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철학modem philosophy]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 55
  • 56
  • 57
  • 58
  • 59
  • 60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근대 철학modem philosophy]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근대철학 개관
<근대>
<근대 성립의 뿌리>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평의 확장
1. 분명한게 아니면(명석,판명한게 아니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말라. - 의심의 방법, 명확성의 방법
2. 너무 큰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3.다 뜯어보고 의미가 있도록 순서를 따라서 맞추어보면 된다는 것이다. 순서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다.-종합의 법칙
4.다 맞추고 다시 검사하는 것이다.-매거의 법칙, 검사의 법칙, 열거의 법칙

본문내용

은 궁극 정치의 형태와 가까운 사상이다. 왕의 절대적인 권력과 왕중심의 정치사상을 옹호했던 사상이다. 이에비해 로크는 철저히 민권적인 사상이다.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사상이다.
인류가 발명한 여러 technology 들이 있는데 이 기술은 하드웨어적인 것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포함하여 말한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도 하나의 테크놀로지가 될 수 있다. 정치기술thchne politike 도 정신적인 소프트웨어적인 기술에 속한다.
플라톤은 정의를 추구할 때 사회가 안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정치도 경제도 그 역할을 해줄 수 없다고 하였다. 정의에 대한 이성적 사고가 정치공동체를 만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상은 중세를 거치며 근대에 와서 민주주의를 낳았다.
아테네의 고전적 민주주의가 있었으나 이것은 현재의 개념과 다른 면이 있다. 17세기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시작이고 굳이 한사람을 꼽자면 존 로크의 기여이다.
근대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확실하고 객관적인 것이다. 과학기술과 근대의 인식론의 결과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근대를 근대되게 만든 것이 있다면, 근대 민주주의 인다. 철학적인식론이라는 기둥과 자유민주주의의 기둥이 근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기둥은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 철학적 인식론은 객관성을 지니고 누구나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는 그러하지 않다. 서로 대립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면에 잘어울리지 않는 이 두 기둥이 근대를 받들고 있다는 것은 독특한 일이다. 이 기둥이 조화를 이루는 것도 참 독특한 일이다. 이 두 기둥의 조화는 존 로크에게서 발견된다.
데카르트는 세상이 없어도 혼자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로크는 세상을 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어떻게하면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로크는 실제 정치에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혁명도 로크의 민권사상에 의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권, 왕권에서 민권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민권을 위해 싸우는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근대의 두기둥
1 이성주의적 인식론, 과학과 기술의 구조
2 자유주의적 정치사상
홉스 1588 - 1679
홉스는 굉장히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중세 기독교라는 우산이 사라지고 종교대립이 일어나기 시작한 유럽은 계급간의 갈등도 발생하였다.
종교개혁과 다원적 상황
청교도혁명과 왕정복고
명예혁명 입헌군주제 “왕은 통치하지 않는다”
시민사회: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의 결과로 생긴 시민들의 자발적인 조직체이다.
프랑스 혁명
홉스는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로 도망갔다가 정치범으로 몰려 거기서도 위협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조국에 와서 크롬웰을 설득해서 조국에 살게 된다. 그 후 왕정복고가 일어 났다. 홉스는 왕권을 주장하는 왕당파였다.
홉스는 격변기를 살면서, 안정은 최우선으로 꼽았다. 이것은 로크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처방이 다른 것이다. 홉스는 절대적 권력이 이러한 일이 한다고 생각했다. 나누어진 권력은 싸움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로크는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때문에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이 삼권분립의 시초가 된다.
당시에는 왕권신수설이 유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왕권신수설을 이어받아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회계약설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왕권의 근거는 사회계약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왕이 절대적 권력을 갖지만 이 권력은 신으로부터 왔다기 보다는 시민들의 계약을 통해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에서 한발짝 나가면 시민 주권론으로 갈 수 있다.
어떻게 사회계약을 말하면서 절대왕권을 말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은 리바이던Leviatan(괴수, 괴물) 이라는 책을 사용했다. 홉스는 국가를 ‘리바이던’이라본다. 국가가 종교적이 되었던지 시민적, 세속적이 되었던지 형태, 권력의 국가 라는 것이다.
또한 홉스는 ‘공민론’, ‘인성론’, ‘물체론’이라는 책들을 기술하였다. 리바이던이 제일 중요하지만 철학적으로만 보면 물체론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홉스는 어떠한 명에 철저히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과학사상 기술과학의 영향을 강하게 입고 수학에 매료가 되어있었다. 수학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정치와도 연관이 된다. 정치는 복잡하지만 수학을 보면 너무나 명료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수학적으로 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정치를 수학처럼하려면 자연을 수학처럼 기계적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물론 적으로 세상을 생각하면 세상이 단순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홉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등도 윤리도 수학적으로 할 수 없을까? 생각 하였다. 여기서부터 사회과학Social Science이라는 것이 나온다.
학문이라는 것이 점점 자연과학을 좇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학문을 수학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워낙 어지러운 시대였기에 정치와 윤리도 수학적으로 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사회학과 관련된 학과는 사회계열이라고 하여 인문학과 떨어뜨려 논다. 사획계열은 실증적 계량화를 통해 연구를 한다.
홉스는 인간세계도 하나의 기계이고 세상을 유물론 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정치를 하려고 하였다. 여기에는 복잡하고 혼란한 정치적 불안이라는 배경이 있다. 홉스는 세상을 거대학 기계로 보았기에 쓸데없이 정신이라는 것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불신도 가지고 있었다.
검을 가지고 있고 홀을 가지고 있다. 홀은 교황의 권리를 말한다. 제정일치에 절대왕정의 상황을 홉스는 주장한다.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도 왕에게 있다는 것이다. 국왕의 옷을 보면 얼룩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다. 사람한명한명이 리바이던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괴물이 전 국토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국토에는 성도있고 땅도있고 농장도 있고, 교회도 있다. 국가의 구성을 상징하는 것들이 왼쪽아래에 있고 교회의 구성이 오른쪽아래에 자세히 기술되었고 이것은 왕권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이러한 사상이 찰스 2세와 같은 사람에게 들어가 왕이 성공회까지 다스리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그림은 철학문제뿐 아니라 종교개혁사와 성

키워드

  • 가격4,000
  • 페이지수60페이지
  • 등록일2015.05.12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6727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