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동독 문학의 시대적 배경 - 70년대 중반까지
2. 작가소개
3. 줄거리
4. Faust의 창조적 계승로서의 Hinze und Kunze
5. 인물 분석
6. 구성
7. 주제 및 작가의 메시지
참고도서
2. 작가소개
3. 줄거리
4. Faust의 창조적 계승로서의 Hinze und Kunze
5. 인물 분석
6. 구성
7. 주제 및 작가의 메시지
참고도서
본문내용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집단의 논리에 매몰되고 만다. 그래서 말리스가 타락하여 몸을 함부로 다루는 장면은 인간의 원천적인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탈출구로서의 극약처방이라고 할 수 있는, 말리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옳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어떤 애처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말리스의 절망과 슬픔은 새로운 회복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계기를 제공한다. 따라서, 오빠인 발렌틴의 죽음 등으로 정신 이상이 된 그레트헨에 의해서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게 되듯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절망한 말리스에 의해서 쿤쩨가 자신에 대해서 회의하게 될 뿐만 아니라 힌쩨의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결심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7. 주제 및 작가의 메시지
이 작품의 배경은 전후 폐허가 된 1948년경의 구동독이다. 45년에서 49년 소련이 점령지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만들어진 정책들은 바로 동독 사회주의 건설에 기초가 되었다. 당시 당의 슬로건은 ‘더 많이 생산하고, 정당하게 나누고, 더 잘 살자 Mehr produzieren, gerechter verteilen, besser leben!’ 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대답은 ‘우선 잘 먹고 그 다음에 일하자 Erst mehr essen, dann mehr arbeiten’ 였다. 이는 하나의 악순환이었는데, 48년 아돌프 헤네케 Adolf Hennecke라는 한 광부가 책임량보다 387퍼센트나 많은 탄을 캐는 일이 생긴다. 이는 책임량을 올리고 다른 광부들의 임금을 삭감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소련점령지역에서 ‘악티비스트 운동 Aktivistenbewegung’의 계기가 되었으나 광부들은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으며 헤네케를 규정파괴자로 몰았다. 힌쩨는 바로 그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는 하이너 뮐러의 <헐값 노동자 Der Lohndrucker 1956>의 주인공 발케 Balke의 모델이 48/49년 가마에 불을 끄지 않고 수리함으로써 사회주의 노동생산의 영웅적 업적을 이룬 인물인 Hans Garbe인 것과 유사하다. 브레히트도라는 제목으로 이 인물을 작품화하려 했다.
여기서 주요한 테마는 ‘이끄는 자’와 ‘이끌리는 자’ 사이의 모순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힌쩨가 이끌리는 자이고 쿤쩨가 이끄는 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모순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문제성이 어느 개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Hinz는 독일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에 하나인 Heinrich <파우스트>의 ‘마르테의 집 정원’에서 비로소 그레트헨은 처음으로 파우스트의 이름을 하인리히라고 부른다. 전설상의 파우스트는 요한네스 혹은 게오르크라는 이름이었으나 괴테는 지나치게 통속적이라고 생각하여 하인리히라고 고친 것인데, 이는 그레트헨과 파우스트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또, 파우스트에게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음으로써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일컫는 ‘그레트헨질문 Gretchenfrage’이라는 모티프가 여기에서 나온다.
의 단축형이고 Kunz는 Konrad의 단축형인데, Hinze und Kunze는 어중이 떠중이라는 의미와 이사람 저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힌쩨와 쿤쩨의 문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해당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협의로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혹은 권력과 노동자들 사이의 모순인데, 이것은 ‘베를린에서 온 결정’으로 상징되는 일방통행식의 의사소통구조에서 비롯되는, 노동자들에게 묻지도 않고 이루어진 토론이 되지 않은 결정에서 기인한다. 이는 하버마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가능적 재생산과 자기규정의 근본요건인 노동과 상호작용이, 사회주의라는 새로이 설정된 권위가 ‘합법화한 폭력’으로 작용되는 상호소통구조 속에서 체계적으로 왜곡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작업을 통해서 생산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인데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현실은 주체와 객체의 혼란, 나아가서는 정체성의 상실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힌쩨는 스스로 한 번도 질문을 받지 못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자신의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은 말리스의 비극을 통해서 더욱 증폭된다. 사회주의 건설이 개인적인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것이 만약 가능하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는지, 자기 실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과제보다 선행할 수는 없는 것인지, 어느 한 세대가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 포기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이면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의 길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함과 동시에 수많은 가능성들을 최대한 모색함으로써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끌리는 자인 힌쩨와 말리스 등만이 모순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끄는 자인 쿤쩨도 말리스의 비극을 통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느끼는 것은 어느 한 편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양 편의 노력과 변화를 향한 추구가 있어야만이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쿤쩨가 내미는 손을 힌쩨가 잡지 않는 것은 이끄는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며, 그런 의미에서 힌쩨와 쿤쩨가 함께 퇴장하는 장면은 현실은 암울하지만 끊임없는 현실 및 체제 비판을 통해서 바람직한 변화를 꾀한다면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은 아닐 것이라는 조심스런 낙관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도서
강두식 譯註, <파우스트 1,2부 : 해설과 주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88.
이효상 譯, <파우스트>, 동서문화사, 1995.
김광요 外 편역, <독일희곡선>, 한국문화사, 1995.
Wolfgang Beutin 外, 허창운 譯, <독일문학사 :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문학적 술화>, 삼영사, 1995.
“외국문학”, 1985년 겨울호.
“외국문학”, 1989년 가을호.
7. 주제 및 작가의 메시지
이 작품의 배경은 전후 폐허가 된 1948년경의 구동독이다. 45년에서 49년 소련이 점령지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만들어진 정책들은 바로 동독 사회주의 건설에 기초가 되었다. 당시 당의 슬로건은 ‘더 많이 생산하고, 정당하게 나누고, 더 잘 살자 Mehr produzieren, gerechter verteilen, besser leben!’ 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대답은 ‘우선 잘 먹고 그 다음에 일하자 Erst mehr essen, dann mehr arbeiten’ 였다. 이는 하나의 악순환이었는데, 48년 아돌프 헤네케 Adolf Hennecke라는 한 광부가 책임량보다 387퍼센트나 많은 탄을 캐는 일이 생긴다. 이는 책임량을 올리고 다른 광부들의 임금을 삭감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소련점령지역에서 ‘악티비스트 운동 Aktivistenbewegung’의 계기가 되었으나 광부들은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으며 헤네케를 규정파괴자로 몰았다. 힌쩨는 바로 그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는 하이너 뮐러의 <헐값 노동자 Der Lohndrucker 1956>의 주인공 발케 Balke의 모델이 48/49년 가마에 불을 끄지 않고 수리함으로써 사회주의 노동생산의 영웅적 업적을 이룬 인물인 Hans Garbe인 것과 유사하다. 브레히트도
여기서 주요한 테마는 ‘이끄는 자’와 ‘이끌리는 자’ 사이의 모순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힌쩨가 이끌리는 자이고 쿤쩨가 이끄는 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모순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문제성이 어느 개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Hinz는 독일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에 하나인 Heinrich <파우스트>의 ‘마르테의 집 정원’에서 비로소 그레트헨은 처음으로 파우스트의 이름을 하인리히라고 부른다. 전설상의 파우스트는 요한네스 혹은 게오르크라는 이름이었으나 괴테는 지나치게 통속적이라고 생각하여 하인리히라고 고친 것인데, 이는 그레트헨과 파우스트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또, 파우스트에게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음으로써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일컫는 ‘그레트헨질문 Gretchenfrage’이라는 모티프가 여기에서 나온다.
의 단축형이고 Kunz는 Konrad의 단축형인데, Hinze und Kunze는 어중이 떠중이라는 의미와 이사람 저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힌쩨와 쿤쩨의 문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해당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협의로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혹은 권력과 노동자들 사이의 모순인데, 이것은 ‘베를린에서 온 결정’으로 상징되는 일방통행식의 의사소통구조에서 비롯되는, 노동자들에게 묻지도 않고 이루어진 토론이 되지 않은 결정에서 기인한다. 이는 하버마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가능적 재생산과 자기규정의 근본요건인 노동과 상호작용이, 사회주의라는 새로이 설정된 권위가 ‘합법화한 폭력’으로 작용되는 상호소통구조 속에서 체계적으로 왜곡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작업을 통해서 생산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인데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현실은 주체와 객체의 혼란, 나아가서는 정체성의 상실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힌쩨는 스스로 한 번도 질문을 받지 못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자신의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은 말리스의 비극을 통해서 더욱 증폭된다. 사회주의 건설이 개인적인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것이 만약 가능하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는지, 자기 실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과제보다 선행할 수는 없는 것인지, 어느 한 세대가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 포기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이면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의 길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함과 동시에 수많은 가능성들을 최대한 모색함으로써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끌리는 자인 힌쩨와 말리스 등만이 모순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끄는 자인 쿤쩨도 말리스의 비극을 통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느끼는 것은 어느 한 편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양 편의 노력과 변화를 향한 추구가 있어야만이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쿤쩨가 내미는 손을 힌쩨가 잡지 않는 것은 이끄는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며, 그런 의미에서 힌쩨와 쿤쩨가 함께 퇴장하는 장면은 현실은 암울하지만 끊임없는 현실 및 체제 비판을 통해서 바람직한 변화를 꾀한다면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은 아닐 것이라는 조심스런 낙관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도서
강두식 譯註, <파우스트 1,2부 : 해설과 주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88.
이효상 譯, <파우스트>, 동서문화사, 1995.
김광요 外 편역, <독일희곡선>, 한국문화사, 1995.
Wolfgang Beutin 外, 허창운 譯, <독일문학사 :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문학적 술화>, 삼영사, 1995.
“외국문학”, 1985년 겨울호.
“외국문학”, 198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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