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앨리스 워커의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고>
Ⅱ. 본론
1, 부족 여성과 동일시되고자 하는 타쉬의 욕망
2,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고>속 타쉬의 분열된 자아
3, 제 1세계에 속한 제 3세계 여성들의 정체성
Ⅲ. 맺는말
-참고자료
-앨리스 워커의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고>
Ⅱ. 본론
1, 부족 여성과 동일시되고자 하는 타쉬의 욕망
2,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고>속 타쉬의 분열된 자아
3, 제 1세계에 속한 제 3세계 여성들의 정체성
Ⅲ. 맺는말
-참고자료
본문내용
민족을 위해 투쟁하는 것뿐이야, 너는 외국인이잖아 너나 너의 가족은 언제든지 원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배를 탈 수 있잖아’ 라고 선교사의 딸인 올리비아에게 말한다, ‘너와 너의 가족은 백인들을 위해서 쐐기 역할을 한다는 그 말이 옳은 것 같아’라며 친구인 올리비아를 백인의 앞장이로서 백인 문화에 종속시킨다, 타쉬의 올리비아에 대한 이런 논쟁은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성 제국주의의 희생’을 대립시킨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독립적으로 결정 지은듯한 타쉬의 주체성은 타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녀의 무의식을 이미 지배하고 있다, 주체란 소외된 다른 얼굴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독립된 주체로서가 아니라 은유에 의하여 자신이 아닌 다른것, 즉 다른 기표를 자신의 기의로 삼을 때 가능해 진다, 언어적 활동에 의해 성립된 주체는 부모의 말을 습득하면서 무의식 속에도 형성하여, 다른 사람의 욕망으로 채워지고 흘러 넘친다, 무의식은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담론을 통한 욕망으로 채워지고 흘러 넘친다, 무의식은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담론을 통한 욕망으로 채워 졌기 때문에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타쉬는 부족한 남성, 그리고 그 남성의 의식을 채우고 있는 어머니의 지식에 의하여 자신의 자아를 채운다, 타쉬는 올링카인에 의힌 진정한 여성으로서 인정받기 원했고, 강인하고 정복 할 수 없는 ‘완전한 여성, 완전한 아프리카인, 완전한 올링카 인’으로서 인식되는 여성들과의 결속을 위해 끔찍할 정도로 대담하고 혁명적이었으나, 그녀가 쓴 가면 속의 ‘거짓된 자아를 바라보게’ 된다,
타쉬는 자신이 부여한 역할방식에 따라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가 그녀이 몸에 새겨 넣은 정체성은 그녀가 상상한 방식에 의해 의미작용을 한다, 타쉬는 예전에 국기의 삼색만 보고서도 눈물이 나고 자부심으로 뿌듯해졌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들의 학용품 상자에 들어 있는 크레용을 보는 듯 그저 마음이 덤덤할 뿐이였다, 그녀의 ‘애국심’은 타쉬의 흉터는 그녀가 생각한 ‘족장’의 기의로써 가 아니라 , 여러 다른 기표 밑에 놓이게 된 것처럼 정박하지 못한 기표일 따름이다,
“저 애한테 꼬리가 달렸다고 놀려대지요, 물론 꼬리란 건 대음순을 말하는 거겠죠. 그런데 그 아이들에겐 음슨이란게 없어요, 클리토리스도 없어요,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아이로 보이는게 당연하지요,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을 보면 무슨 마귀라도 본 듯 도망치곤 했어요, 그러면서 웃었지요,”
반면 올링카족 아이들은 타쉬가 갖는 정체성 따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아이들은 기표도 기의도 필요 없는 자연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에게 할례는 고통이 다르지만 그 고통도 태어나는 것과 다름 없지만 자연적인 것일 뿐이다, 타쉬에게 이러한 자연적인 것은 존재 할 수 없다, 그녀는 그 자연적인 것이 사회적 이름하에 자연적인 것으로 둔갑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쉬는 수술을 받은 후 오리려 감옥과도 같은 육체에 갇히게 된다, 타쉬가 갇힌 육체는 따라서 그녀가 도망쳐야 할 감옥이 된 것이다, 할례 이전에 타쉬는 소설 속의 다양한 서술자들인 올리비아나 아담 등에 의해 자유롭고 장난끼 많은 아이로 기술 되었다, 늘 웃었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심부름을 하는 길에서도 신나게 장난을 쳤다, 또한 그녀의 자발적인 성행위를 즐김으로서 그녀의 문화가 금지하는 것들에 도전 했다,
“나는 타쉬를 생각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원하는 만큼 나를 원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우리의 만남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자연적인 자율성은 사회적 인위적 규범 속에서 좌절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할례를 금지시킨 후에도 비밀리에 계속 수행되는 음핵제거행위는 집단성으로써 타쉬 개인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젊고 순수했던, 그리고 무지했던 소녀시절에 대해 웃음이 난다’라고 회상하며, 스스로에게 ‘어떻게 이 미친 여자인 내몸을 신회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그녀의 정신은 몸에 의해 속박되어 정신분열을 낳게 하여 이분법이 있기 이전의 자유를 잃고 망가지게 된다,
이미 자유와 유희를 경험해 본 타쉬였기 때문에 친구들이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할례로 인한 고통을 그녀는 이겨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녀가 희망했던 ‘완벽한 아프리카인’이라는 상징계는 얻지 못하고, 오히려 가부장제 틀 속으로 퇴행하는 결과에 이른다, 즉 타인이 규정해 놓은 ‘올랑카적’ 육체라는 상징에 도달하고자 했으나, 육체는 없어지고 구속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타쉬의 상처는 올링카 여인들 특유의 걸음걸이, 발이 땅에 들려 올려지지 않고 질질 끌리기만 한 그 전통적인 걸음걸이를 낳게 된다, 그녀는 마침내 세습적으로 할례를 수행해 온 퉁가인 움리사를 살해한다, 퉁가인 움리사의 지위는 정치적 가부장제가 원활하게 가동되도록 움직이도록 조련된 여성이다, 그녀는 전통을 수호하고 올링카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임무를 수호한 영웅으로 숭앙되었으나, 스스로 아이들을 학대하는 데 봉사한 그 이상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할례를 받고 끔찍한 고통을 당한 후 그 고통의 감정을 안으로 묻어 버리면서, 움리사는 그녀가 겪은 똑깥은 고통을 복수라도 하듯 11세가 되는 부족의 모든 소녀들에게 전가시켰다, 따라서 자신의 손에 할례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그녀는 모든 감각을 상실해 가는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의 쾌감을 위해 여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기쁨이라는 왜곡된 믿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움리사를 찾아 갔을 당시 해방군들은 움벨레 야영지에 전통적인 마을을 하나 건설해 그곳을 거점으로 삼기 위해 ‘퉁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퉁가에게 할 일을 주기 위해 타쉬를 그곳으로 오게 했다, 그 집단이 추구하는 목적의 상징으로 타쉬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움리사는 타쉬의 언니가 혈우 증세가 있었던 것을 기억 했고 그래서 타쉬도 혈우 증세를 가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지만, 그런 타쉬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타쉬가 지키려했던 부족의 전통은 허울
그러나 자신의 몸을 독립적으로 결정 지은듯한 타쉬의 주체성은 타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녀의 무의식을 이미 지배하고 있다, 주체란 소외된 다른 얼굴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독립된 주체로서가 아니라 은유에 의하여 자신이 아닌 다른것, 즉 다른 기표를 자신의 기의로 삼을 때 가능해 진다, 언어적 활동에 의해 성립된 주체는 부모의 말을 습득하면서 무의식 속에도 형성하여, 다른 사람의 욕망으로 채워지고 흘러 넘친다, 무의식은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담론을 통한 욕망으로 채워지고 흘러 넘친다, 무의식은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담론을 통한 욕망으로 채워 졌기 때문에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타쉬는 부족한 남성, 그리고 그 남성의 의식을 채우고 있는 어머니의 지식에 의하여 자신의 자아를 채운다, 타쉬는 올링카인에 의힌 진정한 여성으로서 인정받기 원했고, 강인하고 정복 할 수 없는 ‘완전한 여성, 완전한 아프리카인, 완전한 올링카 인’으로서 인식되는 여성들과의 결속을 위해 끔찍할 정도로 대담하고 혁명적이었으나, 그녀가 쓴 가면 속의 ‘거짓된 자아를 바라보게’ 된다,
타쉬는 자신이 부여한 역할방식에 따라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가 그녀이 몸에 새겨 넣은 정체성은 그녀가 상상한 방식에 의해 의미작용을 한다, 타쉬는 예전에 국기의 삼색만 보고서도 눈물이 나고 자부심으로 뿌듯해졌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들의 학용품 상자에 들어 있는 크레용을 보는 듯 그저 마음이 덤덤할 뿐이였다, 그녀의 ‘애국심’은 타쉬의 흉터는 그녀가 생각한 ‘족장’의 기의로써 가 아니라 , 여러 다른 기표 밑에 놓이게 된 것처럼 정박하지 못한 기표일 따름이다,
“저 애한테 꼬리가 달렸다고 놀려대지요, 물론 꼬리란 건 대음순을 말하는 거겠죠. 그런데 그 아이들에겐 음슨이란게 없어요, 클리토리스도 없어요,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아이로 보이는게 당연하지요,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을 보면 무슨 마귀라도 본 듯 도망치곤 했어요, 그러면서 웃었지요,”
반면 올링카족 아이들은 타쉬가 갖는 정체성 따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아이들은 기표도 기의도 필요 없는 자연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에게 할례는 고통이 다르지만 그 고통도 태어나는 것과 다름 없지만 자연적인 것일 뿐이다, 타쉬에게 이러한 자연적인 것은 존재 할 수 없다, 그녀는 그 자연적인 것이 사회적 이름하에 자연적인 것으로 둔갑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쉬는 수술을 받은 후 오리려 감옥과도 같은 육체에 갇히게 된다, 타쉬가 갇힌 육체는 따라서 그녀가 도망쳐야 할 감옥이 된 것이다, 할례 이전에 타쉬는 소설 속의 다양한 서술자들인 올리비아나 아담 등에 의해 자유롭고 장난끼 많은 아이로 기술 되었다, 늘 웃었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심부름을 하는 길에서도 신나게 장난을 쳤다, 또한 그녀의 자발적인 성행위를 즐김으로서 그녀의 문화가 금지하는 것들에 도전 했다,
“나는 타쉬를 생각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원하는 만큼 나를 원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우리의 만남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자연적인 자율성은 사회적 인위적 규범 속에서 좌절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할례를 금지시킨 후에도 비밀리에 계속 수행되는 음핵제거행위는 집단성으로써 타쉬 개인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젊고 순수했던, 그리고 무지했던 소녀시절에 대해 웃음이 난다’라고 회상하며, 스스로에게 ‘어떻게 이 미친 여자인 내몸을 신회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그녀의 정신은 몸에 의해 속박되어 정신분열을 낳게 하여 이분법이 있기 이전의 자유를 잃고 망가지게 된다,
이미 자유와 유희를 경험해 본 타쉬였기 때문에 친구들이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할례로 인한 고통을 그녀는 이겨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녀가 희망했던 ‘완벽한 아프리카인’이라는 상징계는 얻지 못하고, 오히려 가부장제 틀 속으로 퇴행하는 결과에 이른다, 즉 타인이 규정해 놓은 ‘올랑카적’ 육체라는 상징에 도달하고자 했으나, 육체는 없어지고 구속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타쉬의 상처는 올링카 여인들 특유의 걸음걸이, 발이 땅에 들려 올려지지 않고 질질 끌리기만 한 그 전통적인 걸음걸이를 낳게 된다, 그녀는 마침내 세습적으로 할례를 수행해 온 퉁가인 움리사를 살해한다, 퉁가인 움리사의 지위는 정치적 가부장제가 원활하게 가동되도록 움직이도록 조련된 여성이다, 그녀는 전통을 수호하고 올링카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임무를 수호한 영웅으로 숭앙되었으나, 스스로 아이들을 학대하는 데 봉사한 그 이상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할례를 받고 끔찍한 고통을 당한 후 그 고통의 감정을 안으로 묻어 버리면서, 움리사는 그녀가 겪은 똑깥은 고통을 복수라도 하듯 11세가 되는 부족의 모든 소녀들에게 전가시켰다, 따라서 자신의 손에 할례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그녀는 모든 감각을 상실해 가는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의 쾌감을 위해 여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기쁨이라는 왜곡된 믿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움리사를 찾아 갔을 당시 해방군들은 움벨레 야영지에 전통적인 마을을 하나 건설해 그곳을 거점으로 삼기 위해 ‘퉁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퉁가에게 할 일을 주기 위해 타쉬를 그곳으로 오게 했다, 그 집단이 추구하는 목적의 상징으로 타쉬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움리사는 타쉬의 언니가 혈우 증세가 있었던 것을 기억 했고 그래서 타쉬도 혈우 증세를 가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지만, 그런 타쉬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타쉬가 지키려했던 부족의 전통은 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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