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지식인상 ; 피에르 아벨라르 [Pierre Abelard, 1079 ~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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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2세기 지식인상 ; 피에르 아벨라르 [Pierre Abelard, 1079 ~ 1142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12세기 지식인의 출현
1) 지식을 판매하는 자
2) 논리적 명료성의 추구

III. 전사적 지식인
1) 전통에의 도전
2) 지적 영역의 확장

IV. 결론

본문내용

통해 탐구로 나아가게 되고, 탐구를 통해 진리를 포착하게 된다\"10)는 경구는 아벨라르의 지적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아벨라르는 모든 것을 부정한 회의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아벨라르는 사실 내지 명제가 왜 그렇게 되었던가 즉 결과에 대한 의문의 제기로부터 학문적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모든 학문과 지식의 궁극적인 목표가 지혜의 추구에 있으며, 이를 구현하기 위한 첫 단계가 사실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합리적 토론과 논쟁을 통해 검증되지 아니한 여하한 사실도 \'학문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었다. 또한 아벨라르는 \"모든 사건에는 그 원인이 있다\"는 신념에 기초하여 문제에 접근하였다. 따라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이성의 주된 기능이며, 지성을 활용하는 것이 지식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이성은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자 그의 사유의 토대였다. 그런데 아벨라르가 지적 탐구에 주로 동원한 방법론은 언어학적 분석으로서, 이를 통해 철학적 진리 및 신학적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할 대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설명 가능한 무엇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이다.
원인을 설명하고자 아벨라르가 활용한 방법론 내지 교수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그의 지적 태도를 해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성서를 읽고 주해하는 전통적인 독회(lectio)에 입각한 연구와 강의에 머물지 않고 논증(disputatio)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 논증은 문제기기(questio)를 중심으로 토론, 대화, 대조 및 텍스트 비교 등을 통해 철학적인 쟁점 및 신학상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논쟁방식이었다. 이미 12세기에 신학에 있어서 전문화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신학은 성서(divina pagina), 교리(fides catholica) 및 교회법(lex ecclesiatica)으로 세분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고대의 저작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의 부활 또한 새로운 방법론의 대두에 중요한 원천을 제공하였다. 한편 아벨라르는 논리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련의 저작들인 『범주론』, 『해석론』 등이 보에티우스 및 포르피리우스(Phorphyry) 등을 통해 간접적이고 단편적으로 접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정통한 학자중의 하나였다. 당대의 논리학자들 역시 특정 이론을 지지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방식을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활용하였다. 처음부터 아벨라르의 주요한 지적 관심사는 논리학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논리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학문중의 학문\'(disciplina disciplinarium)으로서,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질서정연하게 해주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지적 장치였다.
아벨라르는 논리학적 방법론에 기초하여 성서 및 아우구스티누스, 성 제롬 등의 교부들이 제기한 신학상의 쟁점들을 해명하는데 주력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아벨라르가 중시한 것은 비판적 정신과 개방적인 자세를 통한 진리의 입증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입증함으로써 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아벨라르의 지적에서 이 같은 태도를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아벨라르가 논리적 명확성에 집착한 것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선과 악의 구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지식인이 논리적 구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선과 악의 구분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태만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논리적 중요성에 대해 거의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아벨라르는 지금까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간주되어 온 이론이나 교리 및 교부들의 견해 등을 포함한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 및 이에 대한 비판적 분석 그리고 그 조화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성인들의 몇몇 진술들이 상호 모순되거나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권위의 잘못된 속성이나 왜곡된 서술로 인해 주석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실하게 기다려야만 한다.11)
아벨라르에 의하면 신학적 쟁점이 되는 것은 주로 언어상의 문제점 그리고 필경사들의 단순한 실수에서 기인하는 서술상의 불일치 및 심지어 왜곡이라는 것이다. 아벨라르는 이들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언어학적 방법론을 적극 활용하였다. 성서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동일한 어휘에 대한 생경한 표현 방식과 그것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12)의 결핍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아벨라르의 진단이었다. 따라서 용어의 정확한 의미 포착과 이의 적확한 사용은 성서 및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한 모호한 점들을 명확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초인 것이다. 이 같은 아벨라르의 견해는 그리스도교의 신조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내지 추종이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에 유익하지 않다는 확고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아벨라르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가 토론과 탐구의 대상이 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도는 신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III. 전사적 지식인
1. 전통에의 도전
무엇보다 아벨라르는 전사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지적 상인으로서 무장을 하였던 아벨라르는 학문 그 자체의 내면적 원리인 논리적 정합성을 철저히 추구하였을 뿐마 아니라 지식인 세계를 둘러싼 외연에까지 이를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세계의 지적 권위 및 풍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아벨라르는 논쟁을 통해 윌리엄 샹포, 안셀름 랑 등의 지적 경쟁자들을 물리쳤으며, 지식을 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다. 특히 학교의 설립은 지식인이 학문적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아벨라르가 종교적 통제와 권위아래 놓여있었던 주교좌 성당학교에 비해 더욱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학교를 설립한 것은 학문적 자유의 승리를 상징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아벨라르가 학교를 설립한 것은 그의 꿈이 좌절된 부산물이기도 하다. 실상 그는 당대 최고 지적 기관이었던 노트르드 담 성당학교의 교사직을 염원하였으나, 윌리엄 샹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아벨라르는 노트르드 담에 대응할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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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27
  • 저작시기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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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9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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