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기
1.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가요사
1) 제재의 변화와 트로트의 재생산
2) 미국문화의 유입과 대중가요의 변화
2.1960년대 음악
1)1960년대 이지리스닝(Easy Listening)정착과 성격
2)1960년대 음악 문화 형성의 영향
3)1960년대 음악 내용
3.1970년대, 청년문화의 빛과 어둠
1)한국의 대중음악- 무력했던 과거
2)청년문화 포크송
2)1970년대 전반기 : 신중현과 록
3)대마초 사건과 1970년대 후반의 변화
4.1980년대, 조용필과 발라드의 시대
1)수퍼스타 조용필과 새로운 전성기
2)트로트, 댄스뮤직, 발라드의 정립과 발라드의 융성
3)언더그라운드의 본격화와 민중가요의 대중가요권 진출
4. 80년대 가요사와 현대사적 맥락
5. 1990년대, 서태지와 포스트(POST) 서태지
1)변화되는 흐름
2) 1990년대의 화두, 신세대
3)댄스뮤직의 새로움과 언더그라운드의 비약
4)서태지의 은퇴와 포스트 서태지
*1990년대(전반기) 음악문화에 영향을 준 이슈들
1. 문민 정부의 출현
2. 민간방송 서울방송 개국
3. 배금주의 팽배와 소비지향성의 문화
끝맺기
1.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가요사
1) 제재의 변화와 트로트의 재생산
2) 미국문화의 유입과 대중가요의 변화
2.1960년대 음악
1)1960년대 이지리스닝(Easy Listening)정착과 성격
2)1960년대 음악 문화 형성의 영향
3)1960년대 음악 내용
3.1970년대, 청년문화의 빛과 어둠
1)한국의 대중음악- 무력했던 과거
2)청년문화 포크송
2)1970년대 전반기 : 신중현과 록
3)대마초 사건과 1970년대 후반의 변화
4.1980년대, 조용필과 발라드의 시대
1)수퍼스타 조용필과 새로운 전성기
2)트로트, 댄스뮤직, 발라드의 정립과 발라드의 융성
3)언더그라운드의 본격화와 민중가요의 대중가요권 진출
4. 80년대 가요사와 현대사적 맥락
5. 1990년대, 서태지와 포스트(POST) 서태지
1)변화되는 흐름
2) 1990년대의 화두, 신세대
3)댄스뮤직의 새로움과 언더그라운드의 비약
4)서태지의 은퇴와 포스트 서태지
*1990년대(전반기) 음악문화에 영향을 준 이슈들
1. 문민 정부의 출현
2. 민간방송 서울방송 개국
3. 배금주의 팽배와 소비지향성의 문화
끝맺기
본문내용
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듀오 패닉이 <달팽이>, <왼손잡이>등사랑 노래가 아닌 작품들로 첫 앨범을 내놓으며 관심을 끌게 된다.
4)서태지의 은퇴와 포스트 서태지
신세대 대중가요는 1996년 초 서태지와 아이들의 갑작스런 은퇴로 꺾인다. 그들의 은퇴는 그 틀로서는 원활한 발전이 어렵겠다는 서태지의 영리한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고, 그 몇 달 전에 듀스의 김성재마저 사망함으로써 듀스의 활동도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 이후로도 물론 댄스뮤직은 살아남았지만 예전과 같은 창조적 역량보다는, 1990년대 전반기의 시도와 발상들의 반복이었다. 노래는 점점 쉬워져 1996년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나 이지리스닝 계열의 영턱스의 <정>과 같은 노래들이 등장했다. 댄스뮤직 가수들은 그 연령이 점점 낮아졌고, 10대 팬들을 위해 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중고생가수들이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는 이와 달리, 상업성 비판과 함께 자신들의 자생력을 확고히 하는데 주력했다. 넥스트, 강산에, 패닉 뿐만 아니라 삐삐밴드등의 펑크밴드와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황신혜밴드, 어어부 밴드, 크라잉 넛등과 민중 가요계열 안치환의 뒤를 이은 윤도현 밴드 등의 앨범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의 이러한 비약적 발전은 역설적으로, 1997년 삐삐롱스타킹이 카메라에 침을 뱉는 난동을 부림으로써 TV와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경제불황과 더불어 1997년 가을에는 눈에 띄게 댄스가 주춤거리고, 복고 발라드가 인기를 끄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조과우의 <길>이나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등이 그 예이다.
이후 90년대 말, 기획사에서 ‘생산된’ HOT나 젝스키스, SES, 핑클등이 10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댄스뮤직을 바탕으로 한 거대 음반 시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룹들은 상업성을 목적으로 기획사에서 조련된 가수들이었으므로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이 길지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게 하였다.
*1990년대(전반기) 음악문화에 영향을 준 이슈들
1. 문민 정부의 출현
1992년 12월에, 30년 동안 맹위를 떨치던 군사정권은 김영삼 대통령의 소위 ‘문민 정부’로 대치되었다. 이는 억압된 사회 구조에서 표현의 자유가 더욱 더 활발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또 세계사적으로는 1980년대 말부터 진행되어 온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몰락은 세계적으로 이념 대립의 소멸을 유발하였으며, 국내에서는 그 동안 군사정권이 통치 수단으로 활용해 오던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상을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자연히 정치보다는 경제에, 이념보다는 물질적 풍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2. 민간방송 서울방송 개국
1991년 12월 9일 서울지역부터 방송을 시작한 서울방송은 1980년 당시 무소불위의 군사 권력이 집행한 초헌적인 언론 통페합 이후 처음 선을 보이는 민간방송국이었다. 20여 년 동안,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은 두 개의 주요 방송사, 즉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으로 재편되어 별 경쟁 없이 안전하고 사이좋게 공존하여 왔다. 그러나 1992년 서울방송의 등장은 방송계의 변혁을 알리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인 서울 방송은 일단 시청자를 확보한다는 명제에 충실했다. 그들이 가진 장점은 다른 두 개의 대형 방송사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그렇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민간 상업방송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서울방송의 시청자 확보 전략 중에는 젊은 시청자들에 대한 어필이 주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당시 막 부상하기 시작한 신세대층은 가장 유력한 타깃이었다. 서울 방송은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프로그램을 과감히 제작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하여 서울방송의 오락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급상승했고, 그때가지 불안하게 방관하고 있던 다른 방송사의 프로듀서들은 서울방송의 전략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방송사에 따라, 프로그램에 다소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세 개 방송사의 젊은 층을 겨냥한 오락 프로그램들은 그 성격이나 포맷이 모두 흡사해 지기에 이르렀다. 물론 가장 큰 수혜자는 신세대로 불렸던 청소년층이었다.
3. 배금주의 팽배와 소비지향성의 문화
1990년대 초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는 ‘돈’이었다. 국민들의 기본권 몇 가지를 단순하고 철저하게 무시해온 군사 권력의 장기집권, 그리고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간헐적으로 되풀이되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지속해오고 있었다. 1970년대 말에 1000달러를 겨우 넘겼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열배를 기록했으며, 국민 총생산은 15년 만에 아홉 배의 성장을 달성하였다. 이런 경제 변화로 인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이는 생존과의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일단 물질적 풍요의 미덕을 경험한 사람들은 또 다시 과거의 빈곤을 겪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으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물질적 수준보다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뒤처진다는 것은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빈곤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이었다. 이 전쟁터에서 영웅은 돈이었고, 본격적으로 배금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끝맺기
지금까지 살펴 본 대중가요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변화들은 연속적이지도 않고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 이로부터는 그야말로 어떤 것도 주류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없는 과도기라고 판단된다. 이 세기말을 어떻게 보내고 21세기의 새로운 할 말을 어떤 양식으로 어떻게 가지고 나올지는 현재로서는 짐작할 수 없다. 1970년대나 1990년대처럼 새로움으로 치고 나올지, 1980년대처럼 이전의 경향을 종합하여 아우르는 방식으로 나올 것인지 조차 짐작하기 힘들다. 아마 그것은 21세기가 어떤 사회적 변화를 거쳐 새로운 단계로 돌입할 것인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보아왔듯 대중가요의 경향은, 일정한 정치, 경제적 한계 내에서나마, 당대 대중의 사회심리와 정확하게 조응하며 흘러왔기 때문이다.
4)서태지의 은퇴와 포스트 서태지
신세대 대중가요는 1996년 초 서태지와 아이들의 갑작스런 은퇴로 꺾인다. 그들의 은퇴는 그 틀로서는 원활한 발전이 어렵겠다는 서태지의 영리한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고, 그 몇 달 전에 듀스의 김성재마저 사망함으로써 듀스의 활동도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 이후로도 물론 댄스뮤직은 살아남았지만 예전과 같은 창조적 역량보다는, 1990년대 전반기의 시도와 발상들의 반복이었다. 노래는 점점 쉬워져 1996년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나 이지리스닝 계열의 영턱스의 <정>과 같은 노래들이 등장했다. 댄스뮤직 가수들은 그 연령이 점점 낮아졌고, 10대 팬들을 위해 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중고생가수들이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는 이와 달리, 상업성 비판과 함께 자신들의 자생력을 확고히 하는데 주력했다. 넥스트, 강산에, 패닉 뿐만 아니라 삐삐밴드등의 펑크밴드와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황신혜밴드, 어어부 밴드, 크라잉 넛등과 민중 가요계열 안치환의 뒤를 이은 윤도현 밴드 등의 앨범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의 이러한 비약적 발전은 역설적으로, 1997년 삐삐롱스타킹이 카메라에 침을 뱉는 난동을 부림으로써 TV와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경제불황과 더불어 1997년 가을에는 눈에 띄게 댄스가 주춤거리고, 복고 발라드가 인기를 끄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조과우의 <길>이나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등이 그 예이다.
이후 90년대 말, 기획사에서 ‘생산된’ HOT나 젝스키스, SES, 핑클등이 10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댄스뮤직을 바탕으로 한 거대 음반 시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룹들은 상업성을 목적으로 기획사에서 조련된 가수들이었으므로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이 길지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게 하였다.
*1990년대(전반기) 음악문화에 영향을 준 이슈들
1. 문민 정부의 출현
1992년 12월에, 30년 동안 맹위를 떨치던 군사정권은 김영삼 대통령의 소위 ‘문민 정부’로 대치되었다. 이는 억압된 사회 구조에서 표현의 자유가 더욱 더 활발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또 세계사적으로는 1980년대 말부터 진행되어 온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몰락은 세계적으로 이념 대립의 소멸을 유발하였으며, 국내에서는 그 동안 군사정권이 통치 수단으로 활용해 오던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상을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자연히 정치보다는 경제에, 이념보다는 물질적 풍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2. 민간방송 서울방송 개국
1991년 12월 9일 서울지역부터 방송을 시작한 서울방송은 1980년 당시 무소불위의 군사 권력이 집행한 초헌적인 언론 통페합 이후 처음 선을 보이는 민간방송국이었다. 20여 년 동안,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은 두 개의 주요 방송사, 즉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으로 재편되어 별 경쟁 없이 안전하고 사이좋게 공존하여 왔다. 그러나 1992년 서울방송의 등장은 방송계의 변혁을 알리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인 서울 방송은 일단 시청자를 확보한다는 명제에 충실했다. 그들이 가진 장점은 다른 두 개의 대형 방송사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그렇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민간 상업방송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서울방송의 시청자 확보 전략 중에는 젊은 시청자들에 대한 어필이 주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당시 막 부상하기 시작한 신세대층은 가장 유력한 타깃이었다. 서울 방송은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프로그램을 과감히 제작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하여 서울방송의 오락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급상승했고, 그때가지 불안하게 방관하고 있던 다른 방송사의 프로듀서들은 서울방송의 전략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방송사에 따라, 프로그램에 다소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세 개 방송사의 젊은 층을 겨냥한 오락 프로그램들은 그 성격이나 포맷이 모두 흡사해 지기에 이르렀다. 물론 가장 큰 수혜자는 신세대로 불렸던 청소년층이었다.
3. 배금주의 팽배와 소비지향성의 문화
1990년대 초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는 ‘돈’이었다. 국민들의 기본권 몇 가지를 단순하고 철저하게 무시해온 군사 권력의 장기집권, 그리고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간헐적으로 되풀이되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지속해오고 있었다. 1970년대 말에 1000달러를 겨우 넘겼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열배를 기록했으며, 국민 총생산은 15년 만에 아홉 배의 성장을 달성하였다. 이런 경제 변화로 인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이는 생존과의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일단 물질적 풍요의 미덕을 경험한 사람들은 또 다시 과거의 빈곤을 겪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으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물질적 수준보다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뒤처진다는 것은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빈곤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이었다. 이 전쟁터에서 영웅은 돈이었고, 본격적으로 배금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끝맺기
지금까지 살펴 본 대중가요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변화들은 연속적이지도 않고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 이로부터는 그야말로 어떤 것도 주류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없는 과도기라고 판단된다. 이 세기말을 어떻게 보내고 21세기의 새로운 할 말을 어떤 양식으로 어떻게 가지고 나올지는 현재로서는 짐작할 수 없다. 1970년대나 1990년대처럼 새로움으로 치고 나올지, 1980년대처럼 이전의 경향을 종합하여 아우르는 방식으로 나올 것인지 조차 짐작하기 힘들다. 아마 그것은 21세기가 어떤 사회적 변화를 거쳐 새로운 단계로 돌입할 것인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보아왔듯 대중가요의 경향은, 일정한 정치, 경제적 한계 내에서나마, 당대 대중의 사회심리와 정확하게 조응하며 흘러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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