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근대 민족주의 생성과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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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 근대 민족주의 생성과 유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동학[ 東學 ]
2.위정척사(운동)[ 衛正斥邪 ]
3.개화사상[ 開化思想 ]
4.동도서기론[ 東道西器論 ]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배워오게 했다. 그리고 박정양(朴定陽) 등 12명을 조사(朝士)로 임명하여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보내 근대 문물과 시설을 자세히 조사해 오도록 하였다.
전직 관료와 일부 유생들은 상소로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며 동도서기의 논리를 체계화하였다. 1881년 7월 전 장령(掌令) 곽기락(郭基洛)은 “서양이라고 하더라도 기계 기술이나 농서가 진실로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행할 것이오, 그 사람으로 해서 그들의 좋은 법까지 물리칠 필요는 없습니다”라며 서양 문물을 가려서 수용하자는 채서(採西)의 주장이 담긴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882년 12월 유생 윤선학(尹善學)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ㆍ장유(長幼)의 윤리는 하늘이 만들어 성품에 부여한 것으로 온 천지에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이치로 위에 있어서 도(道)가 됩니다.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배, 수레, 병기, 농기는 밖에 나타나 기(器)가 됩니다. 신이 변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기(器)이지 도(道)는 아닙니다”라는 상소로 동도서기론을 체계화하였다. 한편, 고종은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9월 16일 전국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를 모두 뽑아버리라는 명을 내리면서 개화 정책을 지지하는 윤음(綸音)을 공포하였다. 김윤식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이 윤음에서 고종은 “기계를 제조하는 데 조금이라도 서양의 방법을 따르면 사도(邪道)에 물든 것으로 보는데, 이 또한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들의 교(敎)는 사악하므로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미색(美色)처럼 멀리해야 하지만, 그들의 기(器)는 이로워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니 농기구ㆍ의약ㆍ병기ㆍ배ㆍ수레와 같은 것을 제조하는 데 무엇을 꺼려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들의 교(敎)는 배척하고, 기(器)는 본받는 것을 병행하여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여 동도서기론을 뒷받침하였다.
이처럼 동도서기론은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의 전래 과정에서 전통적인 지배체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의 수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추진하려는 필요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도기론이라는 전통적인 성리학 이론에 근거해 서양 문물의 수용을 정당화함으로써 정부의 초기 근대화 정책을 뒷받침했다.
2.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
한편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도서기론은 개화사상의 한 유형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화사상을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문화와 풍속까지 수용하는 문명개화(文明開化)를 주장한 변법(變法) 개화론과 청(淸)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기술과 기기ㆍ제도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동도서기를 주장한 시무(時務) 개화론으로 나눈다. 곧 개화사상은 개화의 범위와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로 나뉘며, 동도서기론은 그 가운데 점진적이고 온건한 경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淸)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중시하면서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한 김윤식ㆍ김홍집 등의 온건 개화파를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이 서구 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성격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별개의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도(道)는 그대로 유지하고 기(器)만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관과 문화만이 정도(正道)라는 화이론(華夷論)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유길준(兪吉濬) 등에 의해 발전된 개화사상은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는 개화(開化)를 통해 인류 문명이 더 높은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러한 화이론에서 벗어나 있다. 오히려 유길준 등은 인류 문명이 미개(未開)ㆍ반개화(半開化)ㆍ문명개화(文明開化)의 세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아, 동도서기론과는 반대로 조선이 서양에 견주어 문명화가 덜 이루어진 상태에 있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동도서기론은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유지ㆍ강화를 꾀했지만, 김옥균ㆍ박영효 등은 전제왕권의 제한을 통한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의 정치개혁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김윤식은 동도서기론에 근거해 김옥균ㆍ박영효 등에 대해 “갑신정변의 역적들은 서양을 높이고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을 폄하하며, 인륜 도덕을 야만이라 하여 그 도(道)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칭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은 하나의 범주로 묶기에는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므로 완전히 별개의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도서기론을 초기 개화사상의 단계에서 나타난 논리로 보는 학자도 있다. 곧 초기 개화사상은 동도서기론에 기초해 형성되었지만, 1880년대에 들어서 문명개화를 목표로 하는 변법적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동도서기론은 중국의 중체서용론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초기 단계에 나타난 문화적 대응 양태로 해석된다. 초기 개화사상은 화포와 화륜선 등 서양의 새로운 무기와 기기 등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데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서양 문물의 선별적 수용을 강조한 동도서기의 논리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ㆍ서구 열강과의 접촉이 확대되어 서양 문물에 대한 이해 정도가 높아지면서 인민평등과 자유민권 등의 새로운 정치의식이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서양 문물의 전면적인 수용을 강조한 문명개화의 논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곧 개화사상이 동도서기론에서 문명개화론으로 단계적인 발전을 거치며 확대되었다는 해석이다.
참조항목개화사상, 양무운동, 중체서용론, 문명개화론[
근대 민족의식의 형성과 민족주의의 수용
한국인들이 언제부터 민족의식을 가졌는가 하는 것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먼저 \'민족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자체가 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①한국사에서 민족의식과 비슷한것으로는 먼저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족류\'의식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초기부터 \'족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족류\'는 주로 여진족이나 왜와 조선사람을 구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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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9.11
  • 저작시기2014.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36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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