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Ⅰ. 일본 군국주의 통치하의 교회의 시련
1. 황국식민화 정책 - p. 2
2. 기독교 학교에 대한 억압 - p. 2
3. 교회지도자들의 굴복 - p. 4
4. 굴절된 교회의 모습 -장로교회의 굴복 - p. 4
5. 신사참배 거부운동 - p. 5
6.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수난 - p. 8
Ⅱ.교회의 마지막 변절
1. 교회의 친일행각 - p. 9
2. 혁신교단 - p. 11
3. 교회의 병합 및 통합 - p. 12
4.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 p. 12
5. 기독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 - p. 13
6.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설립 - p. 13
Ⅲ. 천황제와 일본기독교
1. 신도와 신사 - p. 14
2. 천황제의 기원 - p. 15
3. 근대 천황제와 아시아 주의 - p. 15
4. 천황제와 일본 헌법 - p. 16
5. 일본적 일본기독교 - p. 16
6. 일본 기독교계 학교와 천황제 - p.17
7. 일본기독교와 저항운동 - p. 17
8.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일본기독교의 입장 - p. 18
Ⅳ. 참고 자료
1. 노구교사건
2. 황국식민서사
3. 총대
4.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항의서 내용의 대강
5. 박관준 장로
6. 이세신궁
7. 천장절
-참고문헌
Ⅰ. 일본 군국주의 통치하의 교회의 시련
1. 황국식민화 정책 - p. 2
2. 기독교 학교에 대한 억압 - p. 2
3. 교회지도자들의 굴복 - p. 4
4. 굴절된 교회의 모습 -장로교회의 굴복 - p. 4
5. 신사참배 거부운동 - p. 5
6.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수난 - p. 8
Ⅱ.교회의 마지막 변절
1. 교회의 친일행각 - p. 9
2. 혁신교단 - p. 11
3. 교회의 병합 및 통합 - p. 12
4.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 p. 12
5. 기독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 - p. 13
6.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설립 - p. 13
Ⅲ. 천황제와 일본기독교
1. 신도와 신사 - p. 14
2. 천황제의 기원 - p. 15
3. 근대 천황제와 아시아 주의 - p. 15
4. 천황제와 일본 헌법 - p. 16
5. 일본적 일본기독교 - p. 16
6. 일본 기독교계 학교와 천황제 - p.17
7. 일본기독교와 저항운동 - p. 17
8.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일본기독교의 입장 - p. 18
Ⅳ. 참고 자료
1. 노구교사건
2. 황국식민서사
3. 총대
4.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항의서 내용의 대강
5. 박관준 장로
6. 이세신궁
7. 천장절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실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점은 신사참배에 대해서 일본기독교 내에서도 그렇게 일치된 견해가 정리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Ⅳ. 참고 자료
1. 루거우차오사건(노구橋 사건)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충돌사건.
루거우차오는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융딩강[永定河]을 가로지르는 루거우교 왼쪽에 있는 소도시로, 여기에 쑹저위안[宋哲元]의 제29군(軍)의 일부가 주둔해 있었다.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난 후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사병은 용변 중이어서 20분 후에 대열에 복귀하였으나, 일본군은 중국군 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중국군을 공격하여 다음날인 8일에 루거우차오를 점령하고 중국군은 융딩강 우안(右岸)으로 이동하였다. 최초의 10여 발의 사격이 일본군의 모략에서 나온 것인지,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7월 11일에는 중국 측의 양보로 현지협정(現地協定)을 맺어 사건은 일단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계속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군대를 증파(增派)하여 28일 베이징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루거우차오 사건은 전면전쟁으로 확대되어 중 ·일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항일(抗日)의 기운이 높아졌다.
2. 황국식민서사
1937년 10월에 제정한 것으로 아동용, 일반용(중학교 이상의 학생들과 일반이 사용)으로 되어 있었다.
1)아동용: 나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
2)일반용: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우리 황국 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皇道)를 선양하자.
3. 총대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차 총회>에 총대는 목사 86인, 장로 85인, 선교사 22인, 합 193명이었다.(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7회 회록)
4.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선교사들이 총회에 제출한 항의서 내용의 대강
1)하나님 말씀에 위반함이요
2)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3)일본 국법인 종교 자유 헌장에도 위반함이요
4)통용 회의법에도 위반되어 있다.
5. 박관준 장로
박관준 장로는 그의 아들 및 공립학교 교사였던 안이숙 양과 함께 신사 참배에 저항하여 일본 제국의 의회에 정면으로 거룩하게 맞섬으로써 한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박 장로는 1875년 4월 13일에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소년시절에 유학(儒學)과 불교를 공부했다.
1905년 - 그리스도인이 됨
1910년 - 의학을 공부
1914년 - 병원 개업
1921년 - 복음 전도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가지되어 평신도로서 복음 증거에 전념하기 위해 병원 일을 그만둠.
1923년 - 평안남도 안주 지역에서 교회 개척
1937년 - 미나미 총독에게 공적으로 신도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항의를 하기로 결심
일본에 정면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항의를 하기로 결심한 박 장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의회에다 직접항의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미 일본의 요주 인물로 지목되고 있었고 일본으로 건너가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그는 “일본으로 가라”는 음성을 실제로 들었으며, 그래서 당국의 허락이 있든 없든 간에 자기 아들 및 안 양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안양은 공립학교 교사였으며, 그녀 역시 박 장로의 뜻에 동조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들은 먼저 몇몇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방문하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곤경을 토로했다. 그 후 군벌 정치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저명한 의원들 중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의회건물에 출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39년 3월 21일에 그들은 삐라 광고물들을 옷 속에다 감추고 의회 건물로 들어갔다. 그 당시 74회째 일본 의회에는 모두 400명의 의원들이 모였었으며, 특별히 종교법에 관해 논의하고 있었다. 처음에 세 사람은 관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안양은 여성 좌석에 앉았다. 약속된 신호에 따라 박 장로는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이다”라고 외쳤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은 준비해 온 광고 전단들을 의회 의원들에게 두루 뿌렸다.
박 장로의 전단은 첫째로 기독교를 일본의 국교로 삼을 것을 촉구했고, 둘째로 만일 일본이 계속해서 기독교를 핍박하면 필경 패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세 사람은 한 달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박 장로는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그의 아들은 그를 만주로 피신하도록 청했지만 그는 거부하였다. “아니야, 나는 한국 교회를 위해 일할 것이며 여기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또한 그는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한국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1941년에 그는 종교를 통제하는 법령을 위반했다는 죄목과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는 1945년 3월 13일에 일흔의 나이로 평양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6. 이세신궁 : 이세시에 자리잡고 있는 이세신궁은 일본의 대표적인 신사로서 신사의 총본산 일본 최고의 신궁으로 일본 황실과 직결되어 있다.
일본이 제2차 대전으로 패망하자 국가 신도가 해체되면서 신사는 하나의 종교법인체가 되었고 신사본청이 바로 이세신궁이 되었다.
7. 천장절 : 일본 천황의 생일날
<참고 문헌>
1. 김수진, 「김수진의 일본 개신교회사」,1993
2.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장로회신학대학교, 1998
3. 민경배, 「주기철」, 동아일보사, 2002
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생명의 말씀사, 2004
5. 서정민,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 한울 아카데미, 2000
6. 윌리엄 블레어브루스 헌트, 「한국의 오순절과 그후의 박해」, 1995
Ⅳ. 참고 자료
1. 루거우차오사건(노구橋 사건)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충돌사건.
루거우차오는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융딩강[永定河]을 가로지르는 루거우교 왼쪽에 있는 소도시로, 여기에 쑹저위안[宋哲元]의 제29군(軍)의 일부가 주둔해 있었다.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난 후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사병은 용변 중이어서 20분 후에 대열에 복귀하였으나, 일본군은 중국군 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중국군을 공격하여 다음날인 8일에 루거우차오를 점령하고 중국군은 융딩강 우안(右岸)으로 이동하였다. 최초의 10여 발의 사격이 일본군의 모략에서 나온 것인지,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7월 11일에는 중국 측의 양보로 현지협정(現地協定)을 맺어 사건은 일단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계속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군대를 증파(增派)하여 28일 베이징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루거우차오 사건은 전면전쟁으로 확대되어 중 ·일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항일(抗日)의 기운이 높아졌다.
2. 황국식민서사
1937년 10월에 제정한 것으로 아동용, 일반용(중학교 이상의 학생들과 일반이 사용)으로 되어 있었다.
1)아동용: 나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
2)일반용: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우리 황국 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皇道)를 선양하자.
3. 총대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차 총회>에 총대는 목사 86인, 장로 85인, 선교사 22인, 합 193명이었다.(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7회 회록)
4.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선교사들이 총회에 제출한 항의서 내용의 대강
1)하나님 말씀에 위반함이요
2)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3)일본 국법인 종교 자유 헌장에도 위반함이요
4)통용 회의법에도 위반되어 있다.
5. 박관준 장로
박관준 장로는 그의 아들 및 공립학교 교사였던 안이숙 양과 함께 신사 참배에 저항하여 일본 제국의 의회에 정면으로 거룩하게 맞섬으로써 한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박 장로는 1875년 4월 13일에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소년시절에 유학(儒學)과 불교를 공부했다.
1905년 - 그리스도인이 됨
1910년 - 의학을 공부
1914년 - 병원 개업
1921년 - 복음 전도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가지되어 평신도로서 복음 증거에 전념하기 위해 병원 일을 그만둠.
1923년 - 평안남도 안주 지역에서 교회 개척
1937년 - 미나미 총독에게 공적으로 신도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항의를 하기로 결심
일본에 정면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항의를 하기로 결심한 박 장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의회에다 직접항의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미 일본의 요주 인물로 지목되고 있었고 일본으로 건너가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그는 “일본으로 가라”는 음성을 실제로 들었으며, 그래서 당국의 허락이 있든 없든 간에 자기 아들 및 안 양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안양은 공립학교 교사였으며, 그녀 역시 박 장로의 뜻에 동조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들은 먼저 몇몇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방문하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곤경을 토로했다. 그 후 군벌 정치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저명한 의원들 중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의회건물에 출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39년 3월 21일에 그들은 삐라 광고물들을 옷 속에다 감추고 의회 건물로 들어갔다. 그 당시 74회째 일본 의회에는 모두 400명의 의원들이 모였었으며, 특별히 종교법에 관해 논의하고 있었다. 처음에 세 사람은 관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안양은 여성 좌석에 앉았다. 약속된 신호에 따라 박 장로는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이다”라고 외쳤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은 준비해 온 광고 전단들을 의회 의원들에게 두루 뿌렸다.
박 장로의 전단은 첫째로 기독교를 일본의 국교로 삼을 것을 촉구했고, 둘째로 만일 일본이 계속해서 기독교를 핍박하면 필경 패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세 사람은 한 달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박 장로는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그의 아들은 그를 만주로 피신하도록 청했지만 그는 거부하였다. “아니야, 나는 한국 교회를 위해 일할 것이며 여기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또한 그는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한국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1941년에 그는 종교를 통제하는 법령을 위반했다는 죄목과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는 1945년 3월 13일에 일흔의 나이로 평양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6. 이세신궁 : 이세시에 자리잡고 있는 이세신궁은 일본의 대표적인 신사로서 신사의 총본산 일본 최고의 신궁으로 일본 황실과 직결되어 있다.
일본이 제2차 대전으로 패망하자 국가 신도가 해체되면서 신사는 하나의 종교법인체가 되었고 신사본청이 바로 이세신궁이 되었다.
7. 천장절 : 일본 천황의 생일날
<참고 문헌>
1. 김수진, 「김수진의 일본 개신교회사」,1993
2.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장로회신학대학교, 1998
3. 민경배, 「주기철」, 동아일보사, 2002
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생명의 말씀사, 2004
5. 서정민,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 한울 아카데미, 2000
6. 윌리엄 블레어브루스 헌트, 「한국의 오순절과 그후의 박해」,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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