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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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무공이순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1. 충무공 이순신
2. 충무공 이순신의 일대기

본론

1. 명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
2. 문화재 및 관광명소

결론
1. 충무공 이순신의 평가
2.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

본문내용

에서 왜선 130여 척을 만났을 때 적선 규모에 압도되어 장수와 병사 모두가 기가 질린 상황에서도 특유의 낙천선과 자신감으로 부하들을 단결시키고, 몰아일체(沒我一體)의 동일시로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결과,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공세전략은 대승을 거두게 되고, 전의를 상실한 적은 퇴각하였으며, 민심은 수습되고 전세는 재역전되어 조선은 위험한 고비를 또 한번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외국에서 그토록 중요하다고 하여 찾고자 하는 리더십이다.
오센틱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의 정수 : 오센틱 리더는 윤리성과 높은 도덕성, 그리고 긍정성을 바탕으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자신과 주변사람들로부터 가치 및 도덕적 관점, 지식, 강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인식되는 리더이다. 또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적 맥락을 인식하는 리더, 그리고 자신감, 희망, 낙천성, 적응 유연성을 갖고 있는 높은 도덕적 특성을 가진 리더이다. 이러한 오센틱 리더는 자신에 처한 환경과 조적에 대한 개인적 동일시와 리더가 포함된 집단에 대한 사회적 동일시를 하고, 희망과 신뢰, 긍정적 감정으로 팔로우의 태도를 헌신적이고 만족하며 의미있고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결국, 팔로우의 행동에 심리적인 철회와 함께 추가적인 노력으로 성과가 나타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오센틱 리더십과 팔로어의 태도와 행동간의 연계성인데, 이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바로 명량해전의 이순신이다. 이것이 ‘이순신의 효과’의 핵심이다.
결국 이순신의 진정성(Authenticity)이 부하들의 심금을 울리고 울돌목의 승리를 가져왔으며, 백성을 안도하게 하고 조선을 다시 수렁에서 건져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 이순신 장군의 수군(水軍), 해양강국
“오늘의 정세는 왜적이 물러가고 안 가고를 막론하고 모두 수군(水軍)을 중시해야 한다. 왜적이 물러가지 않으면 적을 막아 길을 끊는 형세가 있을 것이고, 왜적이 물러가도 육지 방비는 수년간 조치할 수 없어서 반드시 수군(水軍)으로 해구(海口)를 가로 막은 연후에 내지에 계책하여 책응할 수 있을 것이다.”(屯田檢飭敎旨, 1595.1.21.)
“어허, 국가가 의지하여 보장을 삼은 것이 오직 수군(水軍)뿐인데 하늘이 아직도 화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아 흉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큰 군사들이 한번 싸움에 모두 없어지니 그 뒤로 바다 가까운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주랴. 한산을 이미 잃어버렸으매 적이 무엇을 꺼리리오.”(起復受職敎書, 1597.7.23.)
임진전쟁,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침략으로 불과 2일 만에 부산이 함락되고 20일 만에 한성을 빼앗겼고 60일 만에 평양성도 무너졌다. 이여송의 표현대로 조선군은 도망군에 불과했고 임금은 파천에 급급했다. 다행히 조선 수군은 저 임진년, 4차례 출전 10차례 전투에서 왜선 320여척을 분멸하며 남해를 틀어막고 서해를 차단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했다. 보급로가 끊겨버린 왜적들은 전승의 환상이 깨져버렸고 평양에서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이후 1598년 11월 26일, 왜적들이 완전히 물러갈 때까지 40여회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으니 과연 의지할 곳은 오직 수군뿐이었다.
하지만 백전백승의 수군에게도 위기는 산적해 있었다. 침략해온 외부의 적도 막아야했지만 해결해야 할 내부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예컨대 군량도 부족했고, 군선도 부족했고, 군사도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지원은 미미했다. 배고픈 군사는 싸울 수 없다. 군량을 얻기 위해 둔전을 경작하고, 해로통행첩을 발행하고,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고, 질그릇을 구웠던 이유였다. 군선이 없으면 바다로 나갈 수 없다. 1592년 1백여 척에 불과했던 판옥선을 다음해 180여척으로, 1597년 10여척의 판옥선을 60여척으로 증선 했던 이유였다. 군사가 없으면 전투에 이길 수 없다. 도망병은 참수(斬首)로, 징발병은 면천(免賤), 면역(免役), 면사첩(免死帖) 등 채찍과 당근으로 군사를 충원했던 이유였다. 이 모든 위기를 해결하는 최선봉에 조선의 수군지휘관 이순신이 있었다. 그에게는 수군을 경영하고 일본군을 무찔러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었다.
물론 조선 수군이 국가 패망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컨대 거북선ㆍ판옥선 같은 함선의 우월성,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 같은 대형화포의 우수성, 피난선과 의병들의 자발적 참전 그리고 지휘관 이순신의 전술전략 등이다. 그러나 글로벌 무역시장에서 치열한 경제전쟁을 치러온 경영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조선 수군의 승리는 그 무엇보다도 탁월한 CEO, 이순신이 위기경영을 펼친 결과였다.
예컨대 난중일기ㆍ임진장초 등으로 대표되는 기록경영, 거북선ㆍ조총ㆍ화약 등을 창제 개발했던 창조경영, 둔전경작ㆍ군선건조ㆍ군사충원이 말해주는 자립경영, 연령ㆍ직위ㆍ친소ㆍ귀천을 막론하고 우호관계를 구축했던 인맥경영, 첩보를 탐색ㆍ공유ㆍ활용했던 정보경영, 비록 졸병이라 하더라도 군사에 관한 말을 하고자 하면 문턱을 낮추어 언로를 개방했던 소통경영, 공사를 구분하고 정도를 지향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원칙경영, 가족은 물론 부하와 백성 그리고 나라를 사랑했던 사랑경영까지 이 모든 모습들이 이순신이 매전필승을 이루어낸 위기경영의 요체였다.
16세기 조선이 오직 수군을 믿었던 것처럼 21세기 한국의 번영도 오직 해양강국에 달려있다. 독도, 이어도, 쿠릴열도, 센카쿠열도, 남중국해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동아시아의 영해분쟁이 더욱 가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양강국의 중심에 대한민국의 해군이 있다. 전시에는 막강한 해군력으로 해상을 방어하고 평시에는 해양의 자원과 산업을 보호하며 국가의 해양외교를 뒷받침해야 한다. 해양강국을 염원하며 이순신의 막강수군을 생각한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즉 ‘하면 된다.’ 는 도전의 정신,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 한 사람이라도 길목을 지키면 천명의 군사도 두렵지 않다. 즉 ‘할 수 있다’ 는 긍정의 정신, 바로 이순신의 위기경영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키워드

충무공,   이순신,   리더십,   장군,   대첩,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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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14.10.19
  • 저작시기2014.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4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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