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1. 장보고의 생애
(1) 장보고의 생애와 가계
2. 해상왕국의 건설과 발전
(1) 해상왕국의 건설
(2) 해상왕국의 발전
3. 해상왕국의 몰락
(1) 해상왕국의 몰락 배경
(2) 청해진 세력의 정치적 한계
(3) 해상왕국의 몰락과 해양 군소세력의 대두
4. 장보고에 대한 평가
(1) 장보고의 해양경영모델
(2) 장보고에 대한 평가
1. 장보고의 생애
(1) 장보고의 생애와 가계
2. 해상왕국의 건설과 발전
(1) 해상왕국의 건설
(2) 해상왕국의 발전
3. 해상왕국의 몰락
(1) 해상왕국의 몰락 배경
(2) 청해진 세력의 정치적 한계
(3) 해상왕국의 몰락과 해양 군소세력의 대두
4. 장보고에 대한 평가
(1) 장보고의 해양경영모델
(2) 장보고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의 해상세력은 남서해안에 출몰하던 해적 소탕은 물론, 신라 당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을 독점하여 우리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해상왕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대당무역
대일무역
수출품
금 은 동 공예품, 직물공예품, 어아주(魚牙紬), 조하주(朝霞紬), 세포(細布), 해표피(海豹皮)
금 은 철 칼 약재(동남아시아, 페르시아산) 말 나귀 호표가죽 병품 염료 악기 불상
수입품
서적 다(茶) 의복 견직물 문방구 침향(沈香) 슬슬(瑟瑟) 비취모(翡翠毛) 대모(玳瑁) 침향 등과 마안(馬鞍) 초피(貂皮) 범포(帆布)
비단 면 사(絲) 금 동
2) 재중국 신라인 사회의 형성
9세기 중국에는 산동반도를 비롯하여 초주(楚州) 연수(漣水) 양주(揚州) 등 양자강과 회수(회수) 유역에 신라인 거주 구역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은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나라를 여행하면서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그가 목격한 신라인 사회를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신라인 사회는 절강성(浙江省)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816년 신라인 170명이 절강성으로 양식을 구하러 항해해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곳에 신라인 사회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당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나라였다. 당에 체류하는 이민족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율령으로 제정하여 그들을 우대했고, 주변국으로부터 사절단과 유학생을 유치했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중국의 곳곳에 ‘번방(蕃坊: 외국인 거주 구역)’을 형성했다. 신라방 혹은 신라촌으로 지칭되던 신라인 사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의 행정 업무를 위해 구당신라소(勾堂新羅所)까지 설치했고, 관리자는 신라인으로 임명하여 총관(管) 압아(押衙) 등으로 불렀으며 일정한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허용했다. 양주에서부터 등주(登州)에 이르는 해안지역에는 신라인 사회가 곳곳에 있었고, 많은 신라인들은 여러 종류의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엔닌이 지나는 곳에 많은 신라인이 등장한다. 신라인 취락은 대운하 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는데, 특히 초주와 연수 지역에 많았다. 839년의 일본 견당사 일행은 초주에서 신라선 9척과 해로에 익숙한 신라 선원 60여 명을 고용했다. 이 사실은 그곳에 다수의 신라 조선업자, 무역상인, 선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장보고가 창건한 산동반도 문등현(文登懸)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에 잇는 법화원(法花院)에서는, 839년 11월 16일부터 다음해 정월 15일까지 법화경을 강의하였는데, 매일 참석자가 40여명이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스님 속인 노인 젊은이 존귀한 사람 비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라인이었다. 경전을 강의하고 부처님께 참회하여 예배하고 복을 비는 방법은 모두 신라의 풍속대로 했다. 다만 저녁과 아침 두 차례의 예참(禮懺)은 당나라 풍속대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라의 말과 노래로 행했다.
이 법화회(법화회)가 끝날 무렵에 하루는 250명, 다음날은 200명의 신라인 남녀 신도들이 참석했다. 이 집회에서 보살계가 주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250명고 200명은 서로 다른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상주한 승려 27명도 물론 신라인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신라인이 모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적산촌 신라인 사회의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잇다.
신라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하고 있던 곳은 산동반도 남쪽 연안 일대였다. 모평현(牟平懸)의 소촌포(邵村浦) 도촌(陶村), 해양현(海陽懸) 동부의 유산포(乳山浦)등이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829년 4월 26일 엔닌 일행이 견당사절단 귀국선 9척 중에서 1척을 타고 유산(乳山)의 서포(西浦)에 정박하여 식료품 등을 구하려고 물에 올랐더니, 신라인 30여명이 말과 나귀를 타고 왔으며 바닷가 언덕에는 신라인 낭자(娘子)들도 많았다고 한다.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포구였던 모양이다.
어떤 일본인 학자는 낭자를 유녀(遊女), 즉 창녀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낭자는 원래 처 또는 부인의 호칭이지만 때로는 존칭어로 쓰였고, 당 황제 현종이 총애하던 양귀비를 낭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들이 해운업 상업은 물론이거니와 농업에도 종사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말과 나귀를 타고 왔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 견당사 일행이 필요한 식량을 인근 소촌에서 구매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신라인들은 대운하 주변이외에도 거주했다. 엔닌이 불법으로 당나라에 체류하기 위해 하인들과 배를 이탈하여 골짜기에 숨어있다가 목탄선 신라인 선원 10명에게 발각되었다. 엔닌은 그들의 도움으로 인가를 찾다가 숙성촌(宿城村)에 도착하였더니 그곳에도 신라인이 살고 있었다. 숙성촌은 해주(海州) 관내 동해현(東海懸)에 속해 있다.
밀주(密州) 제성현(諸城懸)관내의 대주산(大珠山) 박마포(馬捕)에는 신라인 목탄운송업자와 조선업자 선박수리업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엔닌일행이 적산촌에서 명주로 가던 도중 대주산 박마포에 도착하여 신라인 진충(陳忠)의 목탄운송 배를 타고 초주까지 여행했다. 일본 견당사절단의 귀국선 9척이 서해를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를 의논할 때, 신라선원이 “밀주 대주산에 이르러 배를 수리하고 곧 대주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면 매우 안전할 것이다”고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인은 도처에서 여러 직업에 종사하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가정적성지(嘉定赤城志)>>를 보면, 황암현(黃岩懸) 동쪽 1리 떨어진 곳에 신라방이 있었다고 했다. 서쪽 30리에는 신라산(新羅山)이 있었고 동북 60리에는 신라서(新羅嶼)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황암현은 명주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간 절강성 동남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오공원(悟空院)이라는 사원이 있었는데, 이 절은 아마도 신라승 오공(悟空)이 세운 신라원(新羅院)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신라인의 집단 거류지인 신라방이 있고 거기에 정신적 위안처이자 외래손님들의 숙식처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신라원이 건립
대당무역
대일무역
수출품
금 은 동 공예품, 직물공예품, 어아주(魚牙紬), 조하주(朝霞紬), 세포(細布), 해표피(海豹皮)
금 은 철 칼 약재(동남아시아, 페르시아산) 말 나귀 호표가죽 병품 염료 악기 불상
수입품
서적 다(茶) 의복 견직물 문방구 침향(沈香) 슬슬(瑟瑟) 비취모(翡翠毛) 대모(玳瑁) 침향 등과 마안(馬鞍) 초피(貂皮) 범포(帆布)
비단 면 사(絲) 금 동
2) 재중국 신라인 사회의 형성
9세기 중국에는 산동반도를 비롯하여 초주(楚州) 연수(漣水) 양주(揚州) 등 양자강과 회수(회수) 유역에 신라인 거주 구역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일본 승려 엔닌은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나라를 여행하면서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그가 목격한 신라인 사회를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신라인 사회는 절강성(浙江省)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816년 신라인 170명이 절강성으로 양식을 구하러 항해해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곳에 신라인 사회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당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나라였다. 당에 체류하는 이민족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율령으로 제정하여 그들을 우대했고, 주변국으로부터 사절단과 유학생을 유치했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중국의 곳곳에 ‘번방(蕃坊: 외국인 거주 구역)’을 형성했다. 신라방 혹은 신라촌으로 지칭되던 신라인 사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의 행정 업무를 위해 구당신라소(勾堂新羅所)까지 설치했고, 관리자는 신라인으로 임명하여 총관(管) 압아(押衙) 등으로 불렀으며 일정한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허용했다. 양주에서부터 등주(登州)에 이르는 해안지역에는 신라인 사회가 곳곳에 있었고, 많은 신라인들은 여러 종류의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엔닌이 지나는 곳에 많은 신라인이 등장한다. 신라인 취락은 대운하 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는데, 특히 초주와 연수 지역에 많았다. 839년의 일본 견당사 일행은 초주에서 신라선 9척과 해로에 익숙한 신라 선원 60여 명을 고용했다. 이 사실은 그곳에 다수의 신라 조선업자, 무역상인, 선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장보고가 창건한 산동반도 문등현(文登懸)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에 잇는 법화원(法花院)에서는, 839년 11월 16일부터 다음해 정월 15일까지 법화경을 강의하였는데, 매일 참석자가 40여명이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스님 속인 노인 젊은이 존귀한 사람 비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라인이었다. 경전을 강의하고 부처님께 참회하여 예배하고 복을 비는 방법은 모두 신라의 풍속대로 했다. 다만 저녁과 아침 두 차례의 예참(禮懺)은 당나라 풍속대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라의 말과 노래로 행했다.
이 법화회(법화회)가 끝날 무렵에 하루는 250명, 다음날은 200명의 신라인 남녀 신도들이 참석했다. 이 집회에서 보살계가 주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250명고 200명은 서로 다른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상주한 승려 27명도 물론 신라인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신라인이 모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적산촌 신라인 사회의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잇다.
신라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하고 있던 곳은 산동반도 남쪽 연안 일대였다. 모평현(牟平懸)의 소촌포(邵村浦) 도촌(陶村), 해양현(海陽懸) 동부의 유산포(乳山浦)등이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829년 4월 26일 엔닌 일행이 견당사절단 귀국선 9척 중에서 1척을 타고 유산(乳山)의 서포(西浦)에 정박하여 식료품 등을 구하려고 물에 올랐더니, 신라인 30여명이 말과 나귀를 타고 왔으며 바닷가 언덕에는 신라인 낭자(娘子)들도 많았다고 한다.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포구였던 모양이다.
어떤 일본인 학자는 낭자를 유녀(遊女), 즉 창녀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낭자는 원래 처 또는 부인의 호칭이지만 때로는 존칭어로 쓰였고, 당 황제 현종이 총애하던 양귀비를 낭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들이 해운업 상업은 물론이거니와 농업에도 종사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말과 나귀를 타고 왔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 견당사 일행이 필요한 식량을 인근 소촌에서 구매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신라인들은 대운하 주변이외에도 거주했다. 엔닌이 불법으로 당나라에 체류하기 위해 하인들과 배를 이탈하여 골짜기에 숨어있다가 목탄선 신라인 선원 10명에게 발각되었다. 엔닌은 그들의 도움으로 인가를 찾다가 숙성촌(宿城村)에 도착하였더니 그곳에도 신라인이 살고 있었다. 숙성촌은 해주(海州) 관내 동해현(東海懸)에 속해 있다.
밀주(密州) 제성현(諸城懸)관내의 대주산(大珠山) 박마포(馬捕)에는 신라인 목탄운송업자와 조선업자 선박수리업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엔닌일행이 적산촌에서 명주로 가던 도중 대주산 박마포에 도착하여 신라인 진충(陳忠)의 목탄운송 배를 타고 초주까지 여행했다. 일본 견당사절단의 귀국선 9척이 서해를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를 의논할 때, 신라선원이 “밀주 대주산에 이르러 배를 수리하고 곧 대주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면 매우 안전할 것이다”고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인은 도처에서 여러 직업에 종사하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가정적성지(嘉定赤城志)>>를 보면, 황암현(黃岩懸) 동쪽 1리 떨어진 곳에 신라방이 있었다고 했다. 서쪽 30리에는 신라산(新羅山)이 있었고 동북 60리에는 신라서(新羅嶼)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황암현은 명주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간 절강성 동남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오공원(悟空院)이라는 사원이 있었는데, 이 절은 아마도 신라승 오공(悟空)이 세운 신라원(新羅院)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신라인의 집단 거류지인 신라방이 있고 거기에 정신적 위안처이자 외래손님들의 숙식처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신라원이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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