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인물관련 레포트-내가 선정한 조선시대 제22대 왕인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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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조 인물관련 레포트-내가 선정한 조선시대 제22대 왕인 정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정조의 성장기
기본 갖추기=성공의 기틀마련
도약단계=성장 전략
중요한 전기
정조가 역사에 남긴 것
정조의 실패한 개혁정책
정조의 사람들
1. 혜경궁 홍씨
2. 사도세자
3.영조
4.홍국영
5.정약용
6.채제공
7.정순왕후
정조의 리더십
정조에 대한 비판
정조의 말년
연표

본문내용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인물이다. 정약용 또한 정조가 신임하던 신하 중 하나였다. 일찍이 정약용을 인재로 알아본 정조는 정약용이 과거에 합격한 해에 초계문신에 임명하였고, 정약용은 규장각에서 내준 과제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였고, ‘문제책에서 패관잡설’의 폐단을 지적하며 개혁을 요구하고 ‘인재책’에서는 신분과 지방색에 따른 인재등용의 제한을 비판하며 인재 사용에서 전문성과 자질의 중시를 요구하는 등 혁신적 정책을 제시하여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항상 반대파로부터 공격에 시달렸는데, 그가 남인출신이었고 정조의 친왕세력의 대표자로 정약용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체제공과 통혼관계에 있었으며 그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집안이 서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반대파의 공격에 계속 거세지고 정조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정약용의 정치적 역정 또한 끝을 맺게 된다. 결국 서학문제로 인해 순조 1년에 신유사옥으로 유배기를 보내게 된다.
6.채제공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조때의 남인이다. 채제공은 특히 청남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채제공은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7.정순왕후
영조 후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 및 경주 김씨 측과 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 홍씨 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했다. 부왕 영조가 승하하고 손자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로 승격되었으며 홍인한 , 정후겸 등 영조 척신 일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정순왕후의 동기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 , 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세간에는 정순왕후와 정조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기록에는 정조가 정순왕후가 정순왕후를 지극히 봉양했다고 전해진다.
정조의 리더십
정조는 리더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갖고 있었던 왕으로 평가 되는데 정조가 리더십에 내세운 것은 ‘손상익하’이다. 손상익하란 손해는 자신이 보고, 이익은 아랫사람이 얻어야한다 라는 뜻이다. 정조의 리더십은 세종의 리더십과 많이 비교가 되어진다. 그리하여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을 비교하여서 정조의 리더십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면 정조의 리더십을 세종과 비교해보면 우선 세종은 소를 뒤에서 미는 형식의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면 어전회의에서 충분한 찬반토론을 통해 정책의 장단점을 찾고, 주관자에게 직접 일을 위임하였다. 반면에 정조는 소를 앞에서 끄는 방식의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자면 정조는 국정의 목표를 설정하고 신하들을 동참하도록 설득하였고, 때론 위협까지 불사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세종은 집현전을 자신의 정치기반기구로 하였고 정조는 규장각을 정치기반기구로 두었는데 이에 운영방식은 달랐다. 세종의 집현전 운영방식은 ‘과제를 주고 기다린다.’ 였다. 세종은 각종사안의 과거 사례, 성패 이유 등을 주문하였으나, 왕이 직접 나서서 가르치지는 않았다. 반면 정조는 전면에 나서서 직접 가르치는 운영방식을 택했다. 또한 세종이 말수가 적고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정조는 다변과 격정의 정치가였다고 평가되어진다. 세종은 리더로서 일단 상대방의 의견을 다 듣고 좋은 점을 칭찬하고 본인의 생각을 피력하는 반면, 정조는 신하들과 대화를 나눌 때, ‘경들이 매우 한탄스럽다.’ 라고 함으로써 논쟁을 많이 유발하였다. 세종이 부드럽게 다독이는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정조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정조에 대한 비판
정조는 조선시대에 문화적인 부흥을 이끌고 조선시대의 부흥기를 이끈 백성들에게 좋은 왕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조에게도 아쉬운 점이 남는다. 바로 정조 자신과 정조의 측근들 말으로 정치를 해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뛰어난 학문 실력을 바탕으로 해서 어느 누구의 공격에도 논리 정연하게 대처하며 왕권을 강화해 갔다. 이런 상황을 정조는 ‘언로가 막히고 신하들의 기강이 무너졌다.’ 라고 말을 남겼다 한다. 이런 정조를 당해낼 신하가 없었지만 벽파계 노론들은 계속 정조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계속 측근들만을 이용해 정치를 해갔다. 이는 결국 정조 사후에 세도정치라는 폐단을 낳고 만다.
정조의 말년
조선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정조는 젊은 나이에 지병을 알고 있던 종기가 도져
1800년 6월,49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마쳤다. 정조는 가족들은 효의왕후를 비롯하여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효의 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선빈성씨가 문효세자, 수빈박씨가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았다. 정조의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에 있다. 대한 제국 성립 후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이들 중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음으로 수빈 박씨 소생 순조가 정조를 이어 제23대 왕에 등극 하였다. 정조는 갑작스럽게 승하했는데 이런 정조의 죽음을 두고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조의 죽음에 대한 논란들이 계속되고 있다.
연표
1777년(정조 1)
7월, 선천내금위의 취재입속의 법을 정함.
8월, 활자 갑인자를 개주하여 정유자를 만듦.
9월, 도성안의 무당을 추방함.
9월, 창덕궁 인정전앞에 품계석을 세움.
11월, 숙위소를 설치.
12월, 교서관을 규장외각으로 함.
이광사(1705-1777), 조엄(1719-1777) 죽음.
1778년(정조 2)
1월, 흠휼전칙 완성됨.
1월,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함.
2월, 노비추쇄관을 폐지함.
2월, 호위삼청을 1청으로 통합.
6월, 홍국영의 누이 홍씨를 빈으로 들임. 홍국영의 세도정치.
12월, 홍봉한( 1713-1778) 죽음.
박제가의 북학의 편찬.
1779년(정조 3, )
1월, 내시교관을 폐지.
3월, 규장각에 검서관을 둠.
4월, 홍국영이 훈련대장이 되었다가 9월에 물러남.
5월, 원빈(元嬪) 홍씨가 죽음.
6월, 남한산성을 보수함.
8월, 정조가 남한산성에 행차함.
1780년(정조 4)
2월, 홍국영을 전리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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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12.02
  • 저작시기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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