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남평문씨의 기원
1) 본관에 대한 이력
2) 남평문씨의 시조와 중시조
3) 남평문씨 항렬표
4) 남평문씨 유명 인물
2. 남평문씨 강성군파(문익점) 후손의 세거지 변동 내력
1) 남평문씨 - 강성군파 - 목사공파의 세거지 변동 내력
3. 강성군파-순질공파-목사공파 인물현황
4.남평문씨 시조설화와 개국공신
5. 남평문씨와 고려 문벌귀족
1) 중시조 경절공(敬節公) 諱 익(翼)
2) 귀족가문과의 통혼을 통한 중앙 진출
3)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
4) 신흥문벌귀족으로서 정치적 활동
6. 고려 중대의 문벌귀족과 현재의 남평문씨
-참고문헌
1) 본관에 대한 이력
2) 남평문씨의 시조와 중시조
3) 남평문씨 항렬표
4) 남평문씨 유명 인물
2. 남평문씨 강성군파(문익점) 후손의 세거지 변동 내력
1) 남평문씨 - 강성군파 - 목사공파의 세거지 변동 내력
3. 강성군파-순질공파-목사공파 인물현황
4.남평문씨 시조설화와 개국공신
5. 남평문씨와 고려 문벌귀족
1) 중시조 경절공(敬節公) 諱 익(翼)
2) 귀족가문과의 통혼을 통한 중앙 진출
3)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
4) 신흥문벌귀족으로서 정치적 활동
6. 고려 중대의 문벌귀족과 현재의 남평문씨
-참고문헌
본문내용
도를 가지었던 경우, 의종에게 아첨하고 부정축재 하였던 경우, 의종을 호종하거나 대궐에 숙직한 경우, 피신하였다가 고발당한 경우에 해당하는 문신들은 무신들의 처벌대상이 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무신란 당시 문극겸은 성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문신들이 살해되는 환란에서 살아남았다. 이는 그가 의종조에 대한 비판으로 좌천당하고 황주에서 선정을 베푼 전력으로 문신의 모범상으로 무신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는 점과 의종조에 소외되어 무신들과 정치적 입장이 비슷했던 정안 임씨와 인척관계이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인정권기에 일부 문신들은 낙향해서 은둔하거나, 무인정권에 등용 승진에 실패하거나, 무인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개혁의지를 펼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지만, 문극겸은 이의방정권에 우승선어사중승으로 등용되어, 집권무인의 교체에 상관없이 이의민정권까지 매번 등용 승진해 고위 관직인 판이부사에 이르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각 무인정권의 필요와 이에 적절히 대응한 그의 정치활동이 맞물려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의방정권기 문극겸은 문신들의 행정능력이 필요하였던 정권의 상황과 그가 의종조와 대치되는 새로운 인물로 쓰기에 적절하다는 정권의 평가로 등용되었다. 그 후 문극겸은 적극적으로 무인정권에 참여하는데, 이는 그가 무인들의 고사자문 이의방과의 인척관계를 통해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구축해 무반직을 겸하였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중부정권기 문극겸은 문신들에게 관대하였던 정권의 온건적 보수적인 성향과 이의방정권 때 쌓
았던 무인들과의 친교로 등용되었다. 이후 문극겸은 명종과의 친밀한 관계, 정중부가 치사한 뒤 집권한 송유인의 문신예우성향으로 인해 승진할 수 있었다. 경대승정권기 문극겸은 정권의 복고의지와 관련한 문신예우성향과 그가 정권교체의 계기인 송유인의 탄핵사건의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으로 인해 등용되었다. 이후 문극겸은 학식 있는 문신을 고관직에 임명하려는 경대승의 생각에 적절한 인물로 비춰져 승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의민정권기 문극겸은 이의민이 권력을 은닉하고자 하는 작업에 내세워져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문극겸은 사후 명종의 묘에 배향될 정도로 명종과 친밀하였는데, 이런 관계가 문극겸이 판이부사직에 오를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상황 필요와 명종의 총애로만 고위 관직에 임명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문신으로서의 활동도 활발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문극겸이 이의방정권 때 비목을 작성하였고, 의종의 폐위 전력을 들어 명종에게 간하였으며, 정중부정권 때 보제사의 중도들을 위로하는 일을 잘 해결하고, 무인정권기동안 세 차례의 과거의 시험관으로서 인재를 선발하였던 일에서 그가 문신으로서의 활동과 업무능력이 부족하지 않았음
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극겸은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실권(實權)을 갖지는 못했다. 정중부 정권 때 송유인에게 탄핵당한 사건이나 이의민정권 때 이의민의 권력 은닉화 작업에 앞세워진 점, 수국사로서 의종 시해 사건을 기록하는 데 무인 최세보의 감시를 받았던 사건들이 이를 짐작케 한다. 국정운영과 관료사회의 권한을 무인들이 장악하였던 무인정권기에는 재상직에 오른 문신이더라도 결국 무인정권체제에 순응해야 자신의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극겸은 조정의 잘못된 점을 간하고 선정을 베풀었던 문신(文臣)에서, 무인 집정자들의 초월적인 권력에 순응하고, 무인정권의 안정된 유지를 이루도록 도와야하는 관료(官僚)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3. 고려 중대의 문벌귀족과 현재의 남평문씨
상기에 언급된 내용에서처럼 남평문씨는 고려 개국에 상당한 공헌을 한 가문으로 시작을 하여 무인세력으로서 나주 남평 일대의 세력으로서 고려 초기 가문이 성장해 갔으며 고려 중기를 접어 들면서 무반(武班)에서 문반(文班)으로 변모를 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을 하면서 문벌 귀족화가 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남평문씨의 문벌귀족화는 기존의 문벌귀족과 달리 유력가문과의 통혼과 유(儒)를 바탕으로 한 과거 급제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을 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중앙 정계에서 국정운영에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기존의 문벌 귀족과 달리 남평문씨는 과거와 통혼을 바탕으로 왕의 측근으로 구 문벌 귀족에 대응 되는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활동들은 문극겸대에 확고해 졌으며, 이후 남평문씨가 고려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문극겸 이후 남평문씨는 여러 파가 형성이 되었고 그 중 강성군파 문익점으로 이어지는 고려 명문가문이 되었다. 그러나 문익점 이후 고려의 멸망으로 인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에 따라 조선조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남평문씨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국란이 발생하였을 때 적극적으로 국란 극복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보다는 초야에서 학문적인 기반으로 유림으로 조선시대를 살아왔다. 조선이후 근대로 오면서 남평문씨의 활동은 다양하고 전문화되면서 많은 위인들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호불호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저명하고 남평문씨에게는 많은 도움을 준 문선명, 대통령 후보를 지낸 문재인 등이 근대를 지난 현대에 남평문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고려 문벌귀족가문으로서 중시조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현재는 조선시대 보다 더 많은 가문을 빛내는 인물들을 배출하여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가문으로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
■ 참고 문헌
< 史料 >
1. 高麗史
2. 高麗史節要
3. 光海君日記
4. 仁祖實錄
5. 燃藜室記述
6. 歸巖文集.
< 論著 >
1. 「고려 의종대의 정치적 상황과 무신란」,『진단학보』75, 진단학회, 1993
2. 신수정,「무신정권과 문극겸」,『실학사상연구』10 11, 무안실학회, 1999
3. 박용운,『고려시대사』, 일지사, 1988
「고려전기 문반과 무반의 신분문제고려 귀족가문 연구(3)」, 『한국사연구』21, 한국사연구회, 1978
4. 교남지(嶠南誌), 홍여하찬묘갈명(洪汝河撰描碣銘)
5. 칠곡지리지
6. 남평문씨 대종회(http://www.m-oo-n.com/)
7. 한국의지식콘텐츠 학구학중앙연구원
았던 무인들과의 친교로 등용되었다. 이후 문극겸은 명종과의 친밀한 관계, 정중부가 치사한 뒤 집권한 송유인의 문신예우성향으로 인해 승진할 수 있었다. 경대승정권기 문극겸은 정권의 복고의지와 관련한 문신예우성향과 그가 정권교체의 계기인 송유인의 탄핵사건의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으로 인해 등용되었다. 이후 문극겸은 학식 있는 문신을 고관직에 임명하려는 경대승의 생각에 적절한 인물로 비춰져 승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의민정권기 문극겸은 이의민이 권력을 은닉하고자 하는 작업에 내세워져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문극겸은 사후 명종의 묘에 배향될 정도로 명종과 친밀하였는데, 이런 관계가 문극겸이 판이부사직에 오를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상황 필요와 명종의 총애로만 고위 관직에 임명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문신으로서의 활동도 활발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문극겸이 이의방정권 때 비목을 작성하였고, 의종의 폐위 전력을 들어 명종에게 간하였으며, 정중부정권 때 보제사의 중도들을 위로하는 일을 잘 해결하고, 무인정권기동안 세 차례의 과거의 시험관으로서 인재를 선발하였던 일에서 그가 문신으로서의 활동과 업무능력이 부족하지 않았음
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극겸은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실권(實權)을 갖지는 못했다. 정중부 정권 때 송유인에게 탄핵당한 사건이나 이의민정권 때 이의민의 권력 은닉화 작업에 앞세워진 점, 수국사로서 의종 시해 사건을 기록하는 데 무인 최세보의 감시를 받았던 사건들이 이를 짐작케 한다. 국정운영과 관료사회의 권한을 무인들이 장악하였던 무인정권기에는 재상직에 오른 문신이더라도 결국 무인정권체제에 순응해야 자신의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극겸은 조정의 잘못된 점을 간하고 선정을 베풀었던 문신(文臣)에서, 무인 집정자들의 초월적인 권력에 순응하고, 무인정권의 안정된 유지를 이루도록 도와야하는 관료(官僚)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3. 고려 중대의 문벌귀족과 현재의 남평문씨
상기에 언급된 내용에서처럼 남평문씨는 고려 개국에 상당한 공헌을 한 가문으로 시작을 하여 무인세력으로서 나주 남평 일대의 세력으로서 고려 초기 가문이 성장해 갔으며 고려 중기를 접어 들면서 무반(武班)에서 문반(文班)으로 변모를 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을 하면서 문벌 귀족화가 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남평문씨의 문벌귀족화는 기존의 문벌귀족과 달리 유력가문과의 통혼과 유(儒)를 바탕으로 한 과거 급제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을 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중앙 정계에서 국정운영에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기존의 문벌 귀족과 달리 남평문씨는 과거와 통혼을 바탕으로 왕의 측근으로 구 문벌 귀족에 대응 되는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활동들은 문극겸대에 확고해 졌으며, 이후 남평문씨가 고려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문극겸 이후 남평문씨는 여러 파가 형성이 되었고 그 중 강성군파 문익점으로 이어지는 고려 명문가문이 되었다. 그러나 문익점 이후 고려의 멸망으로 인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에 따라 조선조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남평문씨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국란이 발생하였을 때 적극적으로 국란 극복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보다는 초야에서 학문적인 기반으로 유림으로 조선시대를 살아왔다. 조선이후 근대로 오면서 남평문씨의 활동은 다양하고 전문화되면서 많은 위인들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호불호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저명하고 남평문씨에게는 많은 도움을 준 문선명, 대통령 후보를 지낸 문재인 등이 근대를 지난 현대에 남평문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고려 문벌귀족가문으로서 중시조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현재는 조선시대 보다 더 많은 가문을 빛내는 인물들을 배출하여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가문으로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
■ 참고 문헌
< 史料 >
1. 高麗史
2. 高麗史節要
3. 光海君日記
4. 仁祖實錄
5. 燃藜室記述
6. 歸巖文集.
< 論著 >
1. 「고려 의종대의 정치적 상황과 무신란」,『진단학보』75, 진단학회, 1993
2. 신수정,「무신정권과 문극겸」,『실학사상연구』10 11, 무안실학회, 1999
3. 박용운,『고려시대사』, 일지사, 1988
「고려전기 문반과 무반의 신분문제고려 귀족가문 연구(3)」, 『한국사연구』21, 한국사연구회, 1978
4. 교남지(嶠南誌), 홍여하찬묘갈명(洪汝河撰描碣銘)
5. 칠곡지리지
6. 남평문씨 대종회(http://www.m-oo-n.com/)
7. 한국의지식콘텐츠 학구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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