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관
1) 소년시절
2) 에도유학
3) 토사근왕당(土佐勤王党)
4) 탈번
5) 카메야마 사중(亀山社中=海援隊)
6) 삿쵸동맹(薩長同盟)
7) 해원대(海援隊)
8) 선중팔책과 대정봉환(船中八策と大政奉還)
9) 암살
10) 암살후
2. 생애
3. 맺음말
1) 소년시절
2) 에도유학
3) 토사근왕당(土佐勤王党)
4) 탈번
5) 카메야마 사중(亀山社中=海援隊)
6) 삿쵸동맹(薩長同盟)
7) 해원대(海援隊)
8) 선중팔책과 대정봉환(船中八策と大政奉還)
9) 암살
10) 암살후
2. 생애
3. 맺음말
본문내용
서 막부개혁을 그렸다. 하지만 안세이5년(1858년)4월에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막부대노(大老)에 취임하자, 막부는 일교파(一橋派)를 물리치고 도쿠가와 이에모치(川 家茂)를 후계자로 정해, 개국을 강행하여 반대파의 탄업을 받게 된다.(안세의 대옥 = 安政の大獄) 일교파의 요우토우도 안세이6년(1859년) 2월에 집안을 이어받아 물려받은 것을 자손에게 양도시켜 어쩔 수 없었다. 번정의 실권은 요우토우에 있었고, 요시다 토우요우를 중심으로 한 번정개혁은 척척 진행되었다.
안세이7년(1860년) 3월 3일 ,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에도성에 올라가는 도중에 사쿠라다문(田門) 밖에 미토탈번 떠돌이 무사들의 습격을 받아 암살당하게 된다.(田門外の) 사건이 사사에 전해지자 하사(下士=카시) 사이에서 논의가 들끓고 일어나 존왕양이(尊王攘夷=손노우죠우이)사상이 토사번 하사의 주류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료마의 친구였던 카케치한페타(武市半平太)가 무사수행을 위해 오카가 이조(岡田以) 등과 함께 토사로부터 길을 떠났다. 무사수행이라고 칭했지만, 사실은 서국제번(西諸藩)을 돌아 정세를 시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행은 우선 사누키 마루카메번(岐丸藩)에 들어가 비젠, 미마사카, 빗츄, 빗고, 아키노, 쵸슈(備前美作備中備後安芸長州)등을 거처 큐슈(九州)에 들어간다. 도중에 료마는 사카모토 나오(高松太,坂本直)와 합류한다.
분큐원년(1861년) 3월, 토사에 이구촌인상사건(井口村刃傷事件이구치무라닌쥬지켄)이 일어나 상사와 하사간의 대립이 깊어진다. 계신토사근왕사(維新土佐勤王史)에는 이 사건에 관해 「坂本等、一時池田の宅に集合し、敢て上士に抗する勢を示したり: 사카모토 등 한순간 이케다의 집에 집합해 결단하여 상사에 대항하는 기세를 드러내거나」라고 되어있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가 항복한 이케다 토라노신(池田虎之進)의 카이샤쿠(介錯) 할복하는 사람의 뒤에 있다가 목을 쳐 주는 사람
를 료마가 가서 그 피의 칼을 담궈서 하사의 단결을 맹세했다는 일화가 퍼져 있지만 이것은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의 소설 『한혈천리구(汗血千里駒)』의 픽션이다.
같은 해 4월, 다케지는 에도에 올라가 미도번, 죠슈번, 사츠마번 水藩、長州藩、薩摩藩
등의 여러 번들의 번사들과 교류를 가지고, 토사번의 근왕운동이 여러 번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알고, 타케지는 죠슈의 쿠사가 겐즈이(久坂 玄瑞), 사츠마번의 카바야마산엔(樺山三円)과 각번에 돌아가 번내 동지의 집결을 시도하여 번론(藩論)을 정리하고 이것을 좀 더 각번의 힘으로 조정의 권위를 강화하여 조정을 도와 막부에 대항하는 것으로 동맹을 하였다. 이것에 의해 같은 해 8월 타케지는 에도(江)에 은밀히 소수의 동지와 함께 토사근왕당(土佐勤王)을 결성하고 가맹일을 정한다.
타케치는 토사에 돌아가 19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료마는 9번째 필두로 가맹한다. 타케치가 근왕당을 결성한 목적은, 이것을 번내세력으로 번의 정책(주로 노공 야마우치요우토우山容堂의 의향)에 영향을 주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근왕당 결성 이후, 타케치는 번내(藩)의 사Tm쵸(薩長) 두 번(藩)의 정세에 관해 설명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토사도 이것에 끊임없이 존왕양이의 힘이 되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참정 요시다토우요우(吉田東洋)를 시작으로 한 당시의 번정부는 공무합체(公武合=코우부갓따이)가 번론의 주요한 방침으로, 근왕당의 존왕양이의 주장은 번내(藩)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4) 탈번
타케치는 번론을 전환하여 적극적인 방책을 강구하는 것과 함께 끊임없이 여러 번의 동향에 주의했다. 토사근왕동의 동지를 시코쿠, 츄고쿠, 큐슈(四、中、九州)등에 동정조사(動調査)를 위해 파견하였고, 료마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분큐원년(1861년) 10월, 일근야병치(日根野弁治)로부터 오구리류나덴목쿠로쿠(小栗流皆目) 小栗流和兵法三箇條
를 수여한 뒤에 료마는 마루카메번(丸藩)에 검술전의(검술수행)의 명목으로 토사를 나와 분큐2년(1862년)1월에 쵸슈 하지(長州萩)를 방문하여 쵸슈번에 있어서의 존왕운동의 주요인물로 있는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만나, 쿠사카로부터 타케지의 서간을 부탁하게 된다.
료마는 같은 해 2월에 그 임무를 끝내고 토사에 돌아가지만, 이 쯤 사쓰마번 국부 시마즈 히사미츠(島津 久光)의 병사가 되고 수도로 올라간 일(率兵上洛)이 토사에 전해졌다. 토사번은 그의 발을 밟고 있다고 좌절을 느끼고 있던 토사근왕당 동지 가운데는 탈번 해서 교토에 가거나, 사쓰마번의 근왕의거에 참가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나와 버렸다. 탈번은 번적(藩籍)으로부터 떨어져 일방적으로 주종관계의 구속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었다. 낭인(浪人)이 되어버린 탈번자는 번내에서는 죄인이 되고, 게다가 번내에 있는 가족, 친구도 연좌죄를 묻게 된다.
타케지는 번론을 바꾸어 거번근왕을 희망하여, 탈번하여 올라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하지만 일부의 동지가 탈번하는 것을 멈추지는 못하고, 우선 요시무리 토라타로(吉村 虎太)가, 다음으로 사와무라 소우노죠(村之丞)등이 탈번하여 여기에 료마도 탈번을 결의 한다.
료마의 탈번은 분큐2년(1862년) 3월 24일의 일로 당시 탈번한 사와무라 소우노죠(村之丞)의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료마가 탈번을 결의하자 형은 그의 이상(異)을 느끼고 경계하고, 일가와 친척친구에게 료마의 거동에 특별히 주의할 것을 요구해, 료마의 패도 허리에 찬 칼
는 모두 형인 고우헤이(平)가 몰수하고 만다. 이 때, 료마의 가장 가까운 누나인 오토메(乙女)가 고우헤이를 속이고 창고에 은밀히 들어가 고우헤이 비장의 칼 파전충광(肥前忠)을 료마가 떠나기 전에 줬다는 일화가 있다. 료마는 나스 신고(那須 信吾)를 도움을 받아 토사를 빠져나갔다.
카츠카이슈와 고베해군조련소(勝海舟と神海軍操練所)
료마는 분큐 2년 8월에 에도에 도착하여 오치바도장에 머무른다. 이 기간 료마는 토사번의 동지와 쵸슈의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타카스기 신사쿠(高杉 晋作)와 교류한다. 12월 5일 료마는 마사키 테츠마(間崎哲馬), 콘도 쵸지로(近藤長次)와 함께 막부정사총재직(幕府政事裁職)으로 있던 전 후쿠이번주 마츠다이라
안세이7년(1860년) 3월 3일 ,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에도성에 올라가는 도중에 사쿠라다문(田門) 밖에 미토탈번 떠돌이 무사들의 습격을 받아 암살당하게 된다.(田門外の) 사건이 사사에 전해지자 하사(下士=카시) 사이에서 논의가 들끓고 일어나 존왕양이(尊王攘夷=손노우죠우이)사상이 토사번 하사의 주류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료마의 친구였던 카케치한페타(武市半平太)가 무사수행을 위해 오카가 이조(岡田以) 등과 함께 토사로부터 길을 떠났다. 무사수행이라고 칭했지만, 사실은 서국제번(西諸藩)을 돌아 정세를 시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행은 우선 사누키 마루카메번(岐丸藩)에 들어가 비젠, 미마사카, 빗츄, 빗고, 아키노, 쵸슈(備前美作備中備後安芸長州)등을 거처 큐슈(九州)에 들어간다. 도중에 료마는 사카모토 나오(高松太,坂本直)와 합류한다.
분큐원년(1861년) 3월, 토사에 이구촌인상사건(井口村刃傷事件이구치무라닌쥬지켄)이 일어나 상사와 하사간의 대립이 깊어진다. 계신토사근왕사(維新土佐勤王史)에는 이 사건에 관해 「坂本等、一時池田の宅に集合し、敢て上士に抗する勢を示したり: 사카모토 등 한순간 이케다의 집에 집합해 결단하여 상사에 대항하는 기세를 드러내거나」라고 되어있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가 항복한 이케다 토라노신(池田虎之進)의 카이샤쿠(介錯) 할복하는 사람의 뒤에 있다가 목을 쳐 주는 사람
를 료마가 가서 그 피의 칼을 담궈서 하사의 단결을 맹세했다는 일화가 퍼져 있지만 이것은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의 소설 『한혈천리구(汗血千里駒)』의 픽션이다.
같은 해 4월, 다케지는 에도에 올라가 미도번, 죠슈번, 사츠마번 水藩、長州藩、薩摩藩
등의 여러 번들의 번사들과 교류를 가지고, 토사번의 근왕운동이 여러 번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알고, 타케지는 죠슈의 쿠사가 겐즈이(久坂 玄瑞), 사츠마번의 카바야마산엔(樺山三円)과 각번에 돌아가 번내 동지의 집결을 시도하여 번론(藩論)을 정리하고 이것을 좀 더 각번의 힘으로 조정의 권위를 강화하여 조정을 도와 막부에 대항하는 것으로 동맹을 하였다. 이것에 의해 같은 해 8월 타케지는 에도(江)에 은밀히 소수의 동지와 함께 토사근왕당(土佐勤王)을 결성하고 가맹일을 정한다.
타케치는 토사에 돌아가 19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료마는 9번째 필두로 가맹한다. 타케치가 근왕당을 결성한 목적은, 이것을 번내세력으로 번의 정책(주로 노공 야마우치요우토우山容堂의 의향)에 영향을 주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근왕당 결성 이후, 타케치는 번내(藩)의 사Tm쵸(薩長) 두 번(藩)의 정세에 관해 설명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토사도 이것에 끊임없이 존왕양이의 힘이 되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참정 요시다토우요우(吉田東洋)를 시작으로 한 당시의 번정부는 공무합체(公武合=코우부갓따이)가 번론의 주요한 방침으로, 근왕당의 존왕양이의 주장은 번내(藩)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4) 탈번
타케치는 번론을 전환하여 적극적인 방책을 강구하는 것과 함께 끊임없이 여러 번의 동향에 주의했다. 토사근왕동의 동지를 시코쿠, 츄고쿠, 큐슈(四、中、九州)등에 동정조사(動調査)를 위해 파견하였고, 료마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분큐원년(1861년) 10월, 일근야병치(日根野弁治)로부터 오구리류나덴목쿠로쿠(小栗流皆目) 小栗流和兵法三箇條
를 수여한 뒤에 료마는 마루카메번(丸藩)에 검술전의(검술수행)의 명목으로 토사를 나와 분큐2년(1862년)1월에 쵸슈 하지(長州萩)를 방문하여 쵸슈번에 있어서의 존왕운동의 주요인물로 있는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만나, 쿠사카로부터 타케지의 서간을 부탁하게 된다.
료마는 같은 해 2월에 그 임무를 끝내고 토사에 돌아가지만, 이 쯤 사쓰마번 국부 시마즈 히사미츠(島津 久光)의 병사가 되고 수도로 올라간 일(率兵上洛)이 토사에 전해졌다. 토사번은 그의 발을 밟고 있다고 좌절을 느끼고 있던 토사근왕당 동지 가운데는 탈번 해서 교토에 가거나, 사쓰마번의 근왕의거에 참가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나와 버렸다. 탈번은 번적(藩籍)으로부터 떨어져 일방적으로 주종관계의 구속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었다. 낭인(浪人)이 되어버린 탈번자는 번내에서는 죄인이 되고, 게다가 번내에 있는 가족, 친구도 연좌죄를 묻게 된다.
타케지는 번론을 바꾸어 거번근왕을 희망하여, 탈번하여 올라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하지만 일부의 동지가 탈번하는 것을 멈추지는 못하고, 우선 요시무리 토라타로(吉村 虎太)가, 다음으로 사와무라 소우노죠(村之丞)등이 탈번하여 여기에 료마도 탈번을 결의 한다.
료마의 탈번은 분큐2년(1862년) 3월 24일의 일로 당시 탈번한 사와무라 소우노죠(村之丞)의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료마가 탈번을 결의하자 형은 그의 이상(異)을 느끼고 경계하고, 일가와 친척친구에게 료마의 거동에 특별히 주의할 것을 요구해, 료마의 패도 허리에 찬 칼
는 모두 형인 고우헤이(平)가 몰수하고 만다. 이 때, 료마의 가장 가까운 누나인 오토메(乙女)가 고우헤이를 속이고 창고에 은밀히 들어가 고우헤이 비장의 칼 파전충광(肥前忠)을 료마가 떠나기 전에 줬다는 일화가 있다. 료마는 나스 신고(那須 信吾)를 도움을 받아 토사를 빠져나갔다.
카츠카이슈와 고베해군조련소(勝海舟と神海軍操練所)
료마는 분큐 2년 8월에 에도에 도착하여 오치바도장에 머무른다. 이 기간 료마는 토사번의 동지와 쵸슈의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타카스기 신사쿠(高杉 晋作)와 교류한다. 12월 5일 료마는 마사키 테츠마(間崎哲馬), 콘도 쵸지로(近藤長次)와 함께 막부정사총재직(幕府政事裁職)으로 있던 전 후쿠이번주 마츠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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