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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 사실 제 3차 교육령이 발령되기 전에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나는 남동생보다는 보다는 덜 억압적인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그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선인으로써 조선 땅에서 살아가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동생이 놓고 간 도시락을 갖다 주기 위해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는데 여학생들이 목검으로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일제의 전쟁 자원으로써 여학생까지 군사훈련을 받아야하는 상황에서 나는 식민지 조국으로 인한 설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우리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 산미증식 계획이 개재되었고 미곡 공출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전쟁 물자 수탈 등을 이유로 집안의 솥, 놋그릇, 수저 할 것 없이 다 가져가 버려서 어느 집이든 남아있는 쇠붙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 번은 솥을 가져가 버려서 며칠 동안 밥을 해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럽고 또 두려웠던 것은 우리 민족을 자신들의 전쟁에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일본의 위안부에 끌려갔다. 또 당시 중학교 학생이었던 어린 내 남동생은 일본을 위한 전쟁을 하기 위해 전쟁터에 끌려가게 되었다. 어린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그 후 부모님은 한 시도 편하게 지내신 적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일본의 전쟁을 위한 도구로 쓰여 지곤 했다.
동생이 그렇게 전쟁터로 끌려간 뒤 나의 삶 또한 조금이나마 바뀌게 되었다. 당시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 동네 야학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가르치던 어린 아이들마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하나 둘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조국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맞긴 한 것인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간간히 일본의 패전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지만 일본을 위해 전쟁터에 끌려간 동생과 친구들의 안위를 생각하면 마냥 기쁜 소식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1945년 8월 드디어 조국은 광복을 맞게 되었다. 사람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사촌 오빠가 말해준 3.1 운동 때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의 비장함 대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희와 기쁨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식민지 치하의 삶은 막이 내렸다. 하지만 수 십 년이 지나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전쟁터로 끌려간 나의 남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향을 찾겠다며 집을 떠난 나의 사촌 오빠도 돌아오지 않았다. 위안부로 끌려간 나의 친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국의 광복은 우리 민족에게 찾아 왔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민족이 받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우리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되면서 산미증식 계획이 개재되었고 미곡 공출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전쟁 물자 수탈 등을 이유로 집안의 솥, 놋그릇, 수저 할 것 없이 다 가져가 버려서 어느 집이든 남아있는 쇠붙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 번은 솥을 가져가 버려서 며칠 동안 밥을 해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럽고 또 두려웠던 것은 우리 민족을 자신들의 전쟁에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일본의 위안부에 끌려갔다. 또 당시 중학교 학생이었던 어린 내 남동생은 일본을 위한 전쟁을 하기 위해 전쟁터에 끌려가게 되었다. 어린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그 후 부모님은 한 시도 편하게 지내신 적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일본의 전쟁을 위한 도구로 쓰여 지곤 했다.
동생이 그렇게 전쟁터로 끌려간 뒤 나의 삶 또한 조금이나마 바뀌게 되었다. 당시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 동네 야학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가르치던 어린 아이들마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하나 둘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조국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맞긴 한 것인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간간히 일본의 패전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지만 일본을 위해 전쟁터에 끌려간 동생과 친구들의 안위를 생각하면 마냥 기쁜 소식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1945년 8월 드디어 조국은 광복을 맞게 되었다. 사람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사촌 오빠가 말해준 3.1 운동 때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의 비장함 대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희와 기쁨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식민지 치하의 삶은 막이 내렸다. 하지만 수 십 년이 지나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전쟁터로 끌려간 나의 남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향을 찾겠다며 집을 떠난 나의 사촌 오빠도 돌아오지 않았다. 위안부로 끌려간 나의 친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국의 광복은 우리 민족에게 찾아 왔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민족이 받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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