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여는 말
Ⅱ. 교부시대의 흐름에서 바라 본 ‘교회’
1.언어적 이해 「1~ 3p」
- 신약 성경 에클레시아와 히브리어 카할과 에다를 중심으로
2.아그나시우스 「4~ 6p」
- 보편적 교회를 주장한 안디옥의 감독
3.헤르마스의 목자 「6p」
- “교회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를 고민한 그리스도 인
4.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 「7~ 9p」
- 영지주의자들의 등장에 의해 야기된 사도적 전통과 몬타니즘
5.클레멘트와 오리겐 「9~ 11p」
- 플라톤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 이해와 문제점
6.시대의 전환 점 「11~ 12p」
- 로마의 박해와 배교자들, 그리고 순교를 각오한 자들과의 문제
7.카르타고의 키프리안 「12~ 13p」
- 배교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8.4세기부터 5세기초까지의 교회관 「14~ 18p」
- 로마의 동방과 서방을 중심으로
9.어거스틴의 교회관 「18~ 20p」
- 어거스틴과 도나티스트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Ⅲ. 현대의 ‘교회관’과 교부시대의 ‘교회관’의 차이 「20~ 23p」
Ⅳ. 맺는 말 「24p」
Ⅱ. 교부시대의 흐름에서 바라 본 ‘교회’
1.언어적 이해 「1~ 3p」
- 신약 성경 에클레시아와 히브리어 카할과 에다를 중심으로
2.아그나시우스 「4~ 6p」
- 보편적 교회를 주장한 안디옥의 감독
3.헤르마스의 목자 「6p」
- “교회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를 고민한 그리스도 인
4.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 「7~ 9p」
- 영지주의자들의 등장에 의해 야기된 사도적 전통과 몬타니즘
5.클레멘트와 오리겐 「9~ 11p」
- 플라톤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 이해와 문제점
6.시대의 전환 점 「11~ 12p」
- 로마의 박해와 배교자들, 그리고 순교를 각오한 자들과의 문제
7.카르타고의 키프리안 「12~ 13p」
- 배교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8.4세기부터 5세기초까지의 교회관 「14~ 18p」
- 로마의 동방과 서방을 중심으로
9.어거스틴의 교회관 「18~ 20p」
- 어거스틴과 도나티스트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Ⅲ. 현대의 ‘교회관’과 교부시대의 ‘교회관’의 차이 「20~ 23p」
Ⅳ. 맺는 말 「24p」
본문내용
리스도를 통한 일치인지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키프리안의 교회만 놓고 보자면 노바티안의 교회관이 더 옳았을 수 도 있다. 물론 노바티안의 극단적인 배척과 자비가 없는 태도는 닮은 모양은 아니지만, 키프리안의 교회관은 잘못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교회의 일치성에 대해, 그리스도를 통하긴 했어도, 면밀히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 자체를 통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선언을 통한, 베드로라는 사람의 교회가 기초된 일치였다.
이것은 감독을 중심으로 노바티안파를 배척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그들의 이러한 교회관은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 아니므로, 교회의 보편성과도 어긋나게 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론 자체는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었어도, 생각 자체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4세기부터 5세기초까지의 교회관에서 살펴 볼 인물은 예루살렘의 키릴과 도나투스주의자들이다. 우선 예루살렘의 키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이해하면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경륜과, 성령의 교감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성례의 의미에 초점을 두고 성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었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에게 종속되어지겠다고 믿고, 선언한 순간부터 그의 신비로운 몸의 일체가 되어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러한 생각에 성례를 포함시키고, 이후에 이들이 말한 의미를 중시하지 않고, 의식자체를 중시하며 변질되지만, 이들의 이런 이해는 교회의 일치성에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대로 도나티스트들은 교회를 교회를 분파하고, 사랑과 자비를 경시하며 교회의 일치성과, 보편성, 거룩성을 모두 훼손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분파하며 다른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만의 특별성을 주장한다. 이에 따라 교회의 보편성이 가지는 두 가지 의미가 무시당하였고, 교회를 분파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들만이 특별하고 참된 감독이므로 다른 감독들과 그리스도인을 무시하며 일치성을 부인하였다. 또한, 그들의 세력 확장에는 폭력이나 위협등이 포함 되는 등, 세상과 구별되어진 모습보다는 오히려 세상에서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인 힘의 논리를 따른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이해이다. 그는 이전부터 다뤄져 오던 주제들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개입하여, 교회를 이해하였다. 도나티스트들과 논쟁하며, 초대 교부들이 가지던,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정론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교회관에는 일치성과 보편성, 그리고 은혜를 통한 거룩성이 모두 내제되어있다.
무엇보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지금까지 이해해 오던 교회에, 사랑과 자비를 감미하면서 도나티스트들과, 극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교회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의 흐름을 보면서, 교회론의 형성 과정의 단편을 이해하였다. 어떤 것은 현재 로마가톨릭에서 계승하고, 개신교와도 다른 것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회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그리스도를 배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Ⅳ. 맺는 말
지금까지 교회론에 대해 초대 교부를 중심으로 이해해 보았다. 교회라는 것의 생성과정과, 사상의 흐름을 통해, 교회를 이해하고, 교회의 교리가 생성되기 까지는 숱한 논쟁과 싸움, 그리고 피흘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도 힘의 논리와, 인간의 이점에 의해 결정되는 교리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힘의 논리로 사라지고, 어떤 것은 도태되어서 사라졌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정들을 수없이 겪으며 형성 된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수많은 사상과 전통, 그리고 논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원초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통로가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논쟁이 나쁘다고 볼 수 는 없다. 문제는 논쟁을 통해 서로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행태에 있다.
교리가 다 옳다거나, 성경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교리나 전통이 절대성을 가져서 성경의 권위에 반 할 수 도 없다. 하지만, 교리는 지난 날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유산으로 주셨다고 한다면, 과거의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에게 교리를 유산으로 주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유산을 잘 바라보아야한다. 그리고 연구를 통해 그 시대에 직접 들어가, 그 당시의 상황을 보고, 이해하여야한다.
역사라는 것은 후대에 의해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없다면, 후대에는 그들의 선배가 저지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닌, 신학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신학이 후대에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시대의 잘못된 사상에 의해 비난을 받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성경’이다. 적어도 교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더 그리스도에게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포털 사이트 네이버, 교회에 대한 검색결과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4048600)
도날드 K. 맥킴, 「교회역사를 바꾼 9가지 신학 논쟁」 (기독교연합신문사,2005)
조영엽, 「교회론」 (CLC,2012)
J.L.곤잘레스, 「간추린 기독교 교리사」 (컨콜디아사,2010)
E.G.제이, 「교회론의 변천사」 (대한기독교서회,2002)
김영도, 「도나투스주의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세례 이해」 (한국교회역학회지, 2006)
김선정, 「요한복음서와 로마황제숭배」 (신약논단,2006)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 (한길사,2010)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나눔과 섬김,2010)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 (한길사,2010)
이것은 감독을 중심으로 노바티안파를 배척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그들의 이러한 교회관은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 아니므로, 교회의 보편성과도 어긋나게 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론 자체는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었어도, 생각 자체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4세기부터 5세기초까지의 교회관에서 살펴 볼 인물은 예루살렘의 키릴과 도나투스주의자들이다. 우선 예루살렘의 키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이해하면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경륜과, 성령의 교감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성례의 의미에 초점을 두고 성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었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에게 종속되어지겠다고 믿고, 선언한 순간부터 그의 신비로운 몸의 일체가 되어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러한 생각에 성례를 포함시키고, 이후에 이들이 말한 의미를 중시하지 않고, 의식자체를 중시하며 변질되지만, 이들의 이런 이해는 교회의 일치성에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대로 도나티스트들은 교회를 교회를 분파하고, 사랑과 자비를 경시하며 교회의 일치성과, 보편성, 거룩성을 모두 훼손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분파하며 다른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만의 특별성을 주장한다. 이에 따라 교회의 보편성이 가지는 두 가지 의미가 무시당하였고, 교회를 분파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들만이 특별하고 참된 감독이므로 다른 감독들과 그리스도인을 무시하며 일치성을 부인하였다. 또한, 그들의 세력 확장에는 폭력이나 위협등이 포함 되는 등, 세상과 구별되어진 모습보다는 오히려 세상에서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인 힘의 논리를 따른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이해이다. 그는 이전부터 다뤄져 오던 주제들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개입하여, 교회를 이해하였다. 도나티스트들과 논쟁하며, 초대 교부들이 가지던,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정론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교회관에는 일치성과 보편성, 그리고 은혜를 통한 거룩성이 모두 내제되어있다.
무엇보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지금까지 이해해 오던 교회에, 사랑과 자비를 감미하면서 도나티스트들과, 극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교회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의 흐름을 보면서, 교회론의 형성 과정의 단편을 이해하였다. 어떤 것은 현재 로마가톨릭에서 계승하고, 개신교와도 다른 것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회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그리스도를 배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Ⅳ. 맺는 말
지금까지 교회론에 대해 초대 교부를 중심으로 이해해 보았다. 교회라는 것의 생성과정과, 사상의 흐름을 통해, 교회를 이해하고, 교회의 교리가 생성되기 까지는 숱한 논쟁과 싸움, 그리고 피흘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도 힘의 논리와, 인간의 이점에 의해 결정되는 교리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힘의 논리로 사라지고, 어떤 것은 도태되어서 사라졌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정들을 수없이 겪으며 형성 된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수많은 사상과 전통, 그리고 논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원초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통로가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논쟁이 나쁘다고 볼 수 는 없다. 문제는 논쟁을 통해 서로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행태에 있다.
교리가 다 옳다거나, 성경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교리나 전통이 절대성을 가져서 성경의 권위에 반 할 수 도 없다. 하지만, 교리는 지난 날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유산으로 주셨다고 한다면, 과거의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에게 교리를 유산으로 주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유산을 잘 바라보아야한다. 그리고 연구를 통해 그 시대에 직접 들어가, 그 당시의 상황을 보고, 이해하여야한다.
역사라는 것은 후대에 의해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없다면, 후대에는 그들의 선배가 저지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닌, 신학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신학이 후대에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시대의 잘못된 사상에 의해 비난을 받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성경’이다. 적어도 교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더 그리스도에게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포털 사이트 네이버, 교회에 대한 검색결과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4048600)
도날드 K. 맥킴, 「교회역사를 바꾼 9가지 신학 논쟁」 (기독교연합신문사,2005)
조영엽, 「교회론」 (CLC,2012)
J.L.곤잘레스, 「간추린 기독교 교리사」 (컨콜디아사,2010)
E.G.제이, 「교회론의 변천사」 (대한기독교서회,2002)
김영도, 「도나투스주의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세례 이해」 (한국교회역학회지, 2006)
김선정, 「요한복음서와 로마황제숭배」 (신약논단,2006)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 (한길사,2010)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나눔과 섬김,2010)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 (한길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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