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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죽었고, 반계 거사(磻溪居士) 유형원(柳馨遠) 같은 분은 군량(軍糧)을 조달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저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 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구왕(九王)의 머리를 살 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변씨는 본래 이완(李浣) 이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어영 대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위항(委巷)이나 여염(閭閻)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종해서 3 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이 대장은 구종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 대장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이 대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변씨는 이 대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대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대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받는 신하로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서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 대장의 간청을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명(明)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가 있다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 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 보내고, 훈척(勳戚) 권귀(權貴)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 정부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중국 민족과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섬기게 되어 저들이 우리를 가장 믿는 터이다. 진실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벼슬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상인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국중에 자제들을 가려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그 중 선비는 가서 장사를 하면서, 저 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한 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명나라 황족에서 구해도 사람을 얻지 못할 경우, 천하의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적당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한다면, 잘 되면 대국(大國)의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뽑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소매 넓은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 대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 어휘 풀이
장인바치 : 물품을 만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공인(工人)
운종가(雲從街) : 지금 서울의 종로(鐘路)
읍(揖) : 인사하는 예의의 한 가지.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고 구부렸다가 펴면서 두 손을 내림
실띠 : 조선 시대 양반들이 실을 꼬아 가슴께로 두르던 띠
술 : 가마, 기(旗), 띠, 끈이나 여자의 옷 등에 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
갖신 : 가죽으로 만든 신
중언부언(重言復言) :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
입수(入手) : 수중에 들어옴. 또는 수중에 넣음
삼남(三南) : 충청, 경상, 전라의 총칭
말총 :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
대경(大驚)해서 : 크게 놀라서
양민(良民) : 선량한 백성
온전(穩全) : 결점이나 흠이 없이 완전함
비축(備蓄) :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저축하여
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변씨는 본래 이완(李浣) 이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어영 대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위항(委巷)이나 여염(閭閻)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종해서 3 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이 대장은 구종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 대장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이 대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변씨는 이 대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대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대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받는 신하로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서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 대장의 간청을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명(明)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가 있다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 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 보내고, 훈척(勳戚) 권귀(權貴)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 정부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중국 민족과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섬기게 되어 저들이 우리를 가장 믿는 터이다. 진실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벼슬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상인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국중에 자제들을 가려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그 중 선비는 가서 장사를 하면서, 저 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한 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명나라 황족에서 구해도 사람을 얻지 못할 경우, 천하의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적당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한다면, 잘 되면 대국(大國)의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뽑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소매 넓은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 대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 어휘 풀이
장인바치 : 물품을 만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공인(工人)
운종가(雲從街) : 지금 서울의 종로(鐘路)
읍(揖) : 인사하는 예의의 한 가지.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고 구부렸다가 펴면서 두 손을 내림
실띠 : 조선 시대 양반들이 실을 꼬아 가슴께로 두르던 띠
술 : 가마, 기(旗), 띠, 끈이나 여자의 옷 등에 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
갖신 : 가죽으로 만든 신
중언부언(重言復言) :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
입수(入手) : 수중에 들어옴. 또는 수중에 넣음
삼남(三南) : 충청, 경상, 전라의 총칭
말총 :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
대경(大驚)해서 : 크게 놀라서
양민(良民) : 선량한 백성
온전(穩全) : 결점이나 흠이 없이 완전함
비축(備蓄) :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저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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