‘국내부’ 역할을 수행한 ‘조선공산당조직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김단야는 동 조직을 결성한 후 다음 해 2월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그런데 ·다음 해 3.1절 기념일에 즈음해서 서울 일원에 살포된 ‘불온격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량검거사건이 발생하는데, 일경의 표현에 따르면 ‘화요파조선공산당재조직사건’을 불린 이 사건이 터진 것을 계기로 조선위원회는 조선 국내에 중앙기관을 설치한다는 방침을 취소하고 그 대신 공장과 농촌의 공산주의 세포를 지도하는 코민테른 전권위원을 국경에 근접한 해외에 상주시킨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이 방침은 이른바 ‘국제선’의 수직적 지도하에 전개된 1930년대의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 당 재건운동 등의 전개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활동 중 서울에 잠입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지만 1933년 7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체포된 후 6개월 뒤 잡지사업이 중단되었는데, 이에 따라 김단야는 주세죽과 함께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박헌영이 국제레닌대학 재학 중 참여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는 1928년 말에 코민테른 지부승인이 취소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만든 잠정적인 최고상급기관이었다. 이는 그가 당시 최성우, 박애와 더불어 12월테제 채택이후 ‘코민테른요원 직접 지도하에서의 당 재건’을 자신의 기본방침으로 설정한 코민테른이 인정하는 당 재건사업을 위한 최고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박헌영은 1929년 12월 13일~19일에 있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일본반 합동회의”에서의 발언을 통해 12월테제에서 코민테른이 조선사회주의운동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한 종파투쟁 문제와 관련하여 “종파투쟁의 단점은 이미 코민테른이 결정에서도 언급했고 그 결정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합니다. 나는 반대파에 속했었고 서울파에 대항해서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잘못된 일이었으며, 우리는 모든 종파투쟁의 전통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전집』제4권, 226쪽
라고 말함으로써 화요파 중심으로 당을 건설하려 한 자신의 과거 활동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조공 해산 이후에 나타난 ‘계급투쟁’‘현단계’‘볼세비키’그룹들이 조선에서의 노동자-대중운동과 아무런 연관을 맺음이 없이 무원칙적인 싸움만 벌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최성우, 박애, 박헌영으로 구성된 조선위원회 학생선발위원회는 1930년 5월 18일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인 학생들을 심사한 결과를 조선위원회 회의에 제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엠엘파 출신들의 분파 활동에 대해서는 제명, 자기비판 뒤 공산대학 잔류 등 매우 엄격한 처분을 내리면서도 화요파에 속했거나 그에 우호적인 인사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이 자신이 속했던 화요파 인사들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는 점을, 따라서 당 재건 사업에 다른 분파들에 상대적으로 비분파적인 인자들은 참여시켜야 하지만 당의 구심은 여전히 구 화요계 인사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아울러 당요원은 노동자-대중에 깊이 뿌리내린 인사여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④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1934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은 박헌영은 1939년 9월에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된다. 그가 감옥에 있는 코민테른은 1935년의 7차 대회를 통해 인민전선전술의 채택이라는 운동노선상의 대전환을 단행했는데, 후일 샤브시나여사가 박헌영에게 감옥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대략적으로 알았다”고 답변했다.
박헌형은 출옥 후 곧장 당 재건을 위한 지하활동에 착수하는데, 그 과정에서 9월 중 당시 이관술이 지도하고 있던 서울의 지하공산당조직(경성 콤그룹)과 관계를 맺고 그 그룹의 책임비서직을 맡게 된다. 이 조직은 고려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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