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대 사이버강의 한국사 기말족보(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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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주대 사이버강의 한국사 기말족보(2013)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9주차 1교시.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
9주차 2교시.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
10주차 1교시. 조선 사회의 문화
10주차 2교시. 조선 사회의 문화
11주차 1교시.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상
11주차 2교시.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상
12주차 1교시. 개화세력의 성장
12주차 2교시. 개화세력의 성장
13주차 1교시. 대한제국과 민족의 수난
13주차 2교시. 대한제국과 민족의 수난
14주차 1교시.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의 수호
14주차 2교시.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의 수호
15주차 1교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주주의의 성장
15주차 2교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주주의의 성장

본문내용

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처음으로 제시
편당적 조처
· 오히려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관리로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
· 노론 중심의 일당전제화로 실패
※ 숙종의 왕권강화책
· 대동법 실시 :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까지 실시
· 전정(田政) 실시 : 서북지역을 제외하고 전국 양전을 실시하여 종결
· 주전실시 : 상평통보 주조 통용(상평청, 호조, 공조, 훈련도감, 총융청, 개성부)
· 북한산성 개축(1712) : 영의정 이유의 건의
· 금위영 신설 : 5군영체제 완비
· 백두산 정계비 세움(1712)
· 일본에 통신사 파견(1682, 1711) : 왜인의 울릉도 출입금지, 울릉도 귀속처리함.
· 『대전속록』『신증동국여지승람』『선원계보』『북관지』『신전자초방』간행
나. 숙종의 탕평정치(1674~1720)
즉위 초 탕평교서 발표
즉위직후 탕평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자신이 노론과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여 오히려 정국을 더욱 어지럽게 함으로써 실패
영조의 정통성 논란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가 영조의 정통을 부정하고 노론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여 왕과 신하사이의 의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
탕평파 육성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는 노·소의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파(완론탕평)’를 육성하고, 국왕 중심의 탕평정치를 통해 정국 운영
붕당의 기반약화
·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
· 이조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후임자를 천거하는 낭천권과, 3사의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없앰
· 일반민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를 부활하고, 궁 밖에 자주 나가서 직접 민의를 수렴함
다. 영조의 완론 탕평정치
※ 이인좌의 난(영조 4년, 1728)
소론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무장봉기. 중소상인과 노비를 규합하여 청주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한성으로 북진하다가 안성과 죽산전투에서 병조판서 오명환이 지휘하는 관군에 패함
라. 영조 탕평정치의 한계
· 강력한 왕권에 의해 일시적으로 당쟁이 억제됨
※ 영조의 개혁정책
· 균역법 시행(1750) : 균역 부담을 완화하고자 균역법 시행
·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춤
· 형벌제도의 정비 :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
· 『속대전』『속오례의』『무원록 : 법의학서』편찬
※ 나주괘서사건(영조31년, 1755)
소론의 윤지는 숙종 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으나 영조 즉위년에 노론의 공격에 휘말려 나주로 유배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나주목사 이하징 등과 모의한 후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대자보에 써서 나주객사에 붙였다가 전라감사 조운규에게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 소론강경파에 의한 나주괘서사건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해지고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되어 불균형을 이룸
배경
· 사도 제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간의 갈등을 경험함으로 영조 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추진
· 정조는 즉위 후 노론 벽파를 물리치고 남인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시도
준론탕평
· 당파의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리는 준론탕평을 시행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 환관 등을 제거
·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의 시파를 중용
한계
· 문물을 정비하면서 절대왕정을 과시한 정조였지만 붕당사이의 융화나 붕당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함
· 탕평론 자체는 전제적 통치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것이기에 근본적인 당쟁의 모순을 시정할 수 없었음
마. 정조의 준론 탕평정치(1776~1800)
※ 시파와 벽파 : 시파(남인+소론+노론 일부)는 사도 세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죽음자체는 지나치다는 입장이고, 벽파(노론 중 강경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고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하였음
※ 정조의 왕권강화책
· 능력 중시 등용(서얼출신 등용, 규장각의 검서관)
· 규장각 설치 : 왕실도서관,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검서관으로 정치에 참여
· 초계문신제의 시행 : 신하를 재교육함
· 장용영 설치 : 친위부대
· 수원 화성 건설 : 정치적, 군사적 기능 도시로 육성
· 수령의 권한 강화 :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 국가의 통치력 강화
· 『대전통편: 법전』『동문휘고: 외교문서집』『탁지지: 경제서』『추관지: 형율 법령집』『규장전운: 음운정리』『홍재전서: 정조의 개인문집』『무예도통지: 병법서』등을 편찬
9주차. 사림세력의 등장과 민족의 시련(2교시)
임진왜란
1) 왜란 전의 정세
① 조선의 정세
가. 잦은 왜변의 발생
·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왜란이후에도 왜인들의 소요는 계속됨
· 중종 39년(1544)에 사량진왜변, 명종 10년(1555)에 을묘왜변을 일으킴 → 정부에서는 군국기무를 맡아보는 새로운 기관으로 비변사를 상설화
나. 국방 문제에 소홀
· 일부 사림은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나 지배층은 당쟁으로 분열되어 국방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
· 당시 조선 사회는 아직 병농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농민들은 포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받고, 대신 정부가 용병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정예군을 유지할 수 없었음
· 이이는 임진왜란 10년 전에 국방을 위하여 십만양병을 주장하였지만, 안일한 생활과 고식적인 대책에 만족하고 있던 당시의 지배층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
다. 국론의 분열
: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가 대마도주를 시켜 수교를 교섭 →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그곳의 실정과 토요토미의 저의를 정탐케 함)
· 서인 정사 황윤길 “장차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
동인 부사 김성일은 반대되는 의견을 내어 논의가 분분함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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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14
  • 저작시기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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