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Ⅰ. 신라의 삼국통일
Ⅱ. 고구려부흥운동
Ⅲ. 백제부흥운동
Ⅳ. 왜와 백제의 관계
Ⅴ. 신라의 삼국통일 그 이후의 양상
결론
참고문헌
본론
Ⅰ. 신라의 삼국통일
Ⅱ. 고구려부흥운동
Ⅲ. 백제부흥운동
Ⅳ. 왜와 백제의 관계
Ⅴ. 신라의 삼국통일 그 이후의 양상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대수 조공사 파견 횟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형식, 삼국의 대외관계,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pp.312.
특히 위덕왕 45년(598)에는 수에 조서를 보내어 고구려 침공을 요청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책을 시도하였다. 신형식, 앞의 책 pp.313.
하지만 백제의 외교책은 무왕이 즉위한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수와 고구려 사이에서 양단책을 펴면서 신라를 공격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으로는 무왕 8년(607) 고구려의 침입으로 3000여명의 백제인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제5 무왕 8년 5월
무왕 13년(612)에 벌어진 수와 고구려의 전쟁에 백제가 가담하지 않은 채 간접적으로 고구려를 돕는 입장을 취하여 양단책을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제5 무왕 13년
수-당 교체기 이후 당은 고구려를 압박하기 위해 신라의 힘을 빌릴 필요성이 있었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왜에 둘러싸인 고립 상황을 타개하고자 당과 연합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신라와 당은 나당연합군을 조직하게 되었고, 신라는 삼한일통을 내세우며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당의 대립노선이 형성되면서 두 노선은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왜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서로 경쟁하듯 왜에게 선진 문물을 전수해주고 최신의 문화를 전달하려 했던 것은, 그리고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신라를 조공국으로 묘사하는 까닭은,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삼국은 서로 왜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기를 원했고, 왜는 삼국의 선진문물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왜는 삼국 간의 경쟁 사이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외교를 진행하였다. 수와 고구려 사이의 양단책을 통해 두 국가와 중립적인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신라를 공격하며 실리를 취했던 백제의 외교에 맞서 신라는 진평왕 33년(611), 38년(616), 43년(621) 계속하여 왜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대왜 외교에 중점을 두어 외교정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진평왕 45년(623)에는 드디어 공식적인 송사외교를 시작하였다. 연민수, 7세기 동아시아정세와 왜국의 대한정책,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 2004
이후 무왕의 대대적인 대신라 전쟁에서 진평왕은 당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결국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을 묵인하던 당이 최초로 삼국 간의 화해를 권하며 중재하게 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당의 권고에 글월로 사례하면서 겉으로는 명에 순종한다고 하였으나 신라와 원수짐이 옛과 같았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제5 무왕 28년 8월
로 표현하는 등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생각이 없었다.
이러한 당의 간섭 이후 백제는 대왜 외교로 눈을 돌려 왜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진평왕대에 이르러 신라가 왜와 송사외교 방식을 통해 왜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견제하고자 백제 또한 왜와의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특히 군사외교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왜 외교의 적극성은 일본서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무왕 31년(630) 왜에 파견되는 백제의 사신이 전과는 달리 恩率, 德率 등 최고위층이었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주현, 7세기 백제 왜 외교관계 연구, 2005
백제의 대사 은솔 素子와 덕솔 武德이 같이 조공하였다. 일본서기 권23 제34세 서명천황 2년 3월조
이처럼 3품, 4품인 은솔과 덕솔을 파견한 것은 무왕대 들어 백제가 파견한 첫 고위직 관리의 대왜 파견 기록으로, 무왕의 대왜 군사외교 강화의 시점을 이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주현, 7세기 백제 왜 외교관계 연구, 2005
백제 의자왕의 왕자 풍장을 보내 인질로 하였다. 일본서기 권23 제 34세 서명천황 3년 3월조
이후 무왕 31년(630) 백제가 왕자 풍장을 파견하여 대왜 외교에 더욱 힘을 실은 것은 당이 돌궐을 항복시키면서 고구려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타 이민족의 군사적 위협을 대부분 제거한 당으로서는 수의 멸망을 초래하기도 하였던 고구려를 어떻게든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신라와 당의 연합 사이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는 양쪽으로 협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 하에서 신라와 백제는 자국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서로 왜의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하였다. 의자왕이 즉위한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한 대대적인 숙청 또는 권력 재편에 이어 백제는 당의 동정을 살피며 대왜 외교를 강화해나가는 한편 고구려와의 관계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의자왕 3년(643) 11월에 백제는 고구려와 화친하면서 나·당연합군의 횡연합전선에 대응하여 백제-고구려-왜의 종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3. 왜의 국내외적 상황
1) 왜의 국외적 상황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의 대왜 외교는 단순한 조공이나 종속적 외교관계가 아니었다. 이러한 실리외교는 백제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고구려와 신라뿐만 아니라 왜 또한 철저하게 실리를 위해서 삼국과 외교관계를 진행하였다. 왜의 기본적인 외교연결선은 백제였으나, 7세기 삼국의 격동적 변혁기에서 신라가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왜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는 신라의 송사외교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은 처음에는 마치 이에 응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신라와의 외교는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여 신라를 통해 불교와 같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위한 외교였을 뿐 군사적 동맹이나 불가침 조약과 같은 것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에 신라는 왜가 외교에 응하지 않는 것을 알고 당의 복식을 한 사자를 보내는 등 당의 힘을 등에 업은 것을 내세워 왜를 압박하고 왜와 교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왜는 끝내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백제와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이 때 신라의 조공사 지만 등이 당나라 옷을 입고 항구에 정박하였다. 조정에서는 마음대로 복제를 바꾼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문책하여
특히 위덕왕 45년(598)에는 수에 조서를 보내어 고구려 침공을 요청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책을 시도하였다. 신형식, 앞의 책 pp.313.
하지만 백제의 외교책은 무왕이 즉위한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수와 고구려 사이에서 양단책을 펴면서 신라를 공격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으로는 무왕 8년(607) 고구려의 침입으로 3000여명의 백제인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제5 무왕 8년 5월
무왕 13년(612)에 벌어진 수와 고구려의 전쟁에 백제가 가담하지 않은 채 간접적으로 고구려를 돕는 입장을 취하여 양단책을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제5 무왕 13년
수-당 교체기 이후 당은 고구려를 압박하기 위해 신라의 힘을 빌릴 필요성이 있었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왜에 둘러싸인 고립 상황을 타개하고자 당과 연합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신라와 당은 나당연합군을 조직하게 되었고, 신라는 삼한일통을 내세우며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당의 대립노선이 형성되면서 두 노선은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왜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서로 경쟁하듯 왜에게 선진 문물을 전수해주고 최신의 문화를 전달하려 했던 것은, 그리고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신라를 조공국으로 묘사하는 까닭은,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삼국은 서로 왜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기를 원했고, 왜는 삼국의 선진문물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왜는 삼국 간의 경쟁 사이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외교를 진행하였다. 수와 고구려 사이의 양단책을 통해 두 국가와 중립적인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신라를 공격하며 실리를 취했던 백제의 외교에 맞서 신라는 진평왕 33년(611), 38년(616), 43년(621) 계속하여 왜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대왜 외교에 중점을 두어 외교정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진평왕 45년(623)에는 드디어 공식적인 송사외교를 시작하였다. 연민수, 7세기 동아시아정세와 왜국의 대한정책,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 2004
이후 무왕의 대대적인 대신라 전쟁에서 진평왕은 당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결국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을 묵인하던 당이 최초로 삼국 간의 화해를 권하며 중재하게 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당의 권고에 글월로 사례하면서 겉으로는 명에 순종한다고 하였으나 신라와 원수짐이 옛과 같았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제5 무왕 28년 8월
로 표현하는 등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생각이 없었다.
이러한 당의 간섭 이후 백제는 대왜 외교로 눈을 돌려 왜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진평왕대에 이르러 신라가 왜와 송사외교 방식을 통해 왜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견제하고자 백제 또한 왜와의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특히 군사외교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왜 외교의 적극성은 일본서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무왕 31년(630) 왜에 파견되는 백제의 사신이 전과는 달리 恩率, 德率 등 최고위층이었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주현, 7세기 백제 왜 외교관계 연구, 2005
백제의 대사 은솔 素子와 덕솔 武德이 같이 조공하였다. 일본서기 권23 제34세 서명천황 2년 3월조
이처럼 3품, 4품인 은솔과 덕솔을 파견한 것은 무왕대 들어 백제가 파견한 첫 고위직 관리의 대왜 파견 기록으로, 무왕의 대왜 군사외교 강화의 시점을 이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주현, 7세기 백제 왜 외교관계 연구, 2005
백제 의자왕의 왕자 풍장을 보내 인질로 하였다. 일본서기 권23 제 34세 서명천황 3년 3월조
이후 무왕 31년(630) 백제가 왕자 풍장을 파견하여 대왜 외교에 더욱 힘을 실은 것은 당이 돌궐을 항복시키면서 고구려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타 이민족의 군사적 위협을 대부분 제거한 당으로서는 수의 멸망을 초래하기도 하였던 고구려를 어떻게든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신라와 당의 연합 사이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는 양쪽으로 협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 하에서 신라와 백제는 자국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서로 왜의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하였다. 의자왕이 즉위한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한 대대적인 숙청 또는 권력 재편에 이어 백제는 당의 동정을 살피며 대왜 외교를 강화해나가는 한편 고구려와의 관계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의자왕 3년(643) 11월에 백제는 고구려와 화친하면서 나·당연합군의 횡연합전선에 대응하여 백제-고구려-왜의 종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3. 왜의 국내외적 상황
1) 왜의 국외적 상황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의 대왜 외교는 단순한 조공이나 종속적 외교관계가 아니었다. 이러한 실리외교는 백제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고구려와 신라뿐만 아니라 왜 또한 철저하게 실리를 위해서 삼국과 외교관계를 진행하였다. 왜의 기본적인 외교연결선은 백제였으나, 7세기 삼국의 격동적 변혁기에서 신라가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왜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는 신라의 송사외교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은 처음에는 마치 이에 응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신라와의 외교는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여 신라를 통해 불교와 같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위한 외교였을 뿐 군사적 동맹이나 불가침 조약과 같은 것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에 신라는 왜가 외교에 응하지 않는 것을 알고 당의 복식을 한 사자를 보내는 등 당의 힘을 등에 업은 것을 내세워 왜를 압박하고 왜와 교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왜는 끝내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백제와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이 때 신라의 조공사 지만 등이 당나라 옷을 입고 항구에 정박하였다. 조정에서는 마음대로 복제를 바꾼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문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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