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처칠을 통해서 본 영국 현대사
-처칠의 성장과정
-처칠의 명성과 정치
-은퇴후 처칠의 노후활동
현대 영국의 정치 구조
1. 정당
2. 의회 의원
3. 내각
-처칠의 성장과정
-처칠의 명성과 정치
-은퇴후 처칠의 노후활동
현대 영국의 정치 구조
1. 정당
2. 의회 의원
3. 내각
본문내용
마디스트(알 마디의 추종자 집단)들이 점령하고 있던 수단 지방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당시 마디스트들은 수단에서 이집트인을 축출하고 옴두르만을 수도로 하여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1898년 9월 2일의 옴두르만 전투에 제21 창기병대 소속으로 돌격전에 참가했다. 그때 처칠이 런던의「모닝 포스트」(The Morning Post)지에 기고했던 기사가 보완되어「강의 전쟁」(The River War)<1899. 12>으로 출간되었다.
처칠의 명성과 정치
처칠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그의 대중적인 명성을 지지표로 발전시켜 정계에 진출하려고 했다. 당시 영국에서 의원에게는 급여가 지불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저술로써 정치활동 자금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1899년 7월 6일 면직물로 유명한 랭커셔의 올덤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⑥ 1899년 10월 남아프리카 전쟁(보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처칠은〈모닝 포스트〉지의 특파원이 될 채비를 갖추었다. 같은 해 11월 15일 동료였던 영국 육군장교들과 동행하다가 전투에 말려들었는데, 그는 복병의 습격을 당한 장갑열차에서 부상병의 구출을 도와주다가 보어인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프리토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다음해 7월 영국으로 귀환하여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1897년 정치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인도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사브롤라」(Savrola)와 전쟁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연과 저작을 발표하여 2년간에 약 1만 파운드를 벌었다. 1900년 10월에는 올덤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⑦ 보수당 의원이었지만 부친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정치적 주장을 가지고 있었던 처칠은 부친에 관한 전기「랜돌프 처칠 경」(Lord Randolph Churchill)<1906>을 썼다. 그는 남아프리카에 대해 관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할 것과, 육군 증강을 위해 지출을 확대시키지 말 것 등을 주장했다. 또한 영국에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사태가 도래하지 않는 한 기존의 해군력은 충분히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보호무역주의적인 관세장벽을 제안한 일부 당 지도층에 반대하여 자유무역을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1904년 5월 31일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이적했다. 1906년 1월 처칠은 맨체스터의 서북 선거구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내각의 식민차관으로서 정치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된 그는 남아프리카의 영국령 식민지인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했다. 1908년 애스퀴스 내각에서 통상장관으로 임명되어 국무위원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에 의하면 신임 각료는 재선거에 의해 유권자의 지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처칠은 맨체스터의 서북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근소한 차로 패배했으나 스코틀랜드의 던디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에 복귀했다. 이때 처칠은 급진적 사회개혁안을 지지하여 노동계급의 표를 획득할 수 있었으나 이로 인해 보수당은 그를 \'계급의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12일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인 클레망스 도지에와 결혼했다.
⑧ 통상장관으로서 처칠은 복지국가 정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로이드 조지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노인연금, 건강보험, 실업자 구제를 위한 직업소개소, 적정임금제의 도입, 과중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중립적인 공공기관의 설립 등에 공헌했다. 당시 처칠은 부자에게 중과세를 부담시키려는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1909년 예산안을 반대하고 있던 상원을 통렬히 비난하여 처칠과 보수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10년 2월부터 내무장관으로 취임하여 형무소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때부터 다음해인 1911년까지 탄광부철도원의 파업이 계속된 광범위한 노동불안시기에 내무장관으로 재직중이었던 그에게는 직책상 법과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하여 때때로 군대에 출동준비를 명령하기도 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내무부에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에만 경찰을 파견했다. 그는 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칠에 대한 영국 노동운동계의 뿌리 깊은 불신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처칠은 소위 1910년 12월 \'시드니 거리 포위사건\'이 발생할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단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도둑질을 하다가 포위당하자 런던의 경관 3명을 살해하고 총과 폭탄을 들고 최후까지 경찰과 군대에 저항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을 다룬 뉴스 영화가 현장에 있던 처칠의 모습을 크게 비추었던 것이다.
⑨ 제 1차세계대전 직전 처칠은 아일랜드에 영국 의회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의회를 설치하자는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지지했고, 이러한 그의 활발한 운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세력은 아일랜드를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영국은 이 격렬한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채 1914년 8월 4일 1차세계대전에 참가했다.
⑩ 1911년 10월 해군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처칠은 즉각적인 전투태세를 갖추는 일에 착수했다. 영국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처칠의 확신은 1911년 7월 독일이 아가디르에 포함(砲艦) 판테르호를 파견(아가디르 위기)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모로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칠은 독일이 영국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종래의 견해를 버리고 독일 해군의 확장에 대항하여 영국 해군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육군과의 전략조정을 위해 해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석탄 대신 중유를 연료로 하여 더 큰 대포를 적재할 수 있는 고속전함을 건조했으며, 해군항공부를 발족시켰다. 그 사이 처칠 자신도 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또한 내각 내에 존재하는 평화주의적 세력에 대하여 영국이 독일의 침략에 저항해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했다. 1914년초에는 해군 출동훈련을 실시했고,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선언하기도 전에 자신의 책임아래 함대를 출동시켰다. 처칠의 자발적인 전투개입은 물의를 증폭시켰다. 그는 독일군의 진격을 견제하는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자신이 창설한 해군항공부 소속 비행사와 함께
처칠의 명성과 정치
처칠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그의 대중적인 명성을 지지표로 발전시켜 정계에 진출하려고 했다. 당시 영국에서 의원에게는 급여가 지불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저술로써 정치활동 자금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1899년 7월 6일 면직물로 유명한 랭커셔의 올덤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⑥ 1899년 10월 남아프리카 전쟁(보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처칠은〈모닝 포스트〉지의 특파원이 될 채비를 갖추었다. 같은 해 11월 15일 동료였던 영국 육군장교들과 동행하다가 전투에 말려들었는데, 그는 복병의 습격을 당한 장갑열차에서 부상병의 구출을 도와주다가 보어인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프리토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다음해 7월 영국으로 귀환하여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1897년 정치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인도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사브롤라」(Savrola)와 전쟁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연과 저작을 발표하여 2년간에 약 1만 파운드를 벌었다. 1900년 10월에는 올덤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⑦ 보수당 의원이었지만 부친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정치적 주장을 가지고 있었던 처칠은 부친에 관한 전기「랜돌프 처칠 경」(Lord Randolph Churchill)<1906>을 썼다. 그는 남아프리카에 대해 관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할 것과, 육군 증강을 위해 지출을 확대시키지 말 것 등을 주장했다. 또한 영국에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사태가 도래하지 않는 한 기존의 해군력은 충분히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보호무역주의적인 관세장벽을 제안한 일부 당 지도층에 반대하여 자유무역을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1904년 5월 31일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이적했다. 1906년 1월 처칠은 맨체스터의 서북 선거구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내각의 식민차관으로서 정치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된 그는 남아프리카의 영국령 식민지인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했다. 1908년 애스퀴스 내각에서 통상장관으로 임명되어 국무위원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에 의하면 신임 각료는 재선거에 의해 유권자의 지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처칠은 맨체스터의 서북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근소한 차로 패배했으나 스코틀랜드의 던디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에 복귀했다. 이때 처칠은 급진적 사회개혁안을 지지하여 노동계급의 표를 획득할 수 있었으나 이로 인해 보수당은 그를 \'계급의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12일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인 클레망스 도지에와 결혼했다.
⑧ 통상장관으로서 처칠은 복지국가 정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로이드 조지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노인연금, 건강보험, 실업자 구제를 위한 직업소개소, 적정임금제의 도입, 과중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중립적인 공공기관의 설립 등에 공헌했다. 당시 처칠은 부자에게 중과세를 부담시키려는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1909년 예산안을 반대하고 있던 상원을 통렬히 비난하여 처칠과 보수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10년 2월부터 내무장관으로 취임하여 형무소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때부터 다음해인 1911년까지 탄광부철도원의 파업이 계속된 광범위한 노동불안시기에 내무장관으로 재직중이었던 그에게는 직책상 법과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하여 때때로 군대에 출동준비를 명령하기도 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내무부에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에만 경찰을 파견했다. 그는 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칠에 대한 영국 노동운동계의 뿌리 깊은 불신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처칠은 소위 1910년 12월 \'시드니 거리 포위사건\'이 발생할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단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도둑질을 하다가 포위당하자 런던의 경관 3명을 살해하고 총과 폭탄을 들고 최후까지 경찰과 군대에 저항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을 다룬 뉴스 영화가 현장에 있던 처칠의 모습을 크게 비추었던 것이다.
⑨ 제 1차세계대전 직전 처칠은 아일랜드에 영국 의회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의회를 설치하자는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지지했고, 이러한 그의 활발한 운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세력은 아일랜드를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영국은 이 격렬한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채 1914년 8월 4일 1차세계대전에 참가했다.
⑩ 1911년 10월 해군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처칠은 즉각적인 전투태세를 갖추는 일에 착수했다. 영국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처칠의 확신은 1911년 7월 독일이 아가디르에 포함(砲艦) 판테르호를 파견(아가디르 위기)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모로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칠은 독일이 영국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종래의 견해를 버리고 독일 해군의 확장에 대항하여 영국 해군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육군과의 전략조정을 위해 해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석탄 대신 중유를 연료로 하여 더 큰 대포를 적재할 수 있는 고속전함을 건조했으며, 해군항공부를 발족시켰다. 그 사이 처칠 자신도 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또한 내각 내에 존재하는 평화주의적 세력에 대하여 영국이 독일의 침략에 저항해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했다. 1914년초에는 해군 출동훈련을 실시했고,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선언하기도 전에 자신의 책임아래 함대를 출동시켰다. 처칠의 자발적인 전투개입은 물의를 증폭시켰다. 그는 독일군의 진격을 견제하는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자신이 창설한 해군항공부 소속 비행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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