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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목차
제 1 편 原始社會
제1장 석기시대의 문화
Ⅰ.구석기시대의 문화
Ⅱ.신석기시대의 문화
제2장 청동기문화와 군장국가
Ⅰ.청동기문화
Ⅱ.군장국가
제 2 편 古代社會
제1장 초기국가의 형성
Ⅰ.국가의 성립
Ⅱ.고조선과 한군현
Ⅲ.초기국가의 확대
Ⅳ.초기국가의 사회와 문화
제2장 고대국가의 발전
Ⅰ.고대국가의 성립
Ⅱ.고대국가의 발전
Ⅲ.고대국가의 대외관계와 濟․麗의 붕괴
Ⅳ.고대국가의 정치구조와 사회
Ⅴ.고대국가의 문화
제3장 남북국가의 발전
Ⅰ.남북국가의 성립
Ⅱ.통일신라의 발전과 정치․경제
Ⅲ.통일신라의 문화
Ⅳ.발해의 발전과 사회․문화
제4장 신라후기의 사회변동
Ⅰ.골품사회의 동요
Ⅱ.지방세력의 대두와 후삼국
Ⅲ.사상계의 변화
제3편 中世社會
제1장 문벌귀족사회의 형성
Ⅰ. 고려의 건국과 집권화정책.
Ⅱ. 귀족사회의 성립
제2장 귀족사회의 발전
Ⅰ. 귀족사회의 지배체제
Ⅱ. 귀족사회의 경제제도
Ⅲ. 귀족사회의 사회구조
Ⅳ. 국가사회의 문화
Ⅴ. 귀족사회의 대외정책
제3장 무신란과 무신정권
Ⅰ. 귀족사회의 동요와 무신란
Ⅱ. 무신정권의 성립
제4장 고려후기사회의 변동
Ⅰ. 권문세족의 집권
Ⅱ. 신흥사대부의 대두
Ⅲ. 정치체제의 변동
Ⅳ. 고려문화의 새 경향
제 4 편 近世社會
제 1 장 양반관료사회의 성립과 집권체제의 확립
Ⅰ. 양반관료사회의 성립
Ⅱ. 집권체제의 확립
제 2 장 양반관료사회의 발전
Ⅰ. 양반관료사회의 정치구조
Ⅱ. 양반관료사회의 사회경제구조
Ⅲ. 양반관료사회의 사상과 문화
Ⅳ. 조선전기의 대외관계
제 3 장 사림정치와 대외항쟁
Ⅰ. 사림세력의 대두와 사림정치
제 4 장 양반체제의 개편
Ⅰ.정치체제의 변질
Ⅱ. 수취체제의 개편
제 5 장 조선후기의 사회․사상의 새 기운
Ⅰ. 경제․사회의 발전
Ⅱ. 사상․문화의 새 기운
Ⅲ. 신종교의 유포
Ⅳ. 양반관료사회의 파탄과 민중항쟁의 폭발
제5편 近代社會
제1장 근대화의 추진
Ⅰ. 대원군의 정치와 개항
Ⅱ. 개화운동과 척사운동
Ⅲ. 개화와 보수의 갈등
Ⅳ.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
Ⅴ. 근대적 개혁의 추진
제2장 제국주의침략과 국권수호운동
Ⅰ. 독립협회의 활동과 대한제국
Ⅱ. 일제의 국권침탈과 의병운동
Ⅲ.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제3장 국권회복운동의 전개
Ⅰ. 민족의 수난
Ⅱ. 3.1운동
Ⅲ. 식민지통치체제의 변화
Ⅳ. 민족운동의 새 단계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
제1장 석기시대의 문화
Ⅰ.구석기시대의 문화
Ⅱ.신석기시대의 문화
제2장 청동기문화와 군장국가
Ⅰ.청동기문화
Ⅱ.군장국가
제 2 편 古代社會
제1장 초기국가의 형성
Ⅰ.국가의 성립
Ⅱ.고조선과 한군현
Ⅲ.초기국가의 확대
Ⅳ.초기국가의 사회와 문화
제2장 고대국가의 발전
Ⅰ.고대국가의 성립
Ⅱ.고대국가의 발전
Ⅲ.고대국가의 대외관계와 濟․麗의 붕괴
Ⅳ.고대국가의 정치구조와 사회
Ⅴ.고대국가의 문화
제3장 남북국가의 발전
Ⅰ.남북국가의 성립
Ⅱ.통일신라의 발전과 정치․경제
Ⅲ.통일신라의 문화
Ⅳ.발해의 발전과 사회․문화
제4장 신라후기의 사회변동
Ⅰ.골품사회의 동요
Ⅱ.지방세력의 대두와 후삼국
Ⅲ.사상계의 변화
제3편 中世社會
제1장 문벌귀족사회의 형성
Ⅰ. 고려의 건국과 집권화정책.
Ⅱ. 귀족사회의 성립
제2장 귀족사회의 발전
Ⅰ. 귀족사회의 지배체제
Ⅱ. 귀족사회의 경제제도
Ⅲ. 귀족사회의 사회구조
Ⅳ. 국가사회의 문화
Ⅴ. 귀족사회의 대외정책
제3장 무신란과 무신정권
Ⅰ. 귀족사회의 동요와 무신란
Ⅱ. 무신정권의 성립
제4장 고려후기사회의 변동
Ⅰ. 권문세족의 집권
Ⅱ. 신흥사대부의 대두
Ⅲ. 정치체제의 변동
Ⅳ. 고려문화의 새 경향
제 4 편 近世社會
제 1 장 양반관료사회의 성립과 집권체제의 확립
Ⅰ. 양반관료사회의 성립
Ⅱ. 집권체제의 확립
제 2 장 양반관료사회의 발전
Ⅰ. 양반관료사회의 정치구조
Ⅱ. 양반관료사회의 사회경제구조
Ⅲ. 양반관료사회의 사상과 문화
Ⅳ. 조선전기의 대외관계
제 3 장 사림정치와 대외항쟁
Ⅰ. 사림세력의 대두와 사림정치
제 4 장 양반체제의 개편
Ⅰ.정치체제의 변질
Ⅱ. 수취체제의 개편
제 5 장 조선후기의 사회․사상의 새 기운
Ⅰ. 경제․사회의 발전
Ⅱ. 사상․문화의 새 기운
Ⅲ. 신종교의 유포
Ⅳ. 양반관료사회의 파탄과 민중항쟁의 폭발
제5편 近代社會
제1장 근대화의 추진
Ⅰ. 대원군의 정치와 개항
Ⅱ. 개화운동과 척사운동
Ⅲ. 개화와 보수의 갈등
Ⅳ.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
Ⅴ. 근대적 개혁의 추진
제2장 제국주의침략과 국권수호운동
Ⅰ. 독립협회의 활동과 대한제국
Ⅱ. 일제의 국권침탈과 의병운동
Ⅲ.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제3장 국권회복운동의 전개
Ⅰ. 민족의 수난
Ⅱ. 3.1운동
Ⅲ. 식민지통치체제의 변화
Ⅳ. 민족운동의 새 단계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
본문내용
신라사가 한국사의 정통이 되고 발해사는 주류에서 벗어난 것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이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한국민족융합의 중심체가 되었고 그 역사가 다시 고려로 계승되었는데 반하여, 발해는 이민족인 말갈인을 국민의 기저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발해가 멸망한 후 그의 정치적문화적 유산이 계승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발해의 멸망은 비록 그 지배층이 고려에 흡수됨으로써 민족의 통일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하는 것이지만, 반면 만주지방을 한국민족의 역사무대에서 떠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점에 아쉬움이 있는 것이었다.
Ⅱ.통일신라의 발전과 정치경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고구려백제 및 당과 항쟁하던 정력을 모두 안으로 쏟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면서 국력을 신장시키고 정치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신라의 통일 이후에 들어서 나타난 커다란 변화는 무열왕계의 왕통이 계속되고 전제왕권이 확립된 점이었다. 성덕왕을 거쳐 경덕왕 때에 이르면 전제왕권이 더욱 안정되고 통일신라는 극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聖德大王神鍾을 주조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의 강력한 왕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때 관부와 지명을 한식으로 고치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것도 당시 신라의 정치력과 문화 역량을 과시한 것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통치하기 위하여 보다 정비된 정치제도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중대에는 중앙의 정치기구가 확대되고 지방행정 조직도 재편성되는 조치가 취하여지게 되었다. 신라는 정치 구조를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재편하면서 율령을 중시하였다. 특히, 집사부의 기능을 크게 강화하였는데, 집사부는 귀족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부의 성격을 가졌으며, 국가의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를 중심으로 병부, 창부, 예작부 등 14개의 관청으로 정비되어 행정 업무가 분담되었다. 전제 왕권의 확립에 따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세력이 약화되어 간 반면, 왕권을 대변하는 집사부의 시중은 그 지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 체제는 신라의 독자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는 전제 왕권이 진골 귀족 세력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 관청과 행정구역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관료 조직을 재정비함으로써 집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귀족 세력의 반발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신라는 통일 이후 지방 제도도 전면적으로 재조정하였다. 그러나 제도의 성격 자체는 이전의 제도를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서 그 기본은 주, 군, 현이었다. 그리하여 신문왕 때에는 9주 5소경의 지방 제도가 마련되었다. 확대된 신라의 영토는 9주로 나누어졌는데, 주에는 총관이, 주 아래의 군현에는 태수와 현령이 각각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그리고 주군에는 감찰 임무를 가진 외사정을 둠으로써 중앙 집권적 통치 조직을 강화하였다. 5소경제 역시 통일 이전의 제도를 발전시킨 것인데, 옛 삼국의 위치를 고려하여 금관경, 서원경, 남원경, 북원경, 중원경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수도가 지나치게 동남쪽에 치우쳐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지방 통치의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통제하고, 지방 사회에 문화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었다. 지방 제도의 정비는 결국 신라가 새로 차지한 지역에 대한 통치 기반을 확대한 것이었으므로 반항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특수한 역을 부과하여 향, 부곡으로 편입하였다. 그 밖에 지방의 세력가들을 통제하기 위한 필요에서 상수리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군사력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팽창하였는데, 삼국통일이 완료되자 군사조직의 재편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재편성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이 된 것은 전제왕권의 밑받침이 되는 중앙군의 강화였다. 이렇게 개편된 새로운 중앙의 군사조직이 바로 9서당이었다. 서당이란 모병에 의해서 조직된 군대로서 이미 통일 전부터 있어 왔는데 통일 후인 신무왕 때 9서당으로 완성되었으니, 이들은 왕경에 주둔하면서 국왕에 직속된 특수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중앙군의 핵심이 된 것이 9서당인 데 대하여 지방군의 중심을 이룬 것은 10정이었다. 10정은 9주에 각각 하나씩 설치되고 다만 국방상 요지인 漢州에만 2정을 두었는데, 이는 통일신라의 주가 군사적인 조직과 결합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Ⅲ.통일신라의 문화
통일신라는 그의 확대된 사회적 기반과 경제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하고 새로 편입된 고구려백제의 문화를 융합하여 하나의 민족문화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盛唐의 문화를 중심으로 한 외래문화를 흡수가미함으로써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문화진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유학의 발달이었다. 통일신라 때 유학이 발달하였음은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정비를 보아 알 수 있다. 682년에 國學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서는 교과를 3과로 나누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국학의 설치와 독서 3품과의 실시는 유학의 발달과 많은 유학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학자 중에는 6두품 출신이 많은 것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6두품 출신들은 국학에 입학하거나 도당하여 유학하고 유학자가 되는 사람이 특히 많았던 것이다. 이는 6두품 출신들이 골품사회의 신분제약을 학문적능력에 의하여 극복하려 하였고, 진골귀족들로서도 이들을 행정적인 실무에 이용하기 위해서 이들의 수학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유학이 주로 귀족사회에서 발달하였는데 대하여 신라의 시가인 향가는 일반 민간에도 퍼져 있었다. 향가는 이미 통일 전부터 만들어졌으나 통일신라에 들어와 더욱 발달하였는데, 특히 승려와 화랑들 사이에서 많은 작품이 나와 종교적인 색채를 띤 것이 많았다. 통일기의 원효도 향가를 만들어 유명하였는데, 그의 작품인 <무애가>는 당시 민간에 널리 불려
Ⅱ.통일신라의 발전과 정치경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고구려백제 및 당과 항쟁하던 정력을 모두 안으로 쏟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면서 국력을 신장시키고 정치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신라의 통일 이후에 들어서 나타난 커다란 변화는 무열왕계의 왕통이 계속되고 전제왕권이 확립된 점이었다. 성덕왕을 거쳐 경덕왕 때에 이르면 전제왕권이 더욱 안정되고 통일신라는 극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聖德大王神鍾을 주조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의 강력한 왕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때 관부와 지명을 한식으로 고치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것도 당시 신라의 정치력과 문화 역량을 과시한 것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통치하기 위하여 보다 정비된 정치제도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중대에는 중앙의 정치기구가 확대되고 지방행정 조직도 재편성되는 조치가 취하여지게 되었다. 신라는 정치 구조를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재편하면서 율령을 중시하였다. 특히, 집사부의 기능을 크게 강화하였는데, 집사부는 귀족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부의 성격을 가졌으며, 국가의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를 중심으로 병부, 창부, 예작부 등 14개의 관청으로 정비되어 행정 업무가 분담되었다. 전제 왕권의 확립에 따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세력이 약화되어 간 반면, 왕권을 대변하는 집사부의 시중은 그 지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 체제는 신라의 독자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는 전제 왕권이 진골 귀족 세력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 관청과 행정구역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관료 조직을 재정비함으로써 집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귀족 세력의 반발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신라는 통일 이후 지방 제도도 전면적으로 재조정하였다. 그러나 제도의 성격 자체는 이전의 제도를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서 그 기본은 주, 군, 현이었다. 그리하여 신문왕 때에는 9주 5소경의 지방 제도가 마련되었다. 확대된 신라의 영토는 9주로 나누어졌는데, 주에는 총관이, 주 아래의 군현에는 태수와 현령이 각각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그리고 주군에는 감찰 임무를 가진 외사정을 둠으로써 중앙 집권적 통치 조직을 강화하였다. 5소경제 역시 통일 이전의 제도를 발전시킨 것인데, 옛 삼국의 위치를 고려하여 금관경, 서원경, 남원경, 북원경, 중원경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수도가 지나치게 동남쪽에 치우쳐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지방 통치의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통제하고, 지방 사회에 문화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었다. 지방 제도의 정비는 결국 신라가 새로 차지한 지역에 대한 통치 기반을 확대한 것이었으므로 반항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특수한 역을 부과하여 향, 부곡으로 편입하였다. 그 밖에 지방의 세력가들을 통제하기 위한 필요에서 상수리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군사력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팽창하였는데, 삼국통일이 완료되자 군사조직의 재편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재편성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이 된 것은 전제왕권의 밑받침이 되는 중앙군의 강화였다. 이렇게 개편된 새로운 중앙의 군사조직이 바로 9서당이었다. 서당이란 모병에 의해서 조직된 군대로서 이미 통일 전부터 있어 왔는데 통일 후인 신무왕 때 9서당으로 완성되었으니, 이들은 왕경에 주둔하면서 국왕에 직속된 특수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중앙군의 핵심이 된 것이 9서당인 데 대하여 지방군의 중심을 이룬 것은 10정이었다. 10정은 9주에 각각 하나씩 설치되고 다만 국방상 요지인 漢州에만 2정을 두었는데, 이는 통일신라의 주가 군사적인 조직과 결합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Ⅲ.통일신라의 문화
통일신라는 그의 확대된 사회적 기반과 경제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하고 새로 편입된 고구려백제의 문화를 융합하여 하나의 민족문화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盛唐의 문화를 중심으로 한 외래문화를 흡수가미함으로써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문화진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유학의 발달이었다. 통일신라 때 유학이 발달하였음은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정비를 보아 알 수 있다. 682년에 國學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서는 교과를 3과로 나누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국학의 설치와 독서 3품과의 실시는 유학의 발달과 많은 유학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학자 중에는 6두품 출신이 많은 것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6두품 출신들은 국학에 입학하거나 도당하여 유학하고 유학자가 되는 사람이 특히 많았던 것이다. 이는 6두품 출신들이 골품사회의 신분제약을 학문적능력에 의하여 극복하려 하였고, 진골귀족들로서도 이들을 행정적인 실무에 이용하기 위해서 이들의 수학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유학이 주로 귀족사회에서 발달하였는데 대하여 신라의 시가인 향가는 일반 민간에도 퍼져 있었다. 향가는 이미 통일 전부터 만들어졌으나 통일신라에 들어와 더욱 발달하였는데, 특히 승려와 화랑들 사이에서 많은 작품이 나와 종교적인 색채를 띤 것이 많았다. 통일기의 원효도 향가를 만들어 유명하였는데, 그의 작품인 <무애가>는 당시 민간에 널리 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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