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
2. 작가의 생애와 사상 ---------------------------------
2-1. 생애
2-2. 사상
2-2.1. 혁신적인 정치․사회사상
2-2.2 진보적 성정론
2-2.3. 선구적 실학사상
3. 작품의 유형과 그 양상 ------------------------------
3-1. 개성주의적 문학관과 허균의 시비평-<학산초담>, <성수시화>, <국조시산>
3-2 호민론적 사상과 <홍길동전>
3-3. 전의 소설화 경향과 <남궁선생전>
4. 문학사적 의의 --------------------------------------
5. 결론 -----------------------------------------------
2. 작가의 생애와 사상 ---------------------------------
2-1. 생애
2-2. 사상
2-2.1. 혁신적인 정치․사회사상
2-2.2 진보적 성정론
2-2.3. 선구적 실학사상
3. 작품의 유형과 그 양상 ------------------------------
3-1. 개성주의적 문학관과 허균의 시비평-<학산초담>, <성수시화>, <국조시산>
3-2 호민론적 사상과 <홍길동전>
3-3. 전의 소설화 경향과 <남궁선생전>
4. 문학사적 의의 --------------------------------------
5. 결론 -----------------------------------------------
본문내용
인 박태순이 용감하게도 이 책을 간행한 것은 그만큼 이 시선집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맨 뒤에는 허씨 일가의 시작품에 대한 권필이 비선한 <허문세고>가 실려있다. <국조시산>에 실현된 실제비평의 성과는 우리 나라 비평사상 매우 소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조시산> 이전의 시선집으로는 <청구풍아>와 <동문선>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국조시산>은 <동문선> 이후, 우리 나라 한시가 크게 떨친 조선 중기의 시선집으로서 자료사적 의미는 특기할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집에는 금체에서 고조장편과 잡체에 이르기까지 가구와 절조마다 편자의 비와 평이 붙어 있다. 이것는 선시의 작업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비평사에 있어 실제비평의 선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 책은 후대의 시인묵객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특히 시화와 비평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김득신은 그의 <종남총지>에서 <국조시산> 속에 선입된 정호음의 <후대야좌시> 한 연에 대한 허균의 비평을 통하여 그의 수준 높은 감식안을 재확인하고 있다. 홍만종은 그의 <시화총림증정>에서 “여타의 선집들은 모두 그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직 <국조시산>만은 이식을 비롯한 제공들이 모두 잘 뽑았다고 한다. 이 시산이 널리 세상에서 읽혀진 까닭도 이 때문이다.”하였다. 김만중도 우리나라에서 비평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성현과 신흠, 그리고 허균뿐이라 하였다.
허균은 시화와 시선집에서 시의 우열을 논할 때 자주 당시, 그 중에서도 성당시를 중요한 잣대의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허균이 당시를 높이 평가하고 시비평의 기준으로 원용한 것은 기조의 사대부 문인들이 중국시를 추종하던 것과는 달리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개성주의적 관점에 서서 당시의 풍요로운 서정세계를 긍정했던 것이며 주체적 입장에서 개방적 진취성을 가지고 당시의 자양분을 수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시관에 부합하기 때문에 실재 비평에서 원용하였던 것이지 당시를 본받고 배워야 할 유일한 모범으로서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과 문학관이 더욱 확고해진 <성수시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박은의 시가 비록 정성은 아니지만 엄밀하고 굳세다. \'봄그늘에 비가 오려하니 새가 서로 말하고 늙은 나무는 바람이 불지 않아 스스로 슬퍼한다\'라는 시구는 당시의 섬세함을 배운자인들 어찌 감히 그 보루를 깍아내리겠는가. -<성수시화>
이와같이 창의적인 시를 높이 평가한 허균은 시를 뽑아 평을 할 때, 신분의 고하나 인간적 친소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공정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화나 시선집에는 당시의 유민시인 어무적, 부안기생 계생, 천인 유희경, 우사 전우치 등 당시 하층계급 인물들의 시작품들이 실리게 되었다. 특히 어무적에 대해서는 <국조시산>에서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하면서 그의 <유민탄>은 우리 나라 7언고시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격찬을 하고 있다. 허균이 유민탄과 같은 민중들의 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허균의 세계관이 투영된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관이 현실에 접근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2. 호민론적 사상과 홍길동전
당시 봉건사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허균은 한글소설과 한글산문에서도 민중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기존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했던 허균은 당시의 불합리한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서얼들과 즐겨 어울리며 민중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던 허균으로서는 지배층 보다는 피지배계층인 민중에게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재론>에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쓰지 않는 당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허균은 이런것이 시정되지 않고 지배층이 계속 민중들을 억압 수탈하기만 한다면 저항할 수밖에 없음을 그의 <호민론>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중을 항민과 원민과 호민으로 나누고, 억눌려도 참고 지내는 항민과 단지 원망만 하고 있는 원민은 크게 두렵지 않지만 기회가 오면 세를 규합해서 일어나는 호민은 참으로 참으로 두려운 존재라고 하였다. 자기 권리를 주장할 줄 아는 각성된 민중인 호민은 불합리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존재로 15~16세기경에 역사상 등장했던 김막동, 홍길동, 임꺽정 등이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허균은 이러한 민중 영웅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을 문학작품에 담았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바로 연산조에 실재했던 농민 저항의 지도자 홍길동을 취재해서 그의 사회개혁 사상과 결부시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홍길동전>은 정치가 부패하고 적서의 차별이 심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여 봉건적 가족 관계와 사회제도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여 끝내는 율도국의 왕이된다. 이러한 점에서 일종의 사회소설이자 영웅소설로 해석된다. 이 작품에 대해서 작자문제와 <수호지> 모방설 등의 논란이 있었지만, 택당잡저의 \"균우작홍길동전, 이의수호\"라는 기록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지>에 견주었다\'라고 해석한다면 그 논란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홍길동전>은 통시대적인 영웅형상이 단순히 허균에 의해 새롭게 변형되어 나타났다는 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을 민중영웅으로 재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홍길동을 체포하고 삼정승이 모여 이를 축하할 정도였다니 홍길동 부대의 규모와 사건의 중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홍길동전>은 이와 같이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깔고 작품화 되었던 것이다.
<홍길동전>은 작품의 처음부터 조선조 사회의 현실문제가 거론된다.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천생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소인의 평새 서룬 바는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그래서 홍길동은 이런 봉건적 제약과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몸을 녹림에 부쳐 남아의 지기를 펴기\'위해서 도적
이 책은 후대의 시인묵객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특히 시화와 비평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김득신은 그의 <종남총지>에서 <국조시산> 속에 선입된 정호음의 <후대야좌시> 한 연에 대한 허균의 비평을 통하여 그의 수준 높은 감식안을 재확인하고 있다. 홍만종은 그의 <시화총림증정>에서 “여타의 선집들은 모두 그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직 <국조시산>만은 이식을 비롯한 제공들이 모두 잘 뽑았다고 한다. 이 시산이 널리 세상에서 읽혀진 까닭도 이 때문이다.”하였다. 김만중도 우리나라에서 비평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성현과 신흠, 그리고 허균뿐이라 하였다.
허균은 시화와 시선집에서 시의 우열을 논할 때 자주 당시, 그 중에서도 성당시를 중요한 잣대의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허균이 당시를 높이 평가하고 시비평의 기준으로 원용한 것은 기조의 사대부 문인들이 중국시를 추종하던 것과는 달리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개성주의적 관점에 서서 당시의 풍요로운 서정세계를 긍정했던 것이며 주체적 입장에서 개방적 진취성을 가지고 당시의 자양분을 수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시관에 부합하기 때문에 실재 비평에서 원용하였던 것이지 당시를 본받고 배워야 할 유일한 모범으로서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과 문학관이 더욱 확고해진 <성수시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박은의 시가 비록 정성은 아니지만 엄밀하고 굳세다. \'봄그늘에 비가 오려하니 새가 서로 말하고 늙은 나무는 바람이 불지 않아 스스로 슬퍼한다\'라는 시구는 당시의 섬세함을 배운자인들 어찌 감히 그 보루를 깍아내리겠는가. -<성수시화>
이와같이 창의적인 시를 높이 평가한 허균은 시를 뽑아 평을 할 때, 신분의 고하나 인간적 친소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공정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화나 시선집에는 당시의 유민시인 어무적, 부안기생 계생, 천인 유희경, 우사 전우치 등 당시 하층계급 인물들의 시작품들이 실리게 되었다. 특히 어무적에 대해서는 <국조시산>에서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하면서 그의 <유민탄>은 우리 나라 7언고시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격찬을 하고 있다. 허균이 유민탄과 같은 민중들의 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허균의 세계관이 투영된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관이 현실에 접근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2. 호민론적 사상과 홍길동전
당시 봉건사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허균은 한글소설과 한글산문에서도 민중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기존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했던 허균은 당시의 불합리한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서얼들과 즐겨 어울리며 민중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던 허균으로서는 지배층 보다는 피지배계층인 민중에게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재론>에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쓰지 않는 당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허균은 이런것이 시정되지 않고 지배층이 계속 민중들을 억압 수탈하기만 한다면 저항할 수밖에 없음을 그의 <호민론>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중을 항민과 원민과 호민으로 나누고, 억눌려도 참고 지내는 항민과 단지 원망만 하고 있는 원민은 크게 두렵지 않지만 기회가 오면 세를 규합해서 일어나는 호민은 참으로 참으로 두려운 존재라고 하였다. 자기 권리를 주장할 줄 아는 각성된 민중인 호민은 불합리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존재로 15~16세기경에 역사상 등장했던 김막동, 홍길동, 임꺽정 등이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허균은 이러한 민중 영웅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을 문학작품에 담았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바로 연산조에 실재했던 농민 저항의 지도자 홍길동을 취재해서 그의 사회개혁 사상과 결부시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홍길동전>은 정치가 부패하고 적서의 차별이 심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여 봉건적 가족 관계와 사회제도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여 끝내는 율도국의 왕이된다. 이러한 점에서 일종의 사회소설이자 영웅소설로 해석된다. 이 작품에 대해서 작자문제와 <수호지> 모방설 등의 논란이 있었지만, 택당잡저의 \"균우작홍길동전, 이의수호\"라는 기록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지>에 견주었다\'라고 해석한다면 그 논란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홍길동전>은 통시대적인 영웅형상이 단순히 허균에 의해 새롭게 변형되어 나타났다는 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을 민중영웅으로 재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홍길동을 체포하고 삼정승이 모여 이를 축하할 정도였다니 홍길동 부대의 규모와 사건의 중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홍길동전>은 이와 같이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깔고 작품화 되었던 것이다.
<홍길동전>은 작품의 처음부터 조선조 사회의 현실문제가 거론된다.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천생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소인의 평새 서룬 바는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그래서 홍길동은 이런 봉건적 제약과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몸을 녹림에 부쳐 남아의 지기를 펴기\'위해서 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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