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4_19 혁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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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4_19 혁명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1)혁명의 의미
(2)4.19발생원인
(3)전개과정
(4)허정의 과도정부
(5)제2공화국
(6)비교사례
3.결론

본문내용

진영의 일국이라는 점, 또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당 조직 내 도처에 남아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영향력과 당내의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고무우카의 지도력의 한계 등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요구들은 사실상 실행되기 어려웠다.
3. 결 론
이제까지 419로부터 시작하여 허정의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면 419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가에 따라 419가 혁명인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혁명이라면 어떤 성격의 혁명인가에 대한 학계의 논의를 알아보자.
이러한 논쟁을 보면 크게 419를 혁명으로 보지 않는 시각과 혁명으로 보는 시각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주로 419를 의거 내지 정치적 봉기로 보는 이론이 중심을 이루며, 후자는 419를 시민혁명으로 보아야 하느냐, 민중혁명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미완의 혁명 내지 기타의 그 무엇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논쟁이 중심을 이룬다.
419를 혁명이 아니라 의거 내지 정치적 봉기로 보는 관점은 가급적 엄격하고도 사회과학적인 혁명 개념에 입각하여 419를 보려 한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대체로 혁명은 폭력을 수반한 급격한 변동에 의해 사회정치 체제의 대규모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혁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그런데 419는 사회 정치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하지도 않았고, 자유당에서 민주당이라는 또 하나의 보수적 정치집단으로 정권이 넘어간 데 불과하며, 혁명 주도 세력과 이념, 프로그램, 유토피아가 불분명했고, 자연발생적이고 즉흥적인 정치적 사건으로서 독재와 부패에 항거하여 정권의 구조에 변화를 초래한 정치적 변동의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다만 의거 또는 정치적 봉기 내지 자주자유민주형 변혁에 해당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학문적 엄격성에 충실하려는 입장은 이해가 되지만, 혁명에 대한 개념 규정에도 여러 이론이 있고, 대규모의 근본적인 사회정치 질서의 변혁이 없는 경우에도 혁명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 419에는 혁명의 주도세력이 있었고 또 자유, 민주, 민족, 자주의 이념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419의 의미와 가치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통해 이어지고 또 발전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점등을 고려할 때 단순히 419를 정치적 봉기나 의거로 규정하려는 것은 다소 미흡하다고 하겠다.
한편, 419를 혁명으로 보려는 시각 중 시민혁명론에 의하면 419는 시민민주혁명으로 파악된다. 서구의 영불로의 3대 근대화혁명 과정과 비교해 볼 때, 전제정치 내지 봉건적 절대주의의 구제도를 타도하고 국민주권을 확립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근대적인 국민국가, 근대적인 시민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시민민주혁명이고 보면, 이승만 일인지배체제의 독재와 반봉건적전제적 신 절대주의 정치 질서를 타파한 419는 바로 시민민주혁명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민혁명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수긍되는 바가 없지 않으나, 혁명의 자연사학파의 이론에 기초하여 서구의 근대화 3대혁명과 4월 혁명을 단순 비교한 데에는 논리적 비약의 문제가 있으며, 시민혁명이라는 용어를 서구에서 절대 군주체제를 붕괴시키고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이룩한 이른바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의 조건과는 잘 맞지 않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419를 민중혁명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와는 또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이 입장은 한국의 근대사를 민중운동사의 측면에서 그리고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한 실천을 민중민주 변혁론의 관점에서 볼 것을 요구하면서, 419는 이승만 정권의 반역사적 독재체제에 항거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출발하였지만, 그 결과로 2공화국이 일단 성립하고 난 다음부터는 그 방향이 급격히 민족통일운동으로 발전되어 간 분단시대 민중운동의 거대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419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거나, 당시 한국 사회는 외세를 타도하고 극심한 민중 소외를 극복할 민족적민주적민중적 변혁의 과제를 안고 있었는바, 419는 바로 이러한 때에 민주주의와 진정한 민족해방의 실현을 위해 일어난 민중혁명이었으며, 당시 사회구조상 민중세력이 아직 변혁을 주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부득이 학생들이 나서게 된 대리혁명이었고, 나아가 학생들의 한계와 장면정권의 비혁명성, 그리고 군부의 반동으로 혁명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자유와 민주가 완수되지 않아 아직도 혁명이 계속되고 있는 미완의 혁명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419를 민중혁명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목적 지향적일 뿐만 아니라 경험적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분석이 되지 못한다는 점, 학생들과 지식인 그리고 시민들이 주체가 된 419를 바로 민중과 연결 지어 민중혁명 내지 대리혁명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경험적논리적 근거가 박약하다는 점, 그리고 419혁명의 원인을 경제적구조적 결정론에 입각하여 설명하려 한 데 따른 사실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등을 고려해 볼 때 대체로 수긍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정권의 권력구조와 정치의식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419는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지도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민주당 지도층에서는 자기네들이 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앞장을 섰다고 주장하였지만, 시위대중 사이에서 그들의 실제지도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이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볼 때, 419는 우리의 역사에 있어 분명히 정치적 봉기나 의거를 넘는 혁명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식인과 일반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민주민족주의적 사회정치 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매진한 시민혁명이었으며, 비록 당시에는 좌절되었으나 우리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계속적으로 그 완성을 추구해 나가야 할 미완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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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27
  • 저작시기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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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99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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