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조선시대 기녀제도와 황진이의 삶
1. 기녀제도와 기녀의 생활
2. 인간 황진이의 삶
Ⅲ. 황진이 문학에 나타난 애정
1. 황진이 관련 설화에 나타난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황진이
2. 황진이의 시조와 한시에 나타난 애정
Ⅳ.살아있는 신화 황진이
1. 문학에서 소환된 황진이
2.영상 콘텐츠에서 소환된 황진이
3. 기생의 애정(愛情)과 애정(哀情) - 황진이를 중심으로
Ⅴ.결 론
Ⅱ. 조선시대 기녀제도와 황진이의 삶
1. 기녀제도와 기녀의 생활
2. 인간 황진이의 삶
Ⅲ. 황진이 문학에 나타난 애정
1. 황진이 관련 설화에 나타난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황진이
2. 황진이의 시조와 한시에 나타난 애정
Ⅳ.살아있는 신화 황진이
1. 문학에서 소환된 황진이
2.영상 콘텐츠에서 소환된 황진이
3. 기생의 애정(愛情)과 애정(哀情) - 황진이를 중심으로
Ⅴ.결 론
본문내용
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기녀를 배치하였다. 기녀는 관청의 행사와 관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기생은 관기가 대부분이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적인 사기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다. 기녀는 한양에 거주하는 경기(京妓)와 각 고을의 지방기(地方妓)로 나뉜다. 기녀의 수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연회를 자주 연 연산군 때 기녀의 수는 크게 증가되어서 한때 한양에 머문 기녀가 만 여 명에 달했다. 각 지방에는 목(牧), 부(府), 군(郡), 현(縣) 등의 행정구역에 따라 기녀의 수가 정해졌는데 적은 곳은 20명에 불과했지만 평양과 같이 색향(色鄕)으로 유명한 곳은 200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기녀제도는 유교를 국가사상으로 하는 조선 사회의 질서에 사실상 반대되는 것으로서 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조선 초부터 활발했다. 그러나 기녀제도가 관리들 자신의 처신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폐지는 불가능하였다. 특히 관료들 사이에 “전국의 기녀제도가 폐지되면 관리들이 모두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일반 가정의 여자를 범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벌을 받게 될 것이므로 기녀제도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오늘날 국가에서 윤락가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려는 인식과 유사하였다. 결국 기녀제도는 조선의 사회적 통치이념과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한말까지 유지되었다. 기녀는 세습이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녀는 모녀관계를 통해 이루어졌고, 일반 백성이나 양반의 자식도 기녀가 되곤 했다. 기녀의 활동기간은 15세에서 50세까지이며 나이가 어린 기녀는 동기, 나이가 든 기녀는 노기, 퇴역한 기녀는 퇴기라고 불렀다.
기녀들은 보통 15세에 기녀가 되어 장악원에 소속된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녀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서 교육을 마친 후에 기녀들은 용모와 재주에 따라 1패, 2패, 3패로 등급이 나누어졌다. 1패는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하는 최상급 기녀이고 2패는 관아나 고관의 집에 출입하는 기녀, 3패는 일반인을 상대하는 하급 기녀이다.
기녀들은 조선시대 8천민의 하나로, 실제 생활에서는 매우 많은 규제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기녀들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길 때 불려간다. 때문에 그녀들은 천민이면서 양반의 생각과 문물을 비교적 접하기 쉬웠다. 그리고 양반들도 그녀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규제이탈은 허용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기녀들은 천민이면서 천민이 아닌 존재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예로 화려한 치장 등을 들 수 있다. 기녀들은 어느 한 사람과의 사랑이 허용되지 않았다. 관기와 사기, 모두 모든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그녀들은 한 사람과의 사랑에 목말라했으며, 그 때문에 애정지향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2. 인간 황진이의 삶
서경덕과의 설화를 보면 황진이는 남성들을 유혹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혹은 진정한 학자를 가려보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지족선사와의 설화, 벽계수와의 설화를 보면 그 수단을 사용한 결과, 황진이의 기준에서 진정한 학자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출중한 재주와 경국의 미색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한시와 시조, 노래에도 뛰어난 명기였던 황진이는 예컨대 정절에 목숨을 거는 기생이 아닌 자유와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풍류에서 피어난 꽃 중의 꽃이었다.
벽계수나 지족선사와 같은 인물들에게는 허위에 찬 남근중심주의를 조롱하고 그들을 마음껏 폭로했던 황진이였지만 모든 남성을 그렇게 대했던 것은 아니다. 황진
이는 신분적, 성적 경계를 넘어 진실한 교감을 나누고 서로의 존재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서경덕과 소세양 그리고 고도의 예술세계를 매개로 소통했던 지음(知音)의 인물인 이사종과 명창 이언방 등과는 참된 인간관계를 맺었다.
이렇듯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이나 예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하며 성적 경계를 넘어 남녀가 자유로운 인격으로 만나고 여성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문학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도 신분과 여성이라는
시대의 제약이 돌처럼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Ⅲ. 황진이 문학에 나타난 애정
1. 황진이 관련 설화에 나타난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황진이
황진이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명기’, ‘신선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그녀에 대한 이렇다 할 사적도 하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어우야담(於于野談)」「송도기이(松都記異)」「식소록(識小錄)」「수촌만록(水村錄)」「청비록(淸脾錄)」「금계필담(錦溪筆談)」등에 실려 있다. 황진이에 대한 전체적 이야기가 실린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으로나마 이러한 기록들의 바탕으로 상대적 연구에서 그녀에 대한 대개의 윤곽을 추정할 수가 있다.
황진이의 생존연대는 여러 가지 고증에 의하여 대개 연산군(燕山君) 말년 경(1502)에 태어나서, 중종 17,8년 경에 한참 꽃다운 이름을 날리고, 중종 35년(1540)에 40 미만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 유몽인(1559~1623): [어우야담]
설화(1) 가정 초 송도 명기에 진이라는 이가 있으니 걸걸하고 호협한 사람이었다. 화담처사 서경덕이 상경하여 벼슬을 않고 학문에 정진한다는 말을 듣고 시험을 하고자하여 조대를 묶어 문자를 끼고 찾아가 절하고 묻되 “남반혁 여반사라 하기에 저도 학문에 뜻을 두고 실끈을 띠고 왔나이다”하였다. 선생은 경계를 하고 가르쳤다. 진이가 밤을 타 선생의 몸에 접근하려 하여 마치 마등이 아난존자에게 하는 것처럼 했다. 이같이 하기를 여러 날 했으나 화담은 종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설화(2) 한편 진이가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찾아가 놀려 하였으나 더불어 갈 만한 이가 없더니 마침 이생이라는 어떤 재상의 아들이 있었다. 그가 호방하여 방외에 놀만하였다. 진이가 이생을 만나보고 조용히 이르되, “내 들으니 중국인은 원생고려국일견금강산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내 나라 사람으로 본국에 생장하여 선산을 지척에 두고 그 진면목을
기녀들은 보통 15세에 기녀가 되어 장악원에 소속된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녀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서 교육을 마친 후에 기녀들은 용모와 재주에 따라 1패, 2패, 3패로 등급이 나누어졌다. 1패는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하는 최상급 기녀이고 2패는 관아나 고관의 집에 출입하는 기녀, 3패는 일반인을 상대하는 하급 기녀이다.
기녀들은 조선시대 8천민의 하나로, 실제 생활에서는 매우 많은 규제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기녀들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길 때 불려간다. 때문에 그녀들은 천민이면서 양반의 생각과 문물을 비교적 접하기 쉬웠다. 그리고 양반들도 그녀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규제이탈은 허용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기녀들은 천민이면서 천민이 아닌 존재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예로 화려한 치장 등을 들 수 있다. 기녀들은 어느 한 사람과의 사랑이 허용되지 않았다. 관기와 사기, 모두 모든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그녀들은 한 사람과의 사랑에 목말라했으며, 그 때문에 애정지향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2. 인간 황진이의 삶
서경덕과의 설화를 보면 황진이는 남성들을 유혹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혹은 진정한 학자를 가려보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지족선사와의 설화, 벽계수와의 설화를 보면 그 수단을 사용한 결과, 황진이의 기준에서 진정한 학자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출중한 재주와 경국의 미색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한시와 시조, 노래에도 뛰어난 명기였던 황진이는 예컨대 정절에 목숨을 거는 기생이 아닌 자유와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풍류에서 피어난 꽃 중의 꽃이었다.
벽계수나 지족선사와 같은 인물들에게는 허위에 찬 남근중심주의를 조롱하고 그들을 마음껏 폭로했던 황진이였지만 모든 남성을 그렇게 대했던 것은 아니다. 황진
이는 신분적, 성적 경계를 넘어 진실한 교감을 나누고 서로의 존재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서경덕과 소세양 그리고 고도의 예술세계를 매개로 소통했던 지음(知音)의 인물인 이사종과 명창 이언방 등과는 참된 인간관계를 맺었다.
이렇듯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이나 예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하며 성적 경계를 넘어 남녀가 자유로운 인격으로 만나고 여성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문학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도 신분과 여성이라는
시대의 제약이 돌처럼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Ⅲ. 황진이 문학에 나타난 애정
1. 황진이 관련 설화에 나타난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황진이
황진이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명기’, ‘신선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그녀에 대한 이렇다 할 사적도 하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어우야담(於于野談)」「송도기이(松都記異)」「식소록(識小錄)」「수촌만록(水村錄)」「청비록(淸脾錄)」「금계필담(錦溪筆談)」등에 실려 있다. 황진이에 대한 전체적 이야기가 실린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으로나마 이러한 기록들의 바탕으로 상대적 연구에서 그녀에 대한 대개의 윤곽을 추정할 수가 있다.
황진이의 생존연대는 여러 가지 고증에 의하여 대개 연산군(燕山君) 말년 경(1502)에 태어나서, 중종 17,8년 경에 한참 꽃다운 이름을 날리고, 중종 35년(1540)에 40 미만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 유몽인(1559~1623): [어우야담]
설화(1) 가정 초 송도 명기에 진이라는 이가 있으니 걸걸하고 호협한 사람이었다. 화담처사 서경덕이 상경하여 벼슬을 않고 학문에 정진한다는 말을 듣고 시험을 하고자하여 조대를 묶어 문자를 끼고 찾아가 절하고 묻되 “남반혁 여반사라 하기에 저도 학문에 뜻을 두고 실끈을 띠고 왔나이다”하였다. 선생은 경계를 하고 가르쳤다. 진이가 밤을 타 선생의 몸에 접근하려 하여 마치 마등이 아난존자에게 하는 것처럼 했다. 이같이 하기를 여러 날 했으나 화담은 종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설화(2) 한편 진이가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찾아가 놀려 하였으나 더불어 갈 만한 이가 없더니 마침 이생이라는 어떤 재상의 아들이 있었다. 그가 호방하여 방외에 놀만하였다. 진이가 이생을 만나보고 조용히 이르되, “내 들으니 중국인은 원생고려국일견금강산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내 나라 사람으로 본국에 생장하여 선산을 지척에 두고 그 진면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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