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삶과 작품세계 -산,들,벽공무한을 통해 바라본 이효석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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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효석의 삶과 작품세계 -산,들,벽공무한을 통해 바라본 이효석의 삶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

Ⅲ. 작품분석
 1. <산>,<들>
 2. <벽공무한>

Ⅳ. 맺음말

본문내용

이효석의 삶과 작품세계
-<산>,<들>,≪벽공무한≫을 통해 바라본 이효석의 삶과 문학-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
Ⅲ. 작품분석
1. <산>,<들>
2. <벽공무한>
Ⅳ. 맺음말

들어가며
그동안 현실 도피주의자나 자연주의 작가, 위장된 순응주의자로 알려진 이효석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이효석의 문학은 정치와 너무 멀었으므로 순응적, 도피적, 서정적이었다거나, 정치와 너무 가까웠으므로 식민지 작가였음에도 제국주의의 논리와 흡사한 사유 형태를 보여 준 작가로 평가되곤 한다. 이러한 이효석의 작품은 합리성에 기초한 근대 소설의 문법을 해체하고 있는 점과 내용적으로 일제 파시즘이 가열된 시기에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인간과 자연의 화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이효석의 문학에서는 좌절과 상실이 일상화된 식민지 현실에서도 미적 이상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바로 그의 작품 <산>과 <들>, ≪벽공무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을 통해 이효석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시대적 또는 체제 귀속적 성격을 증명하는 식의 이효석을 바라보는 평가에서 새롭게 발견한 시대적 환경을 초극하여 보여주는 독자적인 이효석 문학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
1. 출생과 가족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 이시후에게 오래 기다려지던 귀한 외아들이었다. 그리고 호적에 의하면 이효석의 모친은 강흥경으로 되어있는데, 이효석의 생모는 아니라고 한다. 이효석이 어렸을 때, 계모 강씨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부친이 이효석을 읍내에 입학시켜 하숙하게 했다고 한다. 이효석이 중등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을 떠난 후부터는 사실상 강원도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훗날 절친한 유진오는 이효석의 장녀 이나미에게 이효석이 학창시절에 한 번도 고향에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노라 는 말은 종종했다고 한다. 이상옥, 「이효석 - 문학과 생애 」, 민음사, 1992, p.220
심지어 계모 강씨가 이효석의 자녀를 처음 만난 것은 이효석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어린 시절부터 이효석이 모친을 잃고 부친과도 떨어져 오랫동안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런 가정환경이 훗날 이효석의 작풍 형성에 어떠한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것인가.다음으로 이효석에게 고향상실증과 같은 것이 있었다는 점이다. 평창 지역은 이효석이 초등학교 시절까지의 기억만 있고 성인이 되었을 때의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지방을 소설의 주제로 이용한 작품의 비중이 극히 낮은 것도 그 이유이다. 아래의 문답에서도 그러한 단서들이 나타난다.
1. 선생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 강원도 평창군.
2. 거기 잊을 수 없는 풍경 하나.
― 고기잡이 하고 목욕하던 강 연안.
3. 선생의 나신 집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헐렸는지 남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4. 고향을 그리는 때는 어떤 때입니까?
― 그러한 적 퍽 오래됩니다. (6. 289~290)
고향에 관한 시절의 글의 부탁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언제든지 잠시간은 어느 곳 이야기를 썼으면 좋을까를 생각하고 망설이고 주저한다. 나의 반생을 푸근하게 싸주고 생각과 감정을 그 고장의 독특한 성격에 맞도록 눅진히 길러준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7.102)
-1936년 11월호,《朝光》,「향수」
이러한 점들을 보았을 때, 고향인 봉평을 배경으로 한「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걸작을 한편밖에 쓰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학창시절
1910년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기까지 약 3년을 봉평에서 살았고 1912년에 다시 봉평으로 내려온 후에는 보통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서당에 다녔다. 이 봉평시절에 대한 그의 기억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훗날 그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의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몇몇 인물에 관계된 것들이다.
그가 서당에 다니던 시절에 봉평에는 충주집이라는 주막이 있었고, 이효석은 그의 글동무들과 함께 싸온 도시락은 이 주막에 맡겨 놓고 먹곤 하였다. 송씨라는 얼굴이 고운 여인이 있던 이 충주집에는 장날마다 봉평에서 드팀전을 벌리던 <곰보영감>이라는 장돌림이 드나들며 주인과 통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성씨는 허씨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허씨와 함께 장을 돌던 사람으로는 조봉근이라는 기골이 장대한 장사꾼도 있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허씨가 봉평장에 드나들 무렵에 봉평에는 조중원이라는 젊은이가 있어서 충주집에서 살다시피 했으나 장돌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봉평에서 이효석의 집안과 아주 가까이 지낸 인물로는 성공여라는 사람과 그의 딸 옥분이가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기울자 성씨 일가는 충북 제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옥분이가 허씨와 물방앗간에서 인연을 맺은 일이 있다는 소문이 충주집에서 흘러나왔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이효석은 훗날 이런 인물들을 허생원, 조선달 및 성서방네 처녀의 모델로 삼고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걸작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다. 이상옥, 위의 책, p.224
1920년 이효석은 평창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성적이 우수해서 무시험으로 경성제일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는 고보 시절에 러시아의 단편소설가인 체홉의 작품에 심취하는 등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학 수업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고보를 졸업하기 직전에 발표한 시 「봄」과 콩트 「여인」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업시대 문학청년의 습작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효석은 제일고보를 졸업하고 그해에 경성제국대학예과로 진학했는데 대학 예과 시절에 쓴 시들은 고보시절의 쓴 습작에 비해 상당한 진경을 보여준다. 다음은 「빨간 꽃」이라는 제목의 시 전편이다.
피를 삼켰는가
태양을 먹었는가
빨간 빨간
너의 그 붉은 빛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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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1.01
  • 저작시기2014.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9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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