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오장환의 생애
2. 오장환의 작품 이해
가. 광복 전 작품
나. 광복 후 작품
다. 월북 후 작품
Ⅲ. 결 론
Ⅱ. 본 론
1. 오장환의 생애
2. 오장환의 작품 이해
가. 광복 전 작품
나. 광복 후 작품
다. 월북 후 작품
Ⅲ. 결 론
본문내용
었던 시대상황이 그로 하여금 가슴을 한껏 부풀게 하였는지 모른다.
일제 말, 극도의 억압정책에 못 이겨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여 친일 아부하는 등 갖은 추태를 보인데 반해 오장환 그 자신은 최하층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고 살았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 어려운 때를 큰 잘못 없이 지내게 된 것은 오로지 시작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815해방 직후, 오장환은 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며 좌익사상이 담긴 시편들을 썼는데, <연안延安서 오는 동무 심沈에게><공청共靑으로 가는 길><벽보壁報><승리勝利의 날>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승리의 날>은 노동절을 기념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오장환이 월북한 것은 남북한이 각기 정부를 수립하기에 앞서 남북의 분계선인 38선의 내왕이 금지되기 직전으로 추정된다. 그는 공청共靑에 가입하고 임화林和 등 좌경작가들이주재하여 결성한 문학가동맹에 적극 참여하면서 공산주의에 경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몇몇 젊은 문인들과 함께 좌경화 운동을 선도하다가 1947년 말에 월북하여 그곳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후 625전쟁 발발과 함께 서울에 나타나 몇몇 문인들을 만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지병으로 이듬해에 사망했으며, 이 때까지 총 5권의 시집과 한 권의 역시집을 출간하였고 <전쟁>, <수부首府>등과 같은 장시를 비롯하여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 40여편과 산문 등도 발표하였다. 위의 책, 새문원, pp.16~61.
2. 오장환의 작품 이해
오장환의 광복 전 초기의 작품은 전통의 거부반응을 표현하였다. 광복 후에는 러시아의 제1인자였던 에세닌에 경도되어 그 영향을 받아 향토성과 모친에 대한 애정을 다룬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오장환은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첫 시집『성벽』을 냈는가 하면, 삼십도 채 되기 전에 『헌사』,『나 사는 곳』,『병든 서울』등의 창작시집과 역시집『에세-닌 시집』을 출간했다. 오직 시 쓰는 것을 천직으로 알았던 오장환은 서정주김동리함형수김상원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작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가. 광복 전 작품
그의 광복 전 작품은 대부분이 전통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진보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관습을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그의 어릴 적 생애의 배경도 많은 관련이 있다.
내가 수업료를 바치지 못하고 정학을바더 귀향하엿슬 때 달포가 넘
도록 청결을 하지 못한 내 몸을 씨서 볼려고 나는 욕탕엘 갓섯지
뜨거운 물 속에 왼몸을 잠그고 잠시 아른거리는 정신에 도취할 것을
그리어보며 나는 아저씨와 함께 욕탕엘 갓섯지
아저씨 말슴은 “내가 돈주고 때 씻기는 생전 처음인걸” 하시엇네
아저씨는 오늘 할 수 업시 허리 굽은 늙은 밤나무를 베혀 장작을 만
드러 가지고 팔러 나오신 길이엿네
이 古木은 할아버지 열 두살 적에 심으신 世傳之物이라고 언제나
“이 집은 팔어도 밤나무만은 못 팔겠다” 하시드니 그것을 베여 가지고
오셧네 그려
아저씨는 오늘 아츰에 오시어 이곳에 한 개밧게 업는 목욕탕에 이 밤
나무 장작을 팔으시엇지.
그리하여 이 나무로 데인 물에라도 좀 몸을 대이고 십흐셔서 할아버
님의 遺物의 副品이라도 좀더 갓차히 하시려고 아저씨의 목적은 때씻
는 것이 안이엿든 것일세.
-<목욕간>에서
위의 시는 오장환의 첫 발표시 <목욕간>의 전반부이다.
할아버지께서 열두 살 적에 심은 밤나무(世傳之物)을 베어 장작을 만들어 목욕간에 팔았다. 그래서 평생동안 돈 내고 목욕을 하지 않았던 아저씨와 목욕간에 갔었는데 그것은 아저씨께서 世傳之物인 밤나무로 데운 물에 몸을 담궈 좀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것이다.
때투성이 시골뜨기를 멸시하는 목욕간 주인에 대한 반감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아직도 전통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되돌아보는 세대의 전통과 진보 사이에 느끼는 소박한 갈등현상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귀중한 세전지물이라도 현실적 삶에 장애가 될 때, 미리 잘라버리는 아저씨의 과감한 결단성이 이 시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통관념과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진보적 사상은 오장환의 시 전체에 작용하고 있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김학동,『吳章煥硏究』, 시문학사, pp.14~15.
여기서 진보라 함은 좌경적 이념의 사회주의 사상이 아니라, 어떤 새로움에 대한 포괄적 의미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통 부정의 진보적 사상은 또 다른 습작품인 <카메라룸>에서도 볼 수 있다.
오장환은 이 뿐만 아니라 시집『성벽』에 실린 <성씨보姓氏寶>, <종가宗家>를 통해 전통을 부정하였으며,
내 姓은 吳씨, 어째서 吳인지 나도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
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淸人이 조상이라는 家系寶의 검은 먹글씨, 옛
날은 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李家
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
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歷史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가
으로 밀려온 소라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
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姓氏寶>의 전문
오장환은 전통과 관습을 동일시하여 모두 부정하고 있다. 오장환의 경우, 처음에는 아버지와 큰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로 잘못 신고되었다가 다시 생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정정된다. 그리고 후에 큰어머니의 사망으로 생모가 적실로 혼인 신고되면서 생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장환의 형제들이 모두 적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분제도의 엄격성이 어린 오장환의 마음을 일찍부터 일그러뜨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제일 먼저 전통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다. 신분제도를 포함한 낡은 유교사회의 관습을 파기하고 인간의 평등원리에 입각한 진보적 사상에 보다 일찍 눈뜨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에서 오장환은 전통적 유교이념과 낡은 유습 및 도덕관을 부정하고 나선다. 김학동,『오장환 評傳』, 새문원, pp.82~83.
돌담으로 튼튼이 가려노은 집안엔 거믄 기와집 宗家가 살고 있었다.
충충한 울속에서 거
일제 말, 극도의 억압정책에 못 이겨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여 친일 아부하는 등 갖은 추태를 보인데 반해 오장환 그 자신은 최하층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고 살았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 어려운 때를 큰 잘못 없이 지내게 된 것은 오로지 시작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815해방 직후, 오장환은 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며 좌익사상이 담긴 시편들을 썼는데, <연안延安서 오는 동무 심沈에게><공청共靑으로 가는 길><벽보壁報><승리勝利의 날>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승리의 날>은 노동절을 기념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오장환이 월북한 것은 남북한이 각기 정부를 수립하기에 앞서 남북의 분계선인 38선의 내왕이 금지되기 직전으로 추정된다. 그는 공청共靑에 가입하고 임화林和 등 좌경작가들이주재하여 결성한 문학가동맹에 적극 참여하면서 공산주의에 경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몇몇 젊은 문인들과 함께 좌경화 운동을 선도하다가 1947년 말에 월북하여 그곳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후 625전쟁 발발과 함께 서울에 나타나 몇몇 문인들을 만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지병으로 이듬해에 사망했으며, 이 때까지 총 5권의 시집과 한 권의 역시집을 출간하였고 <전쟁>, <수부首府>등과 같은 장시를 비롯하여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 40여편과 산문 등도 발표하였다. 위의 책, 새문원, pp.16~61.
2. 오장환의 작품 이해
오장환의 광복 전 초기의 작품은 전통의 거부반응을 표현하였다. 광복 후에는 러시아의 제1인자였던 에세닌에 경도되어 그 영향을 받아 향토성과 모친에 대한 애정을 다룬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오장환은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첫 시집『성벽』을 냈는가 하면, 삼십도 채 되기 전에 『헌사』,『나 사는 곳』,『병든 서울』등의 창작시집과 역시집『에세-닌 시집』을 출간했다. 오직 시 쓰는 것을 천직으로 알았던 오장환은 서정주김동리함형수김상원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작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가. 광복 전 작품
그의 광복 전 작품은 대부분이 전통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진보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관습을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그의 어릴 적 생애의 배경도 많은 관련이 있다.
내가 수업료를 바치지 못하고 정학을바더 귀향하엿슬 때 달포가 넘
도록 청결을 하지 못한 내 몸을 씨서 볼려고 나는 욕탕엘 갓섯지
뜨거운 물 속에 왼몸을 잠그고 잠시 아른거리는 정신에 도취할 것을
그리어보며 나는 아저씨와 함께 욕탕엘 갓섯지
아저씨 말슴은 “내가 돈주고 때 씻기는 생전 처음인걸” 하시엇네
아저씨는 오늘 할 수 업시 허리 굽은 늙은 밤나무를 베혀 장작을 만
드러 가지고 팔러 나오신 길이엿네
이 古木은 할아버지 열 두살 적에 심으신 世傳之物이라고 언제나
“이 집은 팔어도 밤나무만은 못 팔겠다” 하시드니 그것을 베여 가지고
오셧네 그려
아저씨는 오늘 아츰에 오시어 이곳에 한 개밧게 업는 목욕탕에 이 밤
나무 장작을 팔으시엇지.
그리하여 이 나무로 데인 물에라도 좀 몸을 대이고 십흐셔서 할아버
님의 遺物의 副品이라도 좀더 갓차히 하시려고 아저씨의 목적은 때씻
는 것이 안이엿든 것일세.
-<목욕간>에서
위의 시는 오장환의 첫 발표시 <목욕간>의 전반부이다.
할아버지께서 열두 살 적에 심은 밤나무(世傳之物)을 베어 장작을 만들어 목욕간에 팔았다. 그래서 평생동안 돈 내고 목욕을 하지 않았던 아저씨와 목욕간에 갔었는데 그것은 아저씨께서 世傳之物인 밤나무로 데운 물에 몸을 담궈 좀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것이다.
때투성이 시골뜨기를 멸시하는 목욕간 주인에 대한 반감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아직도 전통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되돌아보는 세대의 전통과 진보 사이에 느끼는 소박한 갈등현상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귀중한 세전지물이라도 현실적 삶에 장애가 될 때, 미리 잘라버리는 아저씨의 과감한 결단성이 이 시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통관념과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진보적 사상은 오장환의 시 전체에 작용하고 있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김학동,『吳章煥硏究』, 시문학사, pp.14~15.
여기서 진보라 함은 좌경적 이념의 사회주의 사상이 아니라, 어떤 새로움에 대한 포괄적 의미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통 부정의 진보적 사상은 또 다른 습작품인 <카메라룸>에서도 볼 수 있다.
오장환은 이 뿐만 아니라 시집『성벽』에 실린 <성씨보姓氏寶>, <종가宗家>를 통해 전통을 부정하였으며,
내 姓은 吳씨, 어째서 吳인지 나도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
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淸人이 조상이라는 家系寶의 검은 먹글씨, 옛
날은 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李家
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
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歷史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가
으로 밀려온 소라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
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姓氏寶>의 전문
오장환은 전통과 관습을 동일시하여 모두 부정하고 있다. 오장환의 경우, 처음에는 아버지와 큰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로 잘못 신고되었다가 다시 생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정정된다. 그리고 후에 큰어머니의 사망으로 생모가 적실로 혼인 신고되면서 생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장환의 형제들이 모두 적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분제도의 엄격성이 어린 오장환의 마음을 일찍부터 일그러뜨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제일 먼저 전통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다. 신분제도를 포함한 낡은 유교사회의 관습을 파기하고 인간의 평등원리에 입각한 진보적 사상에 보다 일찍 눈뜨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에서 오장환은 전통적 유교이념과 낡은 유습 및 도덕관을 부정하고 나선다. 김학동,『오장환 評傳』, 새문원, pp.82~83.
돌담으로 튼튼이 가려노은 집안엔 거믄 기와집 宗家가 살고 있었다.
충충한 울속에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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